易與天地準, 故能彌綸天地之道.仰以觀於天文,俯以察於地理,是故知幽明之故.

 

易與天地準(역여천지준), 故能彌綸天地之道(고능미륜천지지도).仰以觀於天文(앙이관어천문),俯以察於地理(부이찰어지뢰),是故知幽明之故(시고지유명지고).

 

은 천지의 법칙에 준거하여 이루진 것이므로, 천지의도를 포섭한다. 우러러서 보아서 천문을, 굽어보아서는 지리를 살핀다. 이런 까닭에 幽明의 원인을 아다.

 

여기부터 이하 故神无方而易无體까지는 제4장이다. 이장은 거시적 각도에서 周易이 위대한 저작의 사상 넓이와 깊이 및 철학의의를 논술한다.“易與天地準자는 주희는 로 해석하였다. 그럼 易與天地準의 뜻은 바로 周易이란 책과 천지는 같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말하면 周易은 천지의 법칙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천지의 모사본(模寫本)이므로 故能彌綸天地之道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知幽明之故

는 무엇인가? “는 용이다. 무엇을 씀인가? “을 씀이다. 왜냐하면 역은 彌綸天地之道 이기때문이다. 옛날사람이 천문이라 말한것은 해..별을 가르키며 이른바 지리는 산.하천.언덕.진펄을 가리켜 말한다. ..별의 운행으로 말미암아 흐림과 맑음, 추움과 더움이 생겨나고, .하천.진펄의 양육으로 말미암아 나는 새와 물고기, 동물과 식물이 있게된다.

유는 깊이 숨음이고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명은 드러남으로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유명은 일반적으로 만물이 생성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표현해 내고 있는 두 종류의 상황을 가르킨다.

고는 원인이다. 知幽明之故는 만물이 생성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표현해 내는 두 종류의 상황을 알 수 있음을 말하며 그 근본 원인은 천지라는 두 가지 큰 시작인 근원인 천과 생성의 근원인 지가 발생하는 변화에 있다.

 

 

原始反終,故知死生之說. 精氣爲物,游魂爲變,是故知鬼神之情狀.

 

사물의 시초를 미루어 사물의 종말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정기는 물이 되고 유혼은 변이 된다. 이런 까닭에 귀신의 정황을 알수있는 것이다.

 

原始反終󰡔경전석문󰡕 에 의거하면 어떤 책에는 原始及終으로 되어 있는 데 原始及終이 아마도 옳은것 같다. 문맥의 이치를 보나,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해 쉽게 혼동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 납득이 간다. 사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사람은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 사람에게 태어남과 죽음이 있고, 사물에 시작과 마침이 있는 이치는 똑 같다. 시작을 미루어 보면, 바로 마침에 이르니及終마침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같은 이치로, 을 알면 를 아니, 태어남을 미루어 보면,죽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말하기를 생을 알지 못 하는 데 어찌 사를 알겠느냐 라고 하였다. 공자는 일에는 시작과 마침이 있고 사람에게는 태어남과 죽음이 있다는 문제에 관하여 매우 현명하게 파악하고 대처 하였다.

故知死生之說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삶을 적극적으로 영위해 나감을 말한다. 공자가 이해한 삶과 죽음의 문제는, 도가(道家)가 주장하는 제생사(齊生死. 삶과 죽음의 문제를 똑같이 여김)’, ‘민생사(生死.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함)’, ‘경생사(輕生死.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볍게 여김)’, ‘임생사(任生死. 삶과 죽음의 문제는 내버려 둠)’, 등의 사생관(死生觀)과는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공자는 인생관에 있어서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현실주의자로, 죽음의 문제는 그대로 놔두고, 삶의 문제는 더욱 중시 하였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精氣爲物이 형체를 이루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물의 모임이다.

游魂爲變은 물이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아도 알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또한 물의 흩트러짐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영원히 쉬지 않고 흩어졌다 모이고,있다가 사라지고, 하는 운동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운동 변화는 사람이 파악하고 예측하여 알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는 그것을 귀신이라 말한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귀신은 정황이 없다고 하나, 󰡔󰡕에서는 귀신은 정황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에서 말한 귀신은 어떠한 신비도 갖고 있지 않고 다만, 세상의 모든 만사만물이 흩어지고 모이고, 있다가 사라지는 과정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은 그것을 조화의 흔적이며 음양이기(陰陽二氣)의 양능(良能)이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말한 유명(幽明), 사생(死生), 귀신(鬼神)은 모두 유물론의 명제이다. , 유명, 사생, 귀신은 (사람의 생명과정 속에 내재된 것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현상을 말한 것인데, 󰡔󰡕에서는 바로 이러한 현상들을 반영하여 설명한다.

 

 

與天地相似, 故不違.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 旁行而不流, 樂天知命, 故不憂. 安土敦乎仁, 故能愛.

 

󰡔󰡕과 천지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어긋나지 않는다. 지혜는 만물에 두루 미치고 도는 천하를 구제하기 때문에 지나침이 없다. 두루 행하지만 추호도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자연과 자연(사회)의 객관법칙을 기꺼이 다른다. 그런 까닭에 근심하지 않는다. 편안히 거처하고 인에 돈독하니 만인과 만물을 사랑할수 있다.

 

與天地相似, 故不違는 윗 문장 易與天地準과 의미가 서로 통한다. 󰡔󰡕은 하늘과 땅의 모사본(模寫本) 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이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는가에 따라 󰡔󰡕 또한 바로 그 모양을 갖추고 있게 된다. 그러므로 󰡔󰡕과 천지는 어긋남이 없다. 어긋남이 없는 것은 또한 서로 비슷하고 같은 것이다. 󰡔󰡕은 천지와 더불어 그 을 합하고 그 밝음을 합하고 그 길흉(吉凶)을 합한다. 우주 사이에는 천지가 있으면, 󰡔󰡕에는 건곤이 있다. , 천지는 만물을 낳고, 건곤은 64를 낳는다. 천지에 유명, 사생, 귀신이 있음에, 󰡔󰡕에 또한 유명, 사생, 귀신이 있다. 󰡔󰡕의 발전변화는 천지의 발전변화를 반영한다. 공자는 생각하기를, 천지는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 또한 자연적인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천지와 󰡔󰡕에서는 어떠한 인위적 작용도 있을 수 없다.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에서 천지에는 마치 지혜가 있는 듯하고, 그 지혜는 만물에 두루 미친다. 천지의 법칙은 세상의 모든 사물 가운데에 퍼져 있어 털끝만큼의 빠트림이나 잘못됨이 있을 수 없다. 󰡔󰡕과 천지는 완전히 똑같아, 󰡔󰡕의 지혜는 64괘 가운데 널리 존재하고 또 자연계 만사만물의 문제를 두루 반영한다. 또한 󰡔󰡕의 도는 만사만물의 법칙을 두루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물, 모든 문제는 모두 󰡔󰡕의 작용범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화에 대해서 말하자면, 조화는 보편적이면서, 세밀하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은 모두 조화의 작용을 벗어날 수 없으니, 절대로 빠트림이나 잘못됨이 있을 수 없다. 또한 󰡔󰡕도 마찬가지로, 보편적이면서 세밀하고, 포용하는 폭 또한 넓고 크며, 작용이 완전히 갖추어져,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旁行而不流旁行은 보편의 의미이고, ‘는 어떤 책에는 로 되어 있다. ‘不流는 사실 不違’, ‘不過와 뜻이 비슷하다. ‘旁行而不流이 구절은 앞의 구절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를 보강한 것이다.

樂天知命,故不憂’, 이 구절의 주어는 마땅히 󰡔󰡕이어야 하고, 동시에 󰡔󰡕을 배우는 사람이다. 대체적인 의미는 의 문제를 설명한 것으로, 아랫 구절에서 의 문제를 설명한 安土敦乎仁과는 서로 대조가 된다. 󰡔󰡕에서 말하는 지는 매우 깊이가 있고, 높은 단계의 것으로, 이미 자연과 자연의 객관법칙을 순순히 따라서 근심하지 않음의 수준에로 까지 인식되어 진다. 천은 자연계이고 樂天은 바로 자연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다. 은 사람의 의지로는 바꿀 수 없는 객관법칙으로, ‘知命은 바로 객관의 법칙을 승인함과 아울러 그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다. 맹자가 그렇게 함이 없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은 천이고, 이르게 함이 없는데도 이르는 것은 명이다.’ 라고 말한 것도 천을 자연으로 생각하고 명을 법칙으로 생각하였으니, 모두 󰡔󰡕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맹자와 󰡔󰡕은 천과 명을 모두 저절로 그러하여 그러한 것 이고,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이해 하였기 때문에 의지적이며 주재적인 내용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요컨대, 인격화된 상제와 상제의 의도는 모두 아니다. 󰡔󰡕 중에는 상제의 지위를 드러내 놓지 않는다. 󰡔󰡕의 사상과 󰡔역대전(易大傳)󰡕을 지은 공자의 사상은 일치한다. 공자의 사상은 아마도 󰡔󰡕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매우 큰 것 같고, 󰡔󰡕의 사상 또한 공자의 󰡔역대전󰡕으로 말미암아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공자가 일찌기 말한 오십에 천명을 터득했다, ‘오십에 󰡔󰡕을 배움에 크게 잘못됨이 없었다라고 한 것과, 여기의 樂天知命의 뜻은 실제로 상통한다. 왜냐하면, 천지자연과 그 법칙을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름지기 오십세에 이르러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은 자연 및 사람의 일人事, 그 법칙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을 배우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가령 󰡔󰡕에서 말한 천명이 상제와 상제의 의도라고 한다면, 어찌 오십에 이르러서야 만이 천명을 터득할 수 있단 말인가? 상제의 보살핌이 있다면 어찌 또한 󰡔󰡕을 배워야만 허물이 없단 말인가? 󰡔󰡕 가운데 천명 이 한단어의 함의는 의심할 것 없이 객관법칙이며 필연성이다. 󰡔󰡕은 자연과 사회, 천과 인, 주체와 객체를 함께 고찰한다. 세계가 어떤 모습인가에 따라 󰡔󰡕 또한 바로 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어긋남이나, 지나침不違不過不流이 없다. 세계는 쉬지않고 끊임없이 운동변화하고 있으며, 󰡔󰡕 또한 쉬지않고 끊임없이 운동변화하고 있다. 󰡔󰡕에는 모든 자연과 사회의 법칙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 자연(사회)의 객관법칙을 순순히 따르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고樂天知命故不憂’, 󰡔󰡕을 배우는 사람도 자연과 자연(사회)의 객관법칙을 순순히 따르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 “樂天知命故不憂는 역의 이지이성의 일면을 표현하고, 아랫 구절 安土敦乎仁, 故能愛는 역의 정황과 인성(人性)의 일면을 표현한다. 이 점은 노자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노자는 말하기를 천지가 불인하니 만물은 하찮은 것이 된다.” 라고 하니 󰡔󰡕에서는 지혜로움과 자애로움을 함께 언급하며, 󰡔󰡕 가운데에는 인이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한다. 󰡔󰡕 중에는 자애로움이 이미 있으므로 도는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 󰡔󰡕을 배우는 사람은 편안히 거처하고하니 인에 돈독하니 만인과 만물을 사랑할 수 있다.

 

 

範圍天地之化而不過, 曲成萬物而不流, 通乎晝夜之道而知, 故神无方而易无體.

 

천지의 조화를 규정하니 지나치지 아니하며, 만물을 곡진하게 이루어 빠뜨리지 않으며, 낮과 밤의 도에 통하여 안다. 그러므로 은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고, 역은 일정한 형체가 없다.

 

 

이 제4장은 모두 사실 음양이라는 한 쌍의 개념을 통하여 󰡔󰡕의 철학적의의를 논술한 것이다. 󰡔장자󰡕 「천하(天下)역은 음양을 설명한 것 이다라는 말의 정확성은 이 단락에서 음양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증명이 된다. 󰡔󰡕에서 말하는 , , 은 그 명칭은 다르나 실제로는 같은 개념으로서 모두 음양이다. 즉 음인지 양인지 헤아릴 수 없음을 ,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 음양이 낳고 또 낳는 것을 이라고 일컫는다.

여기에서 天地之化는 음양의 , 만물은 음양의 형체를, ‘晝夜는 음양의 이치를 말한다. ‘範圍는 테두리를 만들고 제약함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치지 못함이 없으니 곧 이다. 즉 역과 천지의 조화는 일치한다. 이는 대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만약 상세한 부분을 들춰내 언급한다면, 그것은 또한 각기 다른 다양한 종류의 사물을 곡진하게 이룰 수 있지만 빠뜨리거나 빼놓는 경우는 없다.

通乎晝夜之道而知, 이 구절은 옛날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제로 주야의 도는 곧 음양의 도이다. 세상의 만사만물에는 음양이라는 두 측면이 있고, 이 음양 두 측면은 또한 유명, 혹은 주야의 두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확대하여 보면 굳셈과 부드러움剛柔, 죽음과 삶死生,움직임과 고요함動靜, 크고 작음大小, 넓고 좁음闊狹,길고 짧음長短, 모남과 둥금方園및 인사(人事)의 흥성과 쇠락함, 다스려짐과 어지러움治亂, 나아감과 물러남進退, 존재함과 망함存亡,잃고 얻음失得이 되는데 이는 모두 음양이며 또한 주야이다.

神无方에서 은 일정한 방향과 소재가 없다고 하는 까닭은 신은 음인지 양인지 헤아릴 수 없어서 갑자기 음이 되고 또한 갑자기 양이 되기 때문이다. ‘은 상하사방이다. 신은 혹은 여기에도 있고, 혹은 저기에도 있어서 전혀 일정치 않다. 그러므로 神无方이라 한다.

易无體에서 역은 당연히 형체가 없다. 왜냐하면 역은 음양이 낳고 또 낳아 쉬지않는 것으로, 어떤 때는 음에서 양으로, 어떤 때는 양에서 음으로 되는 변동의 과정이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조금도 확정된 형체를 가지고 있지않다. 마치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것처럼 서로 엇갈린 것이 번갈아 듦으로 그것이 결국 무엇인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라고 말한다. 역의 특징은 형체가 없다는 점이다. 정이()역은 변역이다. 때에 따라 변역하니 이것으로서 도를 따른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通乎晝夜之道易知이기 때문에 신은 한자리에 정체한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으며, 역은 변역함므로 일정한 형체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은 음양주야의 두 측면에 모두 통한다는 말로 만약 양은 통하는데 음은 통하지 않고, 낮은 통하는데 밤은 통하지 않고, 생은 통하는데 사는 통하지 않고, 명은 통하는데 유는 통하지 않는다면 바로 알지 못한다. 또한 이것은 신이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역은 일정한 형체를 가지게 있다는 말이다.

 

5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라고 한다. 도를 찾아 이어가는 것은 이고, 이를 이어받아 완성한 것이 이다. 어진 사람은 그것을 보고 이라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보고 라고 하는데, 일반 사람들은 매일 매일 도를 쓰면서도 그 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를 갖춘 사람은 드물다.

 

여기부터 음양불측지위신까지가 제5장이다. 이 장에서는 도의 의미를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一陰一陽之謂道에서 一陰一陽을 말하는 것과 음양을 말하는 것은 같지 않다. 음양을 말함은 곧 를 가르키는 것으로, 기는 형이하의 것이어서 실제 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만물은 기가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기는 반드시 음양 두 측면으로 나누어지는데, ‘낮과 밤晝夜추위와 더위寒暑흐림과 맑음陰晴움직임과 고요함動靜굽힘과 폄屈伸말함과 잠잠함語黙위와 아래上下앞과 뒤前後왼쪽과 오른쪽左右차고 기움숨음과 나타남隱顯및 군자와 소인 등등 같은 것은 모두 한가지 사물의 음양의 두가지 측면이다. 음양 두 측면은 서로 마주하여 작용하고 있어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된다. 사실 이것은 바로 사물이 대립하고 통일하는 관념에 대하여 단지 음양이라는 통속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一陰一陽이란 기가 움직이는 어떤 법칙을 말하며 그것은 형이상으로 텅 비어 있어서 볼 수 없다. 단지 음양만을 말할 때는 도라고 할 수 없고 일음일양이라고 말할 때 비로소 도인 것이다. 음양을 말함은 단지 사물이 음양의 두 측면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므로, 사물의 운동발전변화를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一陰一陽이란 사물은 반드시 운동발전변화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물의 운동발전변화는 반드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는데, 일음일양이 바로 이 법칙이다. 일음일양은 음이 바뀌어 양이 되고 양이 바뀌어 음이 됨을 말한다. 한편 음은 또 바뀌어 양으로 되고, 양은 또 바뀌어 음으로 된다. 음양이 교대로 번갈아 가며 운동하니 사물은 비로소 발전이 있게 된다. 길을 가는것에 비유하면 왼발과 오른발이 서로 교대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되고, 또한 시간의 흐름에 비유하면 반드시 낮과 밤, 오전과 오후, 여름과 가을겨울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길을 걷는데 왼발은 움직이고 오른발은 움직이지 않으며, 시간에 낮은 있고 밤은 없다면, 사람은 곧바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시간도 장차 멈출 것이다. 일음일양이란 말은 기의 유동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진(戴震)도란 행함이다. 기의 변화가 어느 곳이나 흘러가니, 낳고 또 낳아 그치지 않는다.” 라고 말하였는데 매우 합당한 표현이다.

繼之者善也는 계속해서 끊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도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생성하여 그침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이다. 선은 큰 시작은 좋음의 으뜸이다.”의 선이다. 대진의 󰡔원선(原善)󰡕에 의하면 선은 세가지 방면을 포괄한다. 끊임없이 생성하여 그치지 않음이 이며, 끊임없이 생성하되 조리가 있음이 이고, 조리가 있으면서도 경계가 분명하여 어지럽힐 수 없음이 이다.“氣化流行, 生生不已의 도는 일종의 완전하여 결함이 없는 이상상태에 놓여있다는 말인데 이것이 바로 선이다.

成之者性也.”氣化流行, 生生不已의 선이 일단 구체화되어 어떤 구체사물을 형성할 때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다. “도에서 나뉘어지는 것을 명이라 하고, 일에서 드러나는 것을 성이라 한다.” 이것은 繼之者善成之者性의 두 관계에 대한 매우 적절한 설명이다.

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는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하는데, 이 도는 오직 한 개가 있을 뿐이고 세상의 만사만물 가운데에 있어서 그것은 있지 않은 곳이 없고,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부분만 인식하고, 어떤 이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도는 일음일양의 두 측면이 있다. “繼之者善也만물을 만들어 자라게 하는 공적을 말한 것으로化育之功을 말한 것으로 이 하는 일이며, “成之者性也는 생물의 일을 말하며 이 하는 일이다. 음과 양은 서로 대응한다. 음은 이고 양은 이다. 사람들은 도의 일면만 보고 곧바로 도의 전체라 여긴다. 양의 일면만을 본 사람은 도는 바로 인이라 생각하며, 음의 일면만 본 사람은 도는 바로 지라고 생각한다. 도를 인이라고 또는 지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인과 지를 함께 보고 음과 양을 함께 체득하여야만 비로소 도의 전체 모습를 파악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의 경우, 날마다 도와 접촉하지만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도에 익숙하지만 살피지 않고, 도를 수행하지만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쓰지만 알지 못한다.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는 도에 대해서 전면적이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지, 결코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도라 한다의 자연의 도가 적다는 말은 아니다. 자연의 도가 영원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은 많고 적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에서 드러내고 쓰임에서 감춘다. 만물을 부추기되 성인과 같은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 대한 옛날 사람들의 해석은 설이 분분하여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사실 이 단락에서 말한 것은 󰡔󰡕의 효용이다. ‘󰡔󰡕의 응용을 가리키고, ‘󰡔󰡕을 쓰지 않음이다. 사람들이 시초를 응용하여 점을 칠 때, 󰡔󰡕의 인은 드러난다. 그것은 사람들의 행동을 지도하고 길흉회린무구를 알려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길함을 쫓고 흉함을 피하도록 노력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顯諸仁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 그것은 바로 점대와 괘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藏諸用이다. 주희가 일찌기 하나의 형상의 비유로 顯諸仁, 藏諸用의 함의를 설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한 과수나무에 비유하면, 한줄기 뿌리는 많은 나뭇가지와 잎, 꽃과 열매를 생겨나게 하는데 이것이 顯諸仁이다. 한편 결실의 때가 되면 하나의 씨앗은 어린나무로 성장하는데 이것이 藏諸用이다.”라고 하였다. 이 비유는 顯諸仁, 藏諸用두마디 말의 이해를 명백히 드러내는 의의가 있다.

는 동사로 鼓萬物󰡔󰡕64괘를 응용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부딪히는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에는 사상이나 의식이 없고, 사려와 작위가 없다. 성인은 󰡔󰡕과 같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은 사람들의 행동을 지도하는 성인과 같지 않다. 성인이 얼마나 총명예지하든지 관계없이 결국 그 역시 사려와 작위가 있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하를 근심할 수 있고, 천하를 위하여 걱정할 수 있으나 󰡔󰡕은 그와 같이 할 수 없다. 그러나 결코 세상에서 󰡔󰡕의 공적이 성인보다 작다고는 할 수 없다.

 

 

盛德大業至矣哉, 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 生生之謂易, 成象之謂乾, 效法之謂坤, 極數知來之謂占, 通變之謂事, 陰陽不測之謂神.

 

성대한 공덕과 위대한 업적이 지극하도다!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것을 큰 사업이라고 하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성대한 공덕이라고 한다. 낳고 낳음을 역이라 하고, 을 이루는 것을 이라 하고, 본받는 것을 이라 하고, 수를 모두 다 셈하여 돌아올 일을 아는 것을 이라 하고, 통하여 변하는 것을 일이라 하고, 음인지 양인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이라 한다.

 

󰡔󰡕은 세상에 공덕이 있는 것이 결코 성인에 비하여 작지 않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성대한 공덕과 위대한 업적이 지극하도다盛德大業至矣哉라고 하였다. 성대한 공덕과 위대한 업적은 윗 글의 顯諸仁, 藏諸用을 감탄하여 찬양한 것이다. 성대한 공덕은 顯諸仁을 말하고, 위대한 업적은 藏諸用을 말한다.

富有之謂大業이하로부터는 󰡔󰡕에서 항상 사용되는 여덟가지 개념에 대해 간명하고도 정확하게 해석한 것이다. “富有之謂大業大業은 무엇인가? 대업의 특징은 富有이다. ‘부유는 크고 밖이 없어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공간상에서 󰡔󰡕은 천지만물을 포용한다는 말이다.

日新之謂盛德盛德은 무엇인가? 성덕의 특징은 日新이다. ‘일신은 장구하면서 끝이 없고, 변하여 통하되 그침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곧 시간상에서 󰡔󰡕은 천지만물의 변화발전을 포괄한다는 말이다.

요컨데 󰡔󰡕은 광대하면서도 자세하게 갖춘 것이고, 우주는 모두 그것이 드리우고 있는 속에 있다. 그것은 다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장구하기 때문에 영원무궁하다. 󰡔󰡕은 사려와 작위가 없다. 성인과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덕과 대업이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성인과 같다.

生生之謂易은 진일보하여 󰡔󰡕의 성질까지 말한 것이다. 이 역은 먼저 객관세계에서 존재하는 어떤 바뀜을 말한 것이지 󰡔󰡕이라는 책을 말함은 아니다. 이 역은 무엇인가? ‘낳고 낳음生生을 역이라 일컫는다. 역은 음양을 말한다. 음양은 결코 신비스럽지 않으며 음양은 바로 사물 자신의 대립통일의 두가지 측면이며 통속적으로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된다.一分爲二라고 부른다. 역은 음양을 말한다. 그러나 음양이 결코 역은 아니다. 음양이 낳고 또 낳아야만 비로소 역이라 할 수 있다. 음양이 낳고 또 낳는다는 것은 곧 양은 음을 낳고, 음은 양을 낳으며, 양은 또 음을 낳고, 또 음은 양을 낳아, 낳고 또 낳음이 무궁하고 멈춤이 없다는 것이다. ‘자는 여기에서도 또한 전환의 뜻이다.

太極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가 바로 生生의 내용이다. 역의 괘는 바로 이러한 음양이 낳고 또 낳아 형성된 것이다. 먼저 한 개의 음과 양을 그리고, 또 각각 한 개의 양과 한 개의 음을 포개니 사상(四象)을 생성하고, 사상의 한가지 상은 또 한 개의 양과 한 개의 음을 포개니 바로 팔괘가 생성하고, 팔괘의 각 한 괘를 분별하여 팔괘와 포개니 결국에는 64괘를 생성한다. 역은 자연계의 모사본으로 음양 양의가 낳고 또 낳아 멈춤이 없는 과정이다. 자연계 또한 음양 두 기가 낳고 또 낳아 멈춤이 없는 과정이다. 공자는 󰡔󰡕生生之謂易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다시 명확하게 설명하는데, 역은 바로 변화라고 하였다. 공영달(孔潁達)이 말하길 역은 변화의 총 부호로, 변화하는 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라 한 것과 정이()가 말한 역은 변역이다. 때에 따라 변역하니 이로서 도를 따른다.”라 한 것은 모두 바꿀 수 없는 역의 정의이다.

成象之謂乾, 效法之謂坤은 건과 곤 두가지 개념을 해석한 것이다. 건과 곤 두 개념은 󰡔󰡕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계사전처음에서 말하기를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 “乾道成男, 坤道成女.”라고 하였고, 뒷 부분에서 또 말하기를 乾坤毁則无以見易”, “易不可見, 則乾坤或幾乎息矣.”이라 하였는데 건과 곤이 여기에서 가리키는 것은 이미 64괘의 대표가 되는 건곤 두괘 자신이고, 또한 그 나머지 62괘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성된다. 건곤은 즉 乾坤其易之文邪의 건곤이다. 이 뒤 또 하나의 건곤의 의미는 바로 음양 양의이다. 건은 하늘을 상징하며 양이고, 곤은 땅을 상징하며 음이다. ‘건은 하늘이고 곤은 땅이다은 옛날 사람들이 생각한 가장 큰 음양 두 짝이었다. 문제는 成象之謂乾成象效法之謂坤效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앞에서 주역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먼저, ‘成象效法는 두가지 종류의 같지않은 작용이고, 또한 두가지는 한 과정의 두가지 단계라 말할 수 있다. 두가지 단계에서는 또한 건이 먼저이고 곤은 나중이며, 하늘이 먼저이고 땅은 나중이며, 양은 먼저이고 음은 나중이며, ‘成象은 먼저이고 效法은 나중이다. 그 다음, 양에 속하는 모든 것은 단지 이 있을 뿐인데 애매모호하여 윤곽이 결코 분명하지 못하였다. 맨 나중은, 음이 반드시 있어야만 작용을 시작한다. 음의 작용은 본받음인데 본받음을 말한 옛날 사람들은 매우 많다. 실제로 계사전의 다른 한 구절인 在天成象, 在地成形에 근거하면 效法은 또한 成形이다. 성형 또한 바로 양에 의해서 이미 확립된 간략하고도 조잡한 윤곽인데 자세함을 더하여 볼 수 있는 형태를 갖추게 한다. 앞에서 항상 언급한 건()은 만물을 시작하게 하는 것으로 이른바 萬物資始이고, 즉 곤()은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것으로 이른바 萬物資生이다.

極數知來之謂占은 곧 이다. 계사전의 뒷 부분에서 기록한 점치는 방법筮法에 의하면, 천수(天數)5이고 합하면 25가 되며, 지수(地數)5이고 합하면 30이 된다. 천지의 수를 합하면 55가 된다. 55중에서 사용되는 숫자는 49인데, 세번 분이(分二)괘일()설사()귀기(歸奇)4단계를 반복 진행하여 혹은 7, 혹은 8, 혹은 9, 혹은 6을 얻어낸다. 79를 얻어 양효를 그리고, 68을 얻어 음효를 그린다. 이와 같이 6번 반복하여 한 괘가 이루어진다. 한 괘를 얻어내면 바로 미래에 어떻게 노력해야만 흉함을 피하고 길함을 쫓아 쟁취하고, 사업의 성공을 구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極數知來이고 또한 바로 점이다.

通變之謂事은 사람이 시초를 뽑아서 괘를 구하는 문제를 말한다. ‘󰡔󰡕의 점이고 는 사람의 일이다.

陰陽不測之謂神이 구절은 윗 글에서 언급한 一陰一陽之謂道生生之謂易의 두 구절과 대조하여 볼 수 있다. 세 구절은 세가지 개념에 대한 정의이다. 세가지 개념 즉 은 실제로는 한가지 사물을 바라보는 세가지 관점이다. 이 한가지 사물은 바로 음양으로, 만약 음양이 어떤 곳에 고정되어 있어서 움직이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라고 부른다. 기가 움직이고 변하기 시작하면, 명칭은 같지 않게 된다. 때에 따라 음이 되기도 하고 양이 되기도 하니, 음양이 교체하고 변동하는 어떠한 것을 말하여 라고 한다. 즉 음은 양을 낳고, 양은 음을 낳으며, 음양이 낳고 또 낳아 그치지 않는 것을 이라 한다. 음인지 양인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이라 한다. 무엇을 不測이라 하는가?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둘이 있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다이라 하였다. 시초를 뽑아 괘를 구하는 과정에서 7896 가운데 어떤 것을 얻을지는 예측할 수 없다. 왜 예측할 수 없는가? 점의 결과가 음일 수도, 양일 수도 있는 두가지 종류의 가능성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의 변화는 64384, 굳셈과 부드러움이 갈마들어 쓰며剛柔迭用, 위에 있을지 아래에 있을지 일정하지 않으며上下無常, 두루 상하 사방으로 흐르기周流六虛때문에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역의 수많은 변화는 오직 음양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6

夫易廣矣大矣, 以言乎遠則不禦, 以言乎邇則靜而正, 以言乎天地之間則備矣.

 

바뀜은 넓고 크다. 멀리로 말하면 역은 천지를 막라하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역을 막아낼 수 없고, 가까이로 말하면 어느 곳에서나 고요히 바르다. 우주 전체에서 말하면 역은 넉넉하게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여기부터 易簡之善配至德까지가 제6장이다. 이 장은 󰡔󰡕이란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넓고 크며, 천지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말한다.

夫易廣矣大矣󰡔󰡕의 도가 넓고 크다는 것을 찬양한 것이다. ‘은 곤을 가리키고, ‘는 건을 가리킨다.

以言乎遠則不禦는 먼 곳에서 말하면, 천지를 막라하고 형체가 있던 없던간에 󰡔󰡕은 모두 들어갈 수 있어서 어떠한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이다.

以言乎邇則靜而正은 가까운 곳에서 말하면, 󰡔󰡕의 도가 접촉하는 곳은 모두 보이는데 비록 작고,가깝고, 비루한 일이나 물에 이르기까지 배열하여 조치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모두 그것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以言乎天地之間則備矣는 모든 우주에서 말하면, 혹은 하늘, 혹은 땅, 혹은 , 혹은 일, 혹은 사람, 혹은 모두 󰡔󰡕의 법칙 가운데 포괄되어 있어, 󰡔󰡕은 포용함이 없지 않고, 갖추고 있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넓고 크며 갖춤, 이것은 앞에서 말한 富有之謂大業富有를 말한 다.

 

 

夫乾其靜也專, 其動也直, 是以大生焉. 夫坤其靜也翕, 其動也闢, 是以廣生焉.

 

건은 그 고요함이 한결같고, 그 움직임이 곧다. 이래서 큼이 생긴다. 곤은 그 고요함이 합쳐지고, 그 움직임이 펼쳐진다. 이래서 넓음이 생긴다.

 

건곤은 󰡔󰡕의 문이고 󰡔󰡕이 간직한 것이다. 따라서 󰡔󰡕의 특징은 건곤 두 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의 큼은 건으로부터 나오고, 󰡔󰡕의 넓음은 곤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의 큼은 건으로 표현되고 󰡔󰡕의 넓음은 곤으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건의 큼과 곤의 넓음은 건곤의 으로 다르게 표현된다. 건은 동을 주로 하지만 또한 정도 있다. 곤은 정을 주로 하지만 동도 있다. 건곤의 정태로부터 드러남이 같지 않음을 알 수 있고, 건곤의 동태로부터 상호의존적 관계를 알 수 있다. 건의 정은 한결같음이다. 왜냐하면 건은 알갱이이면서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결같다. 건의 동은 곧음이다. 왜냐하면 건은 저절로 그러하여 스스로 움직이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앞에 거칠 것이 없으니 아무런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이다. 건이 고요하면 한결같고, 움직이면 곧바르다는 말은 바로 그것이 나타내는 실제 모습에서 말한 것으로 고요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크다고 한다. 곤의 고요함은 합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곤은 텅 빈듯하지만 둘이어서 마치 한 물건의 반쪽을 나타내는 것 같고, 두 개의 반쪽이 합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다. 따라서 곤이 고요한 까닭은 합쳐지기때문이다. 곤의 움직임은 펼쳐짐이다. 왜냐하면 두 개의 반쪽이 합하기 시작하는 것은 이기 때문에 두 개의 반쪽이 열려 펼쳐지는 것은 바로 이다. 곤의 정과 동은 합하고 펴는 것으로 표현된다. 곤이 고요하면 합쳐지고, 움직이면 펼쳐진다는 것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에서 말하면, 그것은 비길데 없이 넓다고 한다.

요컨데 건과 곤의 넓고 큼은 바로 역의 넓고 큼이고, 역의 넓고 큼은 건곤의 넓고 큼으로부터 생긴다.

 

 

廣大配天地, 變通配四時, 陰陽之義配日月, 易簡之善配至德.

 

넓고 큼은 하늘과 땅에 짝하고, 변하여 통함은 네 계절에 짝하고, 음과 양이 변화하는 법칙은 해와 달에 짝하고, 쉽고 간단한 것의 좋음은 지극한 덕에 짝한다.

 

위의 몇 구절은 역의 넓고 큼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여기의 몇 구절은 역의 넓고 큼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는 서로 비슷하고 서로 대등하다는 말이다. 역의 넓고 큼은 천지와 서로 비슷하다. 역은 건과 곤 두 방면을 포괄하고 건은 실이면서 또한 동을 주재하여 역의 큼을 대표한다. 곤은 텅 빈듯하지만 또 정을 주재하고 도량이 광활하고 만물을 포용하여 역의 넓음을 대표한다. 역의 광대함과 천지는 서로 비슷하고 서로 대등하다. 역이 변화하고 통함은 마치 항상 양변해서 음이 되고, 항상 음이 변해서 양이 되듯이 가고 오는 변화는 네계절이 번갈아 교대하는 것과 비슷하다. 역의 음양변화와 해와 달은 서로 유추하고 서로 비슷하다. 󰡔󰡕의 도는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여 마치 해가 뜨면 낮이 되고, 달이 뜨면 밤이 되듯이 해와 달, 낮과 밤이 임없이 바뀌는 것과 같다. 이상 세 구절은 󰡔󰡕과 자연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

易簡之善配至德이 구절은 󰡔󰡕과 사람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 ‘易簡󰡔󰡕지극한 덕知德이고, 󰡔󰡕의 최고 추상인 동시에 최고 단계의 특징을 말한다. ‘易簡은 쉬우면서도 어렵지 않다는 말로 건에 속한다. ‘易簡은 간편하면서 번잡하지 않다는 말로 곤에 속한다. ‘이간을 근본적 측면에서 말하면 곧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저절로 그러함이다. 본래의 뜻은 이와 같아서 무조작의 의미이다. 역의 이간과 성인의 지극한 덕은 서로 비슷하고 서로 대등하다. 성인의 지극한 덕은 유가의 주장에 따르면 중용(中庸)이다. 중용의 본 모습은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으로, 어떤 일을 처리함에 때에 따라 행하여 가장 적합한 것을 찾는 것이다. 중용의 실천을 위해서는 매우 어려운 수양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역이 쉽고 간결하다는 점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성인의 지극한 덕을 살피면 된다.

 

7

子曰󰡔󰡕其至矣乎! 󰡔󰡕聖人所以崇德而廣業也. 知崇禮卑, 崇效天, 卑法地, 天地設位而󰡔󰡕行乎其中矣. 成性存存, 道義之門.

 

공자가 말하였다. 󰡔󰡕은 지극하도다! 󰡔󰡕은 성인이 덕을 높이고 사업을 넓히는 원리이다. 지는 높고 예법은 낮추어, 높임은 하늘을 본받고 낮춤은 땅을 본받는다. 하늘과 땅이 자리를 베풀어 󰡔󰡕이 그 가운데에서 행하니 본성을 이루어 간직함이 도의(道義)의 문이다.

 

이 단락은 제7장이다. 이 장은 성인이 어떻게 역을 배워야 실제에 응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말한다. ‘는 공자이다. 󰡔역대전󰡕은 공자가 쓴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의미는 󰡔역대전󰡕의 사상이 공자의 것이라는 말이지 공자가 󰡔역대전󰡕 전체를 썼다는 의미는 아니다. 옛날 사람들이 을 말할때 지금의 의미와는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어떤 책을 누가 지었다고 하면 이것은 반드시 그 책은 그 사람에 의해 직접 쓰여진 것을 말하지만, 옛날 사람들이 작을 말한 것은 종종 이와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역대전󰡕의 경우 더욱 복잡하여 어떤 것은 공자가 직접 쓴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어떤 것은 공자가 생존시에 말한 것을 제자들이 추기한 것을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아마도 공자가 그 이전 사람들의 학설을 취한 것일 수 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子曰은 당연히 두번째 경우에 해당된다.

󰡔󰡕其至矣乎는 공자가 󰡔󰡕에 대해 감탄한 것이며 문장방식은 󰡔중용󰡕에 씌여져 있는 공자의 다른 한 구절 中庸其至矣乎와 같다. 이 말은 지극한 곳에 도달하여 더 이상 부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는 의미이다.

󰡔󰡕, 聖人所以崇德以廣業也󰡔󰡕은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은 성인이 덕을 높이고 사업을 넓히는 원리이다. ‘崇德은 곧 그 덕을 받들어 높힌다는 의미로, 사람의 수양을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廣業즉 일을 크게 넓히는 것은 일의 공적을 성취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성인은 인품이 지극히 높은 현명한 군주를 지칭하는 것으로 공자의 이상속에 있는 최고 통지자을 말한다. 공자는 성인은 마땅히 덕과 사업의 두 방면으로 역을 배우고 응용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아마도 󰡔󰡕은 덕과 사업 두 방면에서 성인에게 지도를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고의 통치자로서 말하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실 도덕과 사업의 두 방면이다. 그런데 󰡔󰡕은 이 두 방면의 문제를 충분히 대답하고 있다.

知崇禮卑의 문제를 말한다. , 또는 와 서로 관계가 있다. “知崇禮卑는 지식의 문제를 말한 것으로 고명할수록 더욱 좋다. ‘는 행동의 문제를 말한 것으로 겸손하여 물러남이니 겸양할수록 더욱 좋다. ‘는 높을수록 좋다. 그러므로 성인이 지식을 얻는 것을 어떤 사람은 하늘의 지고지존한 모습을 본받으려는 것이 곧 성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崇效天이다. 예는 낮출수록 좋다. 그러므로 성인은 행위와 사업에서는 땅의 겸허하고 양보하는 모양을 본받으려 한다. 그러므로 卑法地이다. 󰡔󰡕에서 건은 하늘을 본받고 곤은 땅을 본받기 때문에 이른바 崇效天, 效法地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건괘와 곤괘를 본받는다는 의미이다. 건괘와 곤괘를 본받는다는 것은 󰡔󰡕을 본받아서 󰡔󰡕의 가르침을 배운다는 의미이다.

天地設位而易行乎其中矣이것은 天尊地卑’, ‘乾坤定矣를 말한 것으로 󰡔주역󰡕은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내며, 건곤의 위치가 일단 확립되면 연이어 그 나머지 62괘를 낳는다는 의미이다. “易行乎其中矣와 아래에서 말하고자하는 乾坤其󰡔󰡕之蘊邪, 乾坤成列而󰡔󰡕立乎其中矣의 의미는 서로 같다. 이 구절은 윗 글을 총결한 말이다. 성인은 을 숭상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를 숭상해야 하니, 를 숭상하려면 하늘을 본받아야 한다. 사업을 넓히려면 또한 예를 행함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예를 행함에 자신을 낮춘다는 말은 땅을 본받는다는 의미이다. 하늘과 땅을 본받는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을 배우고 󰡔󰡕을 응용함이다. 왜냐하면 󰡔󰡕천존지비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成性存存, 道義之門成性은 제5장의 成之者性也와 의미가 비슷하나 똑같지는 않다. “成之者性也는 그 앞 구절 繼之者善也에 연이어 나오며, 여기의 成性은 앞 구절 天地設位而易行乎其中矣에 연이어 나온다. ‘成性란 항상 󰡔󰡕으로서 덕을 숭상하고 사업을 넓힌다는 의미이며, 결국 그것으로 하여금 본성을 이루고자한다는 의미이다. ‘存存은 보존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일 成性存存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道義之門이니 즉 도의가 따라 나온다는 의미이다. 전체단락의 대의는 만약 사람이 하늘과 땅을 본받아 地崇禮卑할 수 있으면 成性存存하고 道義之門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8

聖人有以見天下之, 而擬諸其形容, 象其物宜, 是故謂之象. 聖人有以見天下之動, 而觀其會通, 以行其典禮, 繫辭焉以斷其吉凶, 是故謂之爻

 

성인은 세상의 만사만물 가운데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도리를 관찰하고, 그 모양새를 본뜨며 그 사물에 알맞게 그려낸다. 그런 까닭에 이라 한다. 성인이 세상의 움직임을 보고 모두 하나로 모여 통하는 것을 살펴 그 모범법칙을 실행하며 말을 붙여 그 길하고 흉함을 판단한다. 그런 까닭에 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道之招也까지가 제8장이다. 이 장은 󰡔󰡕을 지은 사람이 어떻게 괘효의 을 건립하였으며 어떻게 괘사를 연결했는가의 문제들에 대하여 말한다. 이 단락의 전반부는 어떻게 괘효의 상이 세워졌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후반부는 효사를 어떻게 연결했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의 상은 세 종류에 불과하다. 첫째, 괘의 획은 양의 기획(奇劃)과 음의 우획(偶劃)을 상징한다. 둘째, 여덟가지 중심괘의 상은 하늘〕․〕․바람〕․우뢰〕․〕․〕․〕․연못의 종류와 같다. 셋째, 각각의 64괘는 일과 이치에 의거하고 때에 따라서 스스로 취한 상이다. 예를 들면 牝馬之貞’, ‘白馬翰如’, ‘載鬼一車 등등과 같다. ‘은 그윽하고 깊음이다. ‘는 본뜸이다. 󰡔󰡕을 지은 사람은 세상의 만사만물 가운데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다양한 도리를 관찰하여 조목조목 나누어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기획과 우획으로 사물이 음양으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두 큰 측면을 표현하였으며, 택 등으로 사물의 서로 다른 여덟 종류의 성질을 표현하였다. 한편 그는 乾元亨利貞未濟亨, 고흘, 淪其尾 등으로 64종의 서로 다른 시대를 표현하였다. 潛龍勿用’, ‘白馬翰如’, 東隣殺牛不如西隣之등으로 64괘 내에서의 384효의 변화를 표현하였다. 상은 추상성과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한 상은 같은 종류내에서 있는 다양한 일과 이치를 대표하는데, 자신의 상황에 의거하여 이해한 것에 따라 󰡔󰡕을 쓴다. 만일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단지 일과 이치를 딱 잘라 말할 수 있다. 책은 󰡔󰡕󰡔󰡕이지 결코 󰡔󰡕은 아니다. 󰡔󰡕 또한 상징적이다. 󰡔󰡕의 비유는 흥취를 표현하니 이것이 곧 상징함이다. 그러나 󰡔󰡕의 상은 구체적이며 확정적이다. 󰡔󰡕의 한 상은 단지 한가지 일 또는 한가지 이치를 말할 따름이다. 그러나 󰡔󰡕의 상에서 한 상은 수 많은 일과 수 많은 의미를 반영할 수 있다. 󰡔󰡕을 지은 사람은 어떻게 괘의 상과 효의 상을 세웠는가? 바로 그 모습을 본뜬 것이며擬諸其形容이며 또한 각 종류의 사물의 다른 모습을 묘사하며, 아울러 그 사물을 올바르게 본뜬다象其物宜하니 괘의 상 또는 효의 상이 그 분수에 합당하도록 할 수 있다. 건괘를 예로 들자면, 󰡔󰡕을 지은 사람은 천의 상을 취하여 건을 형상화했으니 건은 씩씩함이고 천 또한 씩씩함이다. 천으로 건을 형상화함은 매우 적절하다. 건괘의 육효는 건의 씩씩함이 발전변화한다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에 이때에 여전히 하늘을 취하여 효의 상을 만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므로 건의 육효는 용의 상을 취하는데 이것은 용은 씩씩하면서도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건의 씩씩함은 이것의 변화하는 모습대로 반영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왜냐하면 괘는 사물이 드러내는 모습을 본뜬것이며 또한 사물의 올바른 모습을 상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이라 말한다.

聖人有以見天下之動및 그 이하의 여러 구절은 효사를 말한 것인데 그중에서 會通’, ‘典禮의 두마디가 가장 관건이다. 무엇이 효인가? 효와 괘를 비교하여볼 때 그 의미는 다르다. 괘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爻也者, 效天下之動者也즉 효는 천하 사물의 운동변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사물의 동태는 가장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추측하여 단정하기 쉽지 않다. 󰡔󰡕을 지은 사람은 먼저 천하사물의 운동변화를 관찰한 이후에 운동변화의 회통을 중점적으로 관찰하였다. 회통은 무엇인가? ‘는 모임이니 한 효는 하나의 변화하는 곳이다. 이 점은 아마도 수 많은 의미가 함께 모여있는 것 같아서 그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이것이 통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니 은 곧 통달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여러 상황중에서 가장 합당한 것을 가려내어 변화하는 점의 특징의 의미를 효사로 지어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준괘(屯卦) 初九爻는 적어도 세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괘의 하단에 있어서는 아직 나갈 수 없다. 이것이 준의 의미이다. 둘째, 건곤은 여기에서 처음 교차하여 험난함을 만나니 또한 준의 의미이다. 세째, 풀이 땅을 뚫고 나오는 듯하나 아직 뻗어 나가지 못하니 또한 준의 의미이다. 모든 의미는 여기에 모여진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인 것을 찾으려 하는 것이며 행하여 통하는 의미가 나온다. 이러한 한개의 의미를 찾아내면 바로 통한다. 磐桓利居貞, 利建候는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준괘 초구효의 세가지 의미를 반영하고 또한 사람의 행동방향을 가리켜준다.

以行其典禮에서 은 항상이란 의미가 있다. ‘는 여기에서 행위행동을 가르킨다. ‘典禮는 바로 행위의 준칙규범이다. 한 효의 효사를 추측하면 見天下之動而觀其會通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행동을 표현하며 행위규범과 부합하도록 한다. “繫辭焉以斷其吉凶은 위에서 말한 방법에 따라 설명을 부가한 것으로 길흉을 판단한다는 말이다.

是故謂之爻는 그러므로 효라고 부른다는 말이다.

 

 

言天下之至而不可惡也, 言天下之至動而不可亂也.

 

천하의 지극히 그윽하고 깊은 곳을 말하되 부정적인 태도로 해서는 안되고, 천하의 지극한 움직임을 말하되 어지럽지 아니한다.

 

앞의 구절은 괘를 말한다. 역에서 괘는 천하사물의 가장 오묘한 도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정적 태도로 이것을 보면 안된다. 뒷 구절은 효를 말한다. 역에서 역에서 추측한 효사는 천하사물의 가장 번잡한 운동형태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조잡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擬之而後言, 議之而後動, 擬議以成其變化.

 

을 헤아린 다음에 말하고, 의논한 다음에 움직이니 본받고 의논하여 그 변화를 이룬다.

 

이것은 역을 배우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역을 배우는 사람 또한 역을 지은 사람과 같이 상에서 이것을 추측한 이후에 말해야 한다. 또한 역을 지은 사람은 효에서 이것을 의논한 이후에 움직여야 한다. 추측함과 의논함으로, 사물의 변화를 파악하고 말과 행동을 삼가해야 한다. 때의 변화를 장악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두 쟁취하여 힘들여 얻는다면 아마도 좋은 결과에 이를 것이다.

Posted by 샤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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