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능력은 타고난 것인가? 습득하는 것인가?  문법 능력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어떤 언어이건 상관없이 일정한 능력을 ‘생득’하고 있다는 학설이 있다. 놀라운 주장이다. 어떤 언어이건 문법을 익히는 것이 제일 지겨운 공부인데 말이다. 아이들은 태어나면 극히 적은 양의 어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부모와 주위 사람들이 들려주는 제한된 어휘만 듣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한다. 보통은 당연하게 들리는 이야기이지만, 학자들의 시각에서는 그렇지 않은 가 보다.  어떤 이는 ‘어린아이들은 창의적인 방식으로 짧은 시간에 놀라운 언어를 구사한다’라고 경외감을 표한다. 심지어 노엄 촘스키는 인간에게 내재된 보편적인 문법체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어떤 부분의 타고난 잠재능력을 갈고 닦아 능력을 습득한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론은 지난 수십 년간 언어학계에 많은 논란거리를 만들었고 언어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선사하는 듯 하다. 촘스키의 새로운 시각은 어떤 언어를 막론하고 문법을 심층구조와 표층구조로 재구성하게 했다. 문법의 내적이고 외적적인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 봄으로써 생각지도 않게, 파생적으로, 인간이 가진 창조성의 근원에 대해 살짝 들여다 볼 수 있게된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언어학이 인간 본성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심오한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게 보통일테니까. 언어학의 측면에서 인간의 언어적 능력은 잠재되어 있고, 성장하면서 습득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수리능력이나 보행능력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인간의 수리나 보행에 대한 잠재 능력들은 날 때부터 내제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분화되지 않고 생득영역에 원석처럼 주어져있는 지도 모른다.  아기의 수리능력에 대해 한 공중파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실험에서 보면, 갓 태어난 아기가 상자 속에 두 개의 공을 보여주다가 하나를 빼고 보여주면, 아기들이 공통적으로 뭔가 바뀐 것에 대해 알아채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아직 걸음마 단계가 아닌 영아의 경우도 일으켜 세우면 앞으로 걸어 갈 듯이 발을 내딛는다. 이러한 운동능력에 대한 생득영역은 세상에 나와 두어 달 만에도 무서울 정도로 순식간에 손이 물건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발화되어 습득되어지는 본능적인 능력이라 할 것이다. 


 그 생득영역이 분화되는 과정은 아기가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음식을 입 주변과 자신의 주변에 흩뿌리며, 괴성을 질러가며 먹어보려는 노력의 과정일 것이다. 천재라면 세 살, 보통은 네 살은 되어야 두어 번에 한번 정도의 시도에서 수저의 음식더미를 입속으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정교하게 집어넣을 수 있게 된다. 마침내 그 부모의 인내심도 빛을 보게 되고, 아이의 한 생득영역에 묻혀있던 원석같은 잠재력도 빛을 발하며 분화의 과정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생득’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지각은 그 생득영역이 현저히 발휘되고 개발된 이후에야 발견되었다. 즉 언어 영역에서는 우리의 무리 중에 한명이, 그 영역에서 천재성을 보이는 촘스키 같은 이가 세상에 나오고서야,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보편문법을 되돌아봄으로써 가능했다.  


 언어, 수리, 운동 능력 등 개인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배우고 익혀서 갖추게 되었다고 알고 있는 능력들이 원래 생득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처럼 어떤 잠재역량으로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다른 한편으로, 생득영역에 있는 그 원석들은 모두 개발되어 분화된 걸까? 아니면 내재되었지만 분화되지 않은 생득영역도 있지 않을까? 이를 테면,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슈퍼 기억력, 꿈을 통해 미래를 보거나 돈을 값지 않을 사람을 미리 알아보는 예지력 같은...


예지력의 경우 객관적으로 반복적이고 재생 가능한 실험을 할 수 없을 테니 과학적으로 탐구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왔다. 하지만, 미국에서 화재가 된 적이 있듯이 화산이 폭발할 것을 미리 보도 한 기사라던가, 미래를 정확히 예견한 사례 들은 우연의 일치로 치부되기에는 너무 많다.  


과거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기억하는 것은 이제 어렵지 않다. 슈퍼 기억력은 분화되고 개발된 생득영역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최면술을 이용하면 된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회에서는 이십 년 전에 살해되어 미궁에 빠진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내용이 방영되었다. 그런데 피해자의 남동생이 최면을 통해 단서를 찾아보기로 했고, 이십 년 전 사건당일 아침에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여자였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살인자가 여자일 수도 있다는 여러 가지 단서가 그 기억 때문에 이십년만에 퍼즐처럼 맞춰졌고, 시청자들에게는 소름끼치는 서늘한 여름밤을 제공했었다.


그렇다면, 의지를 가지고 있건 없건 우리의 감각기관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는 영원히 기억되는 걸까? 슈퍼기억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것도 생득영역의 한 원석같은 잠재 능력이라면 필요할 때 스스로 어떤 시점의 기억을 불러내는 능력은 전혀 발화되지 않은 것이리라.   

한편, 인간성의 심오한 부분까지 관찰하게 된 언어학자 촘스키는 인간이 생각으로 알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언어학을 통해 인간성의 심오한 부분까지 관찰하게 된 덕분이다. (이후 촘스키는 일평생 정치,사회,철학,국제문제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사사건건 나서고 있다.)  그는 선형적이고 시간 순응적인 인간의 언어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인간의 한계점도 주장한다. 언어는 제한적이며, 촘스키가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내재된 도식같은 문법을 가지는 자체가 한계를 포함하고 있다. 한계성을 지닌 내재된 문법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생각으로만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유추되는 것이 당연하다. 

 다른 철학자의 비슷한 주장은 또 있다. 인간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창조적인 것 같지만, 훔볼트는 그것이 내재된 규칙의 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즉, 어떤 주어진 틀이나, 플렛폼 안에서,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 변형하고 조합하는 것을 창조성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어떤 부분의 능력에 대해 최고점까지 발전할 수 있는 잠재능력에 해상하는 원석들을 생득영역에 가지고 있지만, 그 원석으로 인해 애시당초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요약하건데, 인간은 태어날 때 한계치를 지닌 각 능력들에 대한 생득영역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득영역의 원석은 아예 발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먼 과거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미래를 다소 예지할 수 있는 능력도 인간 모두가 생득영역에 잠재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러한 잠재역량은 언어활동처럼 일상의 필요에 의해 사용되지도 않고, 인간 무리의 과학적 연구의 회귀선상에서 계승되고 발전되지 않아서, 우리 모두의 생득영역에서 쭉정이처럼 자랄 듯 말 듯 쭈구려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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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편집인 샤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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