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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5.29 주역계사전 번역 김경방 원저 3편

初六藉用白茅無咎 子曰 苟錯諸地而可矣 藉之用茅 何咎之有 愼之至也 夫茅之爲物薄而用可重也 愼斯術也以往 其無所失矣 勞謙君子有終吉 子曰 勞而不伐 有功而不德 厚之至也 語以其功下人者也 德言盛 禮言恭 謙也者 致恭以存其位者也 亢龍有悔 子曰 貴而無位 高而無民 賢人在下位而無輔 是以動而有悔也 不出乎庭 無咎 子曰 亂之所生也 則言語以爲階 君不密則失臣 臣不密則失身 幾事不密則害成 是以君子愼密而不出也 子曰 作易者其知盜乎 易曰 負且乘 致寇之 負也者 小人之事也 乘也者 君子之器也 小人而乘君子之器 盜思奪之矣 上漫下暴 盜思伐之矣 慢藏誨盜 冶容誨淫 易曰 負且乘 致寇至 盜之招也

 

初六藉用白茅無咎(초륙자용백모무구) 子曰(자왈) 苟錯諸地而可矣(구착제지이가의) 藉之用茅(자지용모) 何咎之有(하구지유) 愼之至也(신지지야) 夫茅之爲物薄而用可重也(부모지위물박이용가중야) 愼斯術也以往(신사술야이왕) 其無所失矣(기무소실의) 勞謙君子有終吉(노겸군자유종길) 子曰(자왈) 勞而不伐(노이부벌) 有功而不德(유공이부덕) 厚之至也(후지지야) 語以其功下人者也(어이기공하인자야) 德言盛(덕언성) 禮言恭(례언공) 謙也者(겸야자) 致恭以存其位者也(치공이존기위자야) 亢龍有悔(항롱유회) 子曰(자왈) 貴而無位(귀이무위) 高而無民(고이무민) 賢人在下位而無輔(현인재하위이무보) 是以動而有悔也(시이동이유회야) 不出乎庭(부출호정) 無咎(무구) 子曰(자왈) 亂之所生也(난지소생야) 則言語以爲階(칙언어이위계) 君不密則失臣(군부밀칙실신) 臣不密則失身(신부밀칙실신) 幾事不密則害成(기사부밀칙해성) 是以君子愼密而不出也(시이군자신밀이부출야) 子曰(자왈) 作易者其知盜乎(작역자기지도호) 易曰(역왈) 負且乘(부차승) 致寇之(치구지) 負也者(부야자) 小人之事也(소인지사야) 乘也者(승야자) 君子之器也(군자지기야) 小人而乘君子之器(소인이승군자지기) 盜思奪之矣(도사탈지의) 上漫下暴(상만하박) 盜思伐之矣(도사벌지의) 慢藏誨盜(만장회도) 冶容誨淫(야용회음) 易曰(역왈) 負且乘(부차승) 致寇至(치구지) 盜之招也(도지초야)

 

 

(대과괘의) 초육에서 제물의 밑에 깔기 위해 흰 띠풀을 사용한다. 허물은 없다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제물은 그냥 땅에 놓아도 좋다. 그런데 그 밑에 띠풀을 사용하는 데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삼가는 마음이 지극한 것이다. 띠풀은 하잘 것없는 것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가치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삼가하며 나아가면 실패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겸괘의) 구삼에서 힘쓰고도 겸손하다. 군자가 죽을 때까지 이를 지키면 길하리라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힘쓰고도 자랑하지 않고 업적이 있어도 덕이라 하지 않으니 도타움의 극치이다. 이것은 공덕이 있으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덕스런 말은 성대하고 예의 바른 말은 공손하다. 겸손은 공손을 다함으로써 그 지위를 보존한다라고 하였다.

(건괘의) 상구에서 끝까지 날아 오른 용은 후회가 있다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존귀하나 지위가 없고 지위가 높아도 백성이 없다. 현인이 자기보다 아래에 있으나 보필함이 없다. 이러하므로 행위하면 후회가 있다고 한다.

(절괘의) 초구에서 집 뜰을 나가지 않는다. 허물은 없다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어지러움이 생기는 것은 말이 씨가 되기 때문이다. 임금이 주도면밀하지 못하면 신하를 잃게 되고 신하가 주도면밀하지 못하면 제 몸을 잃게 된다. 나라의 기밀이 누설되면 나라에 해로움이 초래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주도면밀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는다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주역󰡕을 지은이는 도둑의 생리를 살필 줄 아는가 보다라고 하였다. (해괘의) 육삼에서 짊어지고 또 탄다. 도둑을 오게 만드는구나라고 한다. 짐을 등에 지는 것은 신분이 천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수레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타는 기구이다. 그런데 신분이 천한 사람이면서 신분이 높은 사람이 타는 수레를 타면 도둑이 빼앗을 마음을 먹는다. 즉 웃사람은 게으르고 아랫사람이 난폭하면 도둑은 칠 마음을 먹는다. 간수에 태만하면 도둑질을 불러 일으키고, 얼굴을 현란하게 화장하면 음탕함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주역󰡕에서 짊어지고 또 탄다. 도둑을 오게 만드구나라고 한 것은 도둑은 스스로 불러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이상 다섯 단락의 서술은 위의 鳴鶴在陰同人先號而後笑라는 문장과 그 의미가 같다.

藉用白茅無咎는 대과(大過)괘 초육의 효사이다. 공자는 이 효를 읽고 일을 함에 지극히 신중하여 하나라도 잃음이 없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勞謙君子有終吉은 겸()괘 구삼의 효사이다. 공자는 이 효를 읽고 공손함을 다하여 그 지위를 지켜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亢龍有悔는 건()괘 상구의 효사이다. 공자는 이 효를 읽고 귀하면서도 지위가 없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백성이 없고 어진 사람이 아랫자리에 있으나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움직이면 후회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不出乎庭 無咎는 절()괘 초구의 효사이다. 공자는 이 효를 읽고 언어가 신중하고 면밀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負且乘 致寇之는 해()괘 구삼의 효사이다. 공자는 이 효를 읽고 마땅히 타지 않아야 할 것을 타면 도둑을 부른다고 생각하였다.

 

9

天一 地二 天三 地四 天五 地六 天七 地八 天九 地十 天數五 地數五 五位相得而各有合 天數二十有五 地數三十 凡天地之數五十有五 此所以成變化而行鬼神也

 

하늘은 1이고 땅은 2이다. 하늘은 3이고 땅은 4이다. 하늘은 5이고 땅은 6이다. 하늘은 7이고 땅은 8이다. 하늘은 9이고 땅은 10이다. 하늘수는 다섯이고 땅수도 다섯이다. 다섯 자리가 서로 사이좋게 각각 합치니, 하늘수의 합은 25이고 땅수의 합은 30이다. 하늘수와 땅수의 합은 55이다. 이것이 변화를 낳고 신비로운 일을 행하는 이유가 된다.

 

여기부터 其知神之所爲乎까지가 제9장이다. 이 장은 점치는 법을 설명한다. 점치는 법은 매우 중요하여 󰡔주역󰡕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며, 철학적 의미에서 말해도 결코 괘의 중요성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고대에는 한 종류의 점치는 법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주례(周禮)󰡕 「춘관서인(春官筮人)에서는 아홉 가지의 점치는 법을 제시한다. 애석하게도 뒤에 와서 대부분의 점치는 법이 전승되지 못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단지 계사전에 남아 있는 한 종류의 점치는 법만을 볼 수 있다. 이점은 우리가 공자에게 감사하여야 한다. 그가 만약 역전에 적어 놓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이 한 종류의 점치는 법조차 볼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天一地二…… 天九地十라는 글이 어떤 의미이고 천과 지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주석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많은 책들도 시원스레 설명하지 못한다. 주희가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하도(河圖), 낙서(洛書)로 해석한 것은 맞지 않다. 사실 천과 지는 결코 신비하지 않다. 천과 지는 곧 음과 양이다. ‘天一地二등은 자연수를 두 유형으로 나눈 것이다. 홀수는 하늘수라고 부르고 양의 수라 부른다. 짝수는 땅수라고 부르고 음의 수라고 부른다. 천과 지, 음과 양, 홀과 짝은 한통속이어서 천은 홀수를 대표하고 지는 짝수를 대표한다. 1,3,5,7,9는 홀수이고 하늘수라고 부른다. 2,4,6,8,10은 짝수이고 땅수라고 부른다. 하늘수와 땅수, 홀수와 짝수는 부르는 방식이 다르지만 실제로는 같아서 대립의 통일이란 의미이다. 여기에서 1부터 10까지 말하고 멈추는데 10은 매우 중요한 숫자이다. 인류학에 의하면 인류의 초기에 2만을 인식하고 그 다음 3을 인식하고 5를 인식하였으며, 그런 다음에야 10을 인식하였다고 한다. 하나의 수에서 다음의 수를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 진보였으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련의 학자인 柯斯文(?)의 저작인 󰡔원시문화사강原始文化史綱󰡕에서는 원시 부족의 언어 중 2라는 것은 단지 한 사물의 절반 두 개를 의미한다고 하니 10으로 발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들의 조상은 10을 가득찬 수로 보았다. 수가 10까지 발전하자 가득찬 듯하다고 생각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10,000도 가득찬 수로 보았다. 󰡔좌전󰡕 장공(莊公) 16년 조에는 “(정나라 왕이 말하기를) ‘공숙의 자손이 정나라에서 끊기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10월에 (공숙을) 정나라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또 좋은 달이다. (왜냐하면) 가득 찬 수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不可使共叔無後於鄭 使以十月入 曰 良月也 就盈數焉)”라고 하여 10을 좋은 수, 가득찬 수라고 본다. 두예(杜預)의 주에서는 수는 10에서 가득찬다(數滿於十)”고 하고, 공영달(孔穎達)의 소()에서는 계사전에서 天一地二天三地四天五地六天七地八天九地十이라고 말하면서 10에서 그만두었으니 수가 10에서 가득찬 것이다(繫辭傳云 天一地二天三地四天五地六天七地八天九地十 至十而止 是數滿於十也)”고 하였다. 󰡔좌전󰡕 민공(閔公) 원년에 필만의 자손은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만은 가득 찬 수이기 때문이다(畢萬之後必大 萬盈數也)”라고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수가 10에 이르면 이미 가득 차고 10,000에 이르면 가장 크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10을 작은 채움(小盈), 10,000을 큰 채움(大盈)이라고 불렀다. ‘만물자는 가장 많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좌전󰡕 희공(僖公) 4년 공영달의 소에서 “10은 수의 작은 완성이다(十是數之小成)”고 말한다. 옛날 사람은 특별히 10이라는 작은 채움[小盈], 작은 이룸[小成]의 수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계사전에서 말하는 점치는 법은 10과 관련이 있다.

天數五 地數五 五位相得而各有合에서 天數五1,3,5,7,9 다섯으로 하늘수이다. ‘地數五2,4,6,8,10 다섯으로 땅수이다. 10 이내의 다섯 홀수와 다섯 짝수이다. ‘五位相得이란 12가 서로 사이좋고 34가 서로 사이좋고 56이 서로 사이좋고 78이 서로 사이좋고 910이 서로 사이좋다는 것을 말한다. ‘各有合은 다섯 하늘수의 합이 25와 같고 다섯 땅수의 합이 30과 같다는 것이다. 2530을 더하면 55가 된다. 이것이 凡天地之數五十有五이다. 󰡔주역󰡕의 모든 변화가 신비하여 짐작할 수 없는 것은 다섯 하늘수와 다섯 땅수가 합하여 55가지의 변화를 낳기 때문이다. ‘五十有五의 변화는 7,8,9,6이라는 네 수를 낳는다. 7,8,9,6의 변화로부터 효가 생기고 효로부터 괘를 만든다. 이른바 成變化而行鬼神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大衍之數五十 其用四十有九 分而爲二以象兩 掛一以象三 揲之以四以象四時 歸奇於扐以象閏 五歲再閏 故再扐而後掛

 

대연의 수는 50(55)이지만 사용하는 것은 49이다. (49) 둘로 나누어서 하늘과 땅 양의(兩儀)를 상징한다. 한 손에서 1개를 떼내어 따로 가짐으로써 하늘, , 인간 3(三才)를 상징한다. 나머지 시초를 4개씩 덜어내니 이는 4계절을 상징한다. 4개씩 덜어낸 나머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다음 두 손의 나머지를 내려놓음으로써 윤달을 상징한다. 윤달이 대개 5년에 두 차례 있으므로 그 이치를 상징하여 나머지를 두 번 손가락 사이에 끼운다.

 

󰡔주역󰡕의 점치는 법은 하늘수와 땅수에서 시작한다. 이른바 대연의 수는 1에서 10까지의 열개의 하늘수와 땅수의 총합이다. 계사전大衍之數五十은 사실 五十有五이어야 한다. 옛날 책에서 有五두 글자를 빼먹은 것을 후세의 사람들이 살피지 않고 마침내 여러가지 해석을 지어냈다.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의 해석은 기기묘묘하고 모두 틀렸다. 주희의 해석도 틀렸다. 총괄하자면 역대의 인물들은 모두 오십으로 해석하였다. 실제로는 五十이 아니라 五十有五이다. 󰡔역위󰡕(易緯) 건착도(乾鑿圖)에서 이미 五十有五를 말하였다. ‘大衍之數 五十有五 其用四十有九인데 점치는 때 49개의 시초(蓍草)를 쓰면서 55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는 과거의 경방(京房), 마융(馬融), 순상(荀爽), 정현(鄭玄), 요신(姚信), 동우(董遇), 왕필(王弼) 모두가 이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다. 주희는 모두 이치의 필연적 추세에 의해 나온 것으로 인간의 지식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으나 이것도 옳지 않다. 점치는 법에서 49개의 시초를 사용하면서 55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본래 오묘한 것이 아니다. 대연의 수는 55이며 자연수이지만 점치는 법은 인위적이다. 49개의 시초를 사용하는 것은 49개로 4단계의 3반복(四營三易)을 거쳐야 7, 8, 9, 6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7, 8, 9, 6을 얻어야 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55개의 시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55개로 4단계의 3반복을 거쳐도 7, 8, 9, 6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없고, 7, 8, 9, 6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없으면 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시() 또는 책()이라는 것은 하나의 산가지(籌碼)에 불과하다. , (), (), 책은 같은 것으로 고대의 계산도구이다. 점칠 때 시초 대신 젓가락, 성냥개피, 막대기를 사용해도 된다.

分而爲二以象兩’. 점치는 법은 네 단계로 나뉜다. ‘分而爲二는 첫번째 단계이다. 49개의 시초를 손가는 대로 한번 나누어 두 부분이 되게 하면 양 손에 나누어진 것이 몇 개인지가 일정하지 않다. 맨 나중에 7, 8, 9, 6이라는 4개의 숫자 중 어떤 하나의 수가 손가는대로 나눈 것에서 얻어진다. 이것은 곧 얻어진 음효 또는 양효가 손가는대로 한번 나눈 때에 이미 결정되었음을 말한다. ‘以象兩49개의 시초가 나뉘기 전은 하나의 통일체이고 통일체의 일()이며 그것은 대일(大一), 대극(大極)을 상징한다. 옛날 사람들이 말한 50에서 49를 뺀 1이 대일, 대극을 상징한다는 말은 틀린다. 50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이미 틀린다. 왜냐하면 대연의 수는 55이지 50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는 50에서 49를 뺀 나머지 사용하지 않는 1은 대일, 대극을 상징한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왜냐하면 사용하는 것(49)만이 상이 있고 사용하지 않는 것(6이지 1이 아니다)은 상이 없다. 사용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연구할 필요가 없으며 49를 사용하여야만 49가 상이 있기 때문이다. 점치는 법 가운데 49가 나뉘지 않았을 때 그것은 하나의 통일체로 대일, 즉 대극을 상징한다. 󰡔주역󰡕은 상으로 사상을 표현전달한다. 괘에 상이 있고 서()에도 상이 있다는 것은 󰡔주역󰡕의 기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옛날 사람들은 점치는 법의 각 단계에 의미가 있다고 보았으며 특정한 이치를 대표한다고 보았다. 옛날 사람이 어째서 점치는 법의 어떤 매듭이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말해야만 했는가? 그것은 점치는 법의 신비성을 강조하여 영험한 것임을 믿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학적이 아님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점이 점치는 일을 막기 때문에 우리는 괘를 따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들이 연구하여야 할 것은 거기에서 언급하는 이 반영하는 사상이다. 옛날 사람은 分而爲二에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象兩이라고 생각하였다. ‘象兩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니 하늘과 땅은 대일, 대극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양의(兩儀)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分而爲二할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은 대일, 대극이 나뉘어 둘이 된 양의이다. 하늘과 땅은 가장 큰 分而爲二이며 양의이다. 양의는 사실 대립의 통일이다.

掛一以象三은 점치는 두번째 단계이다. 나뉘어 둘로 된 시초 안에서 한 개를 가져다가 한 구석에 놓으면 49개의 시초가 세 부분으로 된다. 앞서 갈라놓은 두 부분의 시초는 하늘과 땅의 양의를 상징하고 새로 뽑아낸 한 개는 하늘과 땅 사이에 탄생한 인간이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존재하면서 실천한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옛날 사람들이 이 때 벌써 인간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여 인간이 하늘이나 땅처럼 중요하다고 보았음을 설명한다. 옛날 사람의 개념으로는 이른바 하늘과 땅(天地)은 자연계를 가리키고, 인간()은 인류사회를 가리킨다.

之以四以象四時에서 설은 동사로 숫자를 센다는 의미이다. ‘之以四4개 씩 세는 것이다. 앞의 모두 49개인 시초는 分二而爲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掛一은 한 쪽에서 1개를 끄집어 낸 것이니 두 부분에는 아직 48개가 남는다. 이미 두 단계가 끝났고 지금 진행되는 것은 세번째 단계이다. 4개씩 센다는 것은 실제로는 양 쪽 손의 시초를 4개씩 덜어 낸다는 것이다. 모두 48개이므로 한 손의 시초를 4개씩 덜어낸 나머지가 1이라면 다른 손의 나머지는 3이다. 만약 나머지가 2라면 다른 손의 나머지는 2이다. 만약 한 쪽 손에 나머지가 없다면 다른 손에도 나머지가 없어야 한다. 나머지가 없을 때는 나머지를 4로 본다. 총괄하자면 각 손에서 4개씩 덜어낸 나머지 숫자는 1, 2, 3, 4를 벗어날 수 없으며, 두 손의 나머지의 합은 4가 아니면 8이다. ‘以象四時의 사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다. 점치는 법에서 4개씩 덜어가는 것은 본래 4계절과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옛날 사람들이 4계절과 연관지으려한 것은 점치는 법의 각 단계에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 사람들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말하는 之以四14계절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바로 이 점이 대단한 일이다. 옛날 사람들이 그 당시 이미 자연계 4계절 변화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게다가 앞 뒤의 글에서 언급한 윤달에 관한 생각은 󰡔주역󰡕을 지은이가 이미 역법(曆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역법과 점치는 법[筮法]은 관련이 있으며 역법이 없었더라면 점치는 법이 생길 수 없었다. 인간들이 하늘 즉 자연계의 법칙을 역법을 통해서 비로소 인식하였다. 󰡔서경(書經)󰡕 「요전(堯傳)에서 하늘을 공경하고 해, , 별을 역으로 하며 상으로 한다.(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고 하여 역법을 말한다. ‘은 수를 헤아린다는 것이고, ‘28(二十八宿)의 항성이며, ‘은 해와 달이 서로 만나는 것이다. 이 말은 요 임금 때 사람들이 이미 하늘을 관찰하고 역서(曆書)를 배포할 수준이었음을 증명한다. 요 임금 이전의 역법은 화력(火曆)이다. 화는 대화(大火)로 심수(心宿)의 두 번째 별이다. 뒤에 발전하여 태양력이 된다. 이전에는 하늘에 대한 관념이 없었고 요 임금 때에 이르러서야 있게 된다. 인간들은 , , 별을 역으로 하며 상으로 하여 공경스럽게 인간이 행동하기에 알맞은 때를 주어라(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는 것을 터득한 다음에 하늘과 자연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계사전의 점치는 법에서 4계절을 말하고 윤달을 말한 것은 당시 역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역󰡕이 자연계를 주관세계 밖에 독립한 객체로 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역󰡕의 세계관은 유물론적이다.

歸奇於以象閏 五歲再閏 故再而後掛는 점치는 법의 맨 끝 단계이다. ()는 매번 네개 씩을 덜어낸 나머지 수이다. 륵도 나머지라는 뜻이다. ‘歸奇於은 네개 씩 덜어내고 남은 수를 손가락에 끼운()’ 다음 한 구석으로 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매우 간단한 일이지만 옛날 사람들은 이런 조작법을 역법에서 윤달을 두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연결시켜 歸奇於을 윤달을 두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였다. 이어서 다른 한 손의 시초를 네개 씩 덜어낸 나머지를 손가락에 끼운 다음, 앞에서 네개 씩 덜어낸 나머지와 함께 내려놓는다. ‘은 두 덩어리의 나머지이다. 두 손의 시초는 각각 네개 씩을 덜어낸 다음 나머지를 갖는다. 두 덩어리의 나머지이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再閏이라고 부른다. ‘而後掛하고 나서 한번 바뀜(一易)이 완성되었음을 아뢰는 것이다. ‘再閏은 두 손의 나머지 시초를 한 군데 모으는 것으로 매우 간단한 일이지만, 옛날 사람들은 五歲再閏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5년에 윤달을 두번 넣는 것을 五歲再閏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고대 역법에 실제로 있었다. 이와같이 둘로 나누고(分二), 하나를 끄집어 내고(掛一), 네개 씩 덜어내고(), 두 손의 나머지를 내려놓는(歸奇) 네 단계를 거쳐야 한바퀴 돈 것으로 간주하고 1(一易)이라 부른다. 이어서 같은 방법으로 두 차례 더 돌려야 하니, 합쳐서 ‘3하여야 한 효를 얻을 수 있다.

점치는 직접적인 목적은 효()를 얻어내는 것이고, 효를 얻어내는 실질적 의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음효인지 양효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점쳐서 직접적으로 양효 혹은 음효의 음양부호를 얻어낼 수 없다. 점쳐서 우선 숫자를 얻어내야 하는데 숫자는 네가지의 가능성, 7, 8, 9, 6이 있다. 7, 8, 9, 6 4개의 수는 두개의 양수와 두개의 음수이고, 점을 칠 때 매번 3바퀴 돌리면 반드시 7, 8, 9, 6 4개의 수 가운데 하나의 수를 얻는다. 이 수는 7 또는 8 또는 9 또는 6으로 일정하지 않다. 7은 소양(少陽)이라 하고, 8은 소음(少陰)이라 하고, 9는 노양(老陽)이라 하고, 6은 노음(老陰)이라 한다. 7 또는 9를 얻으면 양효(陽爻)를 긋고, 8 또는 6을 얻으면 음효(陰爻)를 긋는다. 왜냐하면 7, 9는 홀수이고 홀수는 양수이며, 8, 6은 짝수이고 짝수는 음수이기 때문이다.

점칠 때 매번 3바퀴 돌린 다음 어떻게 7 또는 8, 9, 6이란 수 가운데 하나의 수를 얻어내는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얻어진다. 48개의 시초에서 3바퀴 돌고 남은 수의 합을 빼고 4로 나눈다. 그리하여 얻어지는 수는 7, 8, 9, 6 가운데 한 수이다. 48이란 수도 일정하고 4란 수도 일정하다. 확정되지 않은 수는 3바퀴 돌린 나머지 수의 합이다. 3바퀴 돌린 나머지 수의 합은 네가지 가능성, 24, 12, 16, 20이 있다. 48에서 24를 빼고 4로 나누면 6을 얻는데 이것은 음효이다. 48에서 12를 빼고 4로 나누면 9를 얻는데 이것은 양효이다. 48에서 16을 빼고 4로 나누면 8을 얻는데 이것은 음효이다. 48에서 20을 빼고 4로 나누면 7을 얻는데 이것은 양효이다. 그렇다면 24, 12, 16, 20이란 수가 어떻게 얻어지는가? 그것들은 3바퀴 돌리고 남은 수의 합이다. 한바퀴 돌릴 때 마다 49개의 시초는 손가는대로 두 부분으로 나뉘고 掛一1개를 뽑아내어 48개가 된다. 48개가 두 부분으로 나뉘고 각 부분이 之以四’, 4로 나눈 나머지가 얼마이겠는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각 부분의 나머지는 1, 2, 3, 4의 네 종류가 가능하다(딱 떨어지면 4로 간주한다). 만약 한 곳의 나머지가 4이면 다른 한 곳의 나머지도 4이고 4+48이다. 만약 한 곳의 나머지가 1이면 다른 한 곳의 나머지는 3이고 1+34이다. 만약 한 곳의 나머지가 2이면 다른 곳의 나머지는 2이고 2+24이다. 만약 한 곳의 나머지가 3이면 다른 곳의 나머지가 1이고 3+14이다. 이것은 한바퀴 돌린 나머지가 8이 아니면 4이지 다른 어떤 수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두바퀴째 돌린다. 두바퀴째와 첫번째가 다른 것은 첫번째에는 49개의 시초를 사용하였지만, 두번째에는 첫번째 이미 4개 혹은 8개의 시초를 덜어내 놓았기 때문에 40개이거나 44개의 시초가 남았다는 것이다. 두번째의 방식도 첫번째 방식과 마찬가지로 둘로 나누고, 하나를 덜고, 넷 씩 덜어내고, 남은 수를 뽑아내는 네 단계이다. 두번째 바퀴의 나머지는 오른 손이 1이면 왼손은 반드시 2이고, 왼손이 1이면 오른손이 반드시 2이고, 오른손이 3이면 왼손은 반드시 4이고 왼손이 4이면 오른손은 반드시 3이다. 빼놓았던 1개를 보태면(첫번째에는 掛一하였던 한 개를 보태지 않는다) 나머지가 4아니면 8이다. 이어서 세바퀴째를 돌린다. 세바퀴째와 두번째가 다른 것은 시작할 때의 시초가 40, 36 혹은 32개이지 44개일 수 없다는 것이다. 49개는 더욱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앞의 두번의 돌림에서 이미 나머지 8+8=16, 8+4=12개 혹은 4+4=8개를 덜어냈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두번째와 방식이 같고 나머지는 4아니면 8이다. 3바퀴 돌린 나머지의 합은 4가지만 가능하다. 3개의 8, 3개의 4, 2개의 81개의 4, 2개의 41개의 8로 각각 24, 12, 20, 16이다. 48에서 24를 빼면 24가 되고, 48에서 12를 빼면 36이 되고, 48에서 20을 빼면 28이 되고, 48에서 16을 빼면 32가 된다. 24, 36, 28, 32를 각각 4로 나누면 8, 6, 9, 7을 얻는다. 만약 8이나 6을 얻으면 음효를 긋고, 97을 얻으면 양효를 긋는다. 3바퀴를 돌려야 1효를 얻을 수 있고, 1괘는 6효이므로 18바퀴를 돌려 1괘를 완성한다.

 

乾之策二百一十有六 坤之策百四十有四 凡三百有六十 當期之日

 

건의 책수는 216이고 곤의 책수는 144이니 360은 한 해의 날 수에 해당된다.

 

산가지[]은 곧 시()이다. 산가지 하나는 시초[蓍草] 한 개이다. 󰡔주역󰡕의 양효는 모두 노양(老陽) 9이고, 음효는 노음(老陰) 6이다. 건괘는 6개의 양효로 각 노양의 가른 산가지 수(策數)36이다. 여섯 개의 노양은 모두 36×6=216개의 시초를 갖는다. 곤괘의 여섯 음효에서 각 노음의 가른 산가지 수는 24이다. 여섯 노음은 24×6=144개의 시초를 갖는다. 건과 곤 두 괘의 산가지 수를 더하면 360이다. 360은 바로 당시 역법으로 한 해의 날수[日數]이다. 기는 해[]과 같으므로 當期之日은 한 해의 날수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또 점치는 법과 역법이 관련을 맺는데, 이 의미는 위에서 이미 말하였다.

 

二篇之策萬有一千五百二十 當萬物之數也

 

󰡔주역󰡕 상하 2경의 산가지 수는 11,520으로 만물의 수에 해당한다.

 

二篇󰡔주역󰡕의 상경과 하경을 가리킨다. 󰡔주역󰡕의 전체인 64괘는 384효이고 양효와 음효가 각각 192개이다. 양은 노양이고 음은 노음이다. 따라서 19236을 곱하여 6,912 산가지를 얻고 19224를 곱하여 4,608산가지를 얻는다. 6,9124,608을 더하면 11,520산가지를 얻는데, 이는 대략 만물의 수에 해당한다. 이것은 萬物이 건괘와 곤괘가 변화하고 발전한 결과임을 나타내 준다. ‘萬物‘10,000[]’자는 개략적인 것이지 사실을 정확하게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10,000이 가득찬 수라는 의미에서 취한 것이다. 10과 상대하여 비교하면, 10은 작은 채움[小盈]이고 10,000은 큰 채움[大盈]이다.

 

是故四營而成易 十有八變而成卦 八卦而小成 引而伸之 觸類而長之 天下之能事畢矣

 

이런 까닭에 서죽(筮竹)4번 경영하여 1변을 이루고 18변하여 괘를 이룬다. 8괘는 소성괘이다. 8괘를 끌어와 중첩시키고 동류와 합쳐 키우면 세상의 가능한 일을 남기지 않는다.

 

영은 경영(經營)과 같다. ‘四營은 위에서 말한 分二’, ‘掛一’, ‘’, ‘歸奇등의 4단계이다. 4단계가 갖추어지면 1역이 된다. 1역은 곧 1변이다. 3변이 1효가 되고 18변이 1괘가 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점치는 법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다. 이하의 글들은 8괘가 어떻게 64괘로 변하는가를 말한다. ‘八卦而小成의 소성은 세계의 모든 사물을 포괄하지 못한다. 8괘는 여덟가지 성질을 대표하여 여덟 측면에서 세계를 반영할 수 있지만 더욱 복잡하고 넓은 차원에서 세계의 복잡성을 반영할 수는 없다. 더구나 세계의 운동과 변화를 반영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8괘는 64괘로 변한다. 8괘가 어떻게 변하여 64괘가 되는가에 대해 송나라 학자들은 한 배를 더하여 두 배가 되는 방식으로 변한다고 생각하였다. 8괘에 한 배를 더하여 16괘가 되고, 16괘에 한 배를 더하여 32괘가 되고, 32괘에 한 배를 더하여 64괘가 된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틀렸다. 여기에서 말한 引而伸之계사전 하引而重之는 같은 의미이니 8괘의 각 괘의 위에 8괘를 포개어 64괘를 이룬다. ‘觸類而長之와 위의 引而伸之는 당연히 같은 단계이며 의미가 같다. 그러나 引而伸之64괘의 형성을 말한 것이고 觸類而長之384효의 전개를 말한 것이다. 64384효가 있으면 세상의 모든 일을 완전히 포괄할 수 있다.

 

顯道神德行 是故可與酬可與祐神矣

 

세상의 법칙을 드러내고 덕행을 신비롭게 제시해준다. 그러므로 서로 호응하고 신을 찬미하고 도울 수 있다.

 

위의 글에서는 네 단계의 조작으로 한번 바뀜(一易)을 이룸으로써 천하의 능숙한 일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64괘의 생성과 󰡔주역󰡕의 완성으로 세상의 도가 여기에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다. 여기의 세 문장은 󰡔주역󰡕의 효용성을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한다. ()은 동사이고 신()도 동사이다. 현은 감추어진 것으로부터 드러남이니 은미한 것이 드러나서 쉽게 눈에 뜨이게 하는 것이다. ‘이란 글자는 󰡔주역󰡕에서 본래 음양을 헤아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음인지 양인지 미리 알 수 없어 하나로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작()은 고대의 주법에 쓰이던 말이다. 술마실 때 주인이 먼저 손에게 술을 권한 다음 손이 주인에게 술을 권하고[] 맨 나중에 주인이 술을 권한다[]. 그러므로 수작은 응대한다는 의미이다. ()는 찬미하고 돕는 것이다. 도는 󰡔주역󰡕에서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음양의 변화를 가리키며,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자연계와 인류사회의 객관법칙에 해당한다. ‘顯道에서 도는 모든 사태와 물건 가운데 숨겨져 법칙이 쉽게 드러나지 않아 볼 수 없지만 󰡔주역󰡕은 그 자체의 음양변화를 충분히 이용하여 객관법칙을 드러낼 수 있다. 덕행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 인간의 수양과 행위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방향을 결정할 수 없지만, 󰡔주역󰡕神德行할 수 있어서 점친 숫자의 불확정한 변화를 통해 인간들에게 무엇은 해야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행복을 얻고 어떻게 하면 재앙에 이르는가를 지시하여 준다. 󰡔주역󰡕에 이런 묘한 작용이 있기 때문에 인류가 안고 있는 어떤 문제에도 대답하며 심지어는 대자연의 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작용에도 도움을 준다.

 

子曰 知變化之道者 其知神之所爲乎

 

공자가 말하기를 음양변화의 법칙을 아는 자는 신의 조화를 알 것이다고 하였다.

 

子曰은 제자가 공자의 말을 적은 것임을 나타낸다. 앞에서 말한 적이 있지만 역대전의 사상은 공자에서 유래하여 역대전은 공자가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자가 모두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공자보다 앞선 시대의 설을 이어받고 어떤 것은 후대에 슬며시 끼어 넣은 것이고 어떤 것은 공자의 말을 제자가 기록한 것이다. ‘子曰이라고 밝히는 것은 분명히 뒤에 일어난 상황이다. 이 두 구절은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는 제9장에 집어넣고 󰡔사부총간본주역(四部總刊本周易)󰡕에서는 제10장에 넣었다. 내가 보기에는 주희가 9장에 집어넣은 것이 맞다. 이 두 귀절의 공자의 말은 우리들이 󰡔주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變化之道知神之所爲를 같은 일로 본 것이고 명확하게 신이 곧 변화의 도임을 말한 것이다. 일반인은 󰡔주역󰡕에서 말하는 신이 의지를 가진 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주역󰡕은 변화를 설명하는 책이며, 거기에서 사용된 3개의 중요한 개념인 역(), (), ()은 변화를 말한다. 예컨대 역의 경우 生生之謂易는 바로 역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도의 경우 一陰一陽之謂道는 바로 음과 양이 끊임없이 변화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도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변화의 법칙이다. 예컨대 신의 경우 陰陽不測之謂神의 신은 점칠 때의 변화의 방향이 양인지 음인지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신과 도의 관계는 만약 도가 변화의 법칙이고 법칙이 필연성이라면 신은 바로 필연성이 우연성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주역󰡕 중의 변화의 도는 모두 을 통해 표현된다. ‘神之所爲는 변화의 도를 표현한다.

 

 

10

易有聖人之道四焉 以言者尙其辭 以動者尙其變 以制器者尙其象 以卜筮者尙其占

 

󰡔주역󰡕에 성인이 취하는 방법이 네가지 있다. 말로써 하는 사람은 괘사와 효사를 숭상하고, 행위로써 하는 사람은 변화의 법칙을 중시하고, 문물제도로써 하는 사람은 상을 중시하고, 점치는 것으로써 하는 사람은 점을 중시한다.

 

여기에서 易有聖人之道四焉者 此之謂也까지가 제10장이다. 이 장에서도 역의 효용성을 말한다. 이 글과 아랫 글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으니 빠지거나 중복된 것[錯簡]이 있는 듯하다. ‘易有聖人之道四焉聖人之道는 사실상 󰡔주역󰡕의 도이다. 󰡔주역󰡕의 도 넷은 아랫 글에서 말하는 사(), (), (), ()이다. 󰡔주역󰡕의 이 네 측면의 내용은 서로 연결되어 나누기 어렵다. 그 가운데 사와 점, 변과 상은 한 부류에 속하지만 그것들은 종국적으로는 독자적인 특징을 갖는다. 사 곧 괘사와 효사는 언어로 표현된다. 상은 󰡔주역󰡕에서 사상을 표현하는 기본수단으로 상이 없다면 󰡔주역󰡕도 없다. 상은 괘획, , 위 등으로 표현되지만 사 안에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변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窮則變 變則通)”에서의 변이다. 변은 주로 효안에서 드러나고 괘 안에서도 드러난다. 변은 본래 형체가 없으므로 상에 의존하여 모습을 비춘다. 점 곧 길흉, 회린, 무구는 인간의 미래 행동방향을 지시해준다. 점이 어떤 때는 길흉, 회린, 무구를 직접적이고도 명확하게 말해 주지만, 어떤 때는 말해 주지 않고 괘사와 효사 안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주역󰡕을 사용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존하여야 한다. 󰡔주역󰡕을 배우고 󰡔주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요구와 취미가 다르기 때문에 󰡔주역󰡕의 네 측면의 내용도 편중되거나 필요에 의해 취사선택될 수 있다.

以言者尙其辭󰡔주역󰡕으로 언어를 풍부하게 한 사람이면 󰡔주역󰡕의 괘사나 효사를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예컨대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말했던 人而無恒의 문제는 바로 󰡔주역󰡕 ()괘 구삼의 자기의 덕을 항상되게 하지 못하니, 어쩜 부끄러움을 당할 지 모른다.(不恒其德 或承之羞)”라는 효사 한 귀절을 인용하여 그의 말의 타당성을 설명할 수 있다.

以動者尙其變󰡔주역󰡕으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주역󰡕의 변을 선택하고 󰡔주역󰡕의 변을 통해 자신의 변을 조절하여 바름을 얻고 틀리는 경우가 없어야 함을 말한다.

以制器者尙其象이라는 말과 계사전 하새끼를 꼬아서 새그물과 고기 그물을 만들어 사냥하고 고기를 잡는다. 이것은 리()괘에서 취하였다(作結繩以爲罔以佃以漁 蓋取諸離)” 등은 한 사람의 손을 거쳐 나왔음을 의심케 하니 훗날 끼어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분명한 이유는 󰡔주역󰡕의 상은 실제의 사물에서 나온 것이지 실제의 사물이 󰡔주역󰡕의 상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우물[]이 있은 다음에 정()괘가 나온 것이지 정괘가 있어 우물이 생긴 것은 결코 아니다.

以卜筮者尙其占󰡔주역󰡕으로 점쳐서 결정하려는 사람이면 󰡔주역󰡕의 점을 중시하여 자신의 주관적 노력 방향을 알아야 함을 말한다. 󰡔주역󰡕은 서()만을 사용하지 복()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서라는 글자 앞에 복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한 음절을 보태어 보다 완전한 단어를 만들려 하였기 때문이다. 단어의 음절이 완전하지 않을 때 글자를 보태어 보충하는 것은 예전 사람들의 글쓰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예컨대 비로 적신다(潤之以風雨)”風雨에서 비가 적셔주는 것이지 바람이 적셔줄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지만 앞에 자를 보탠 것은 음절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덧붙여진 자는 여기에서 실질적 의미가 없다. 고대 한문의 이러한 특징은 고서를 읽을 때 한 글자, 단어가 모두 실질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케 해준다.

 

是以君子將有爲也 將有行也 問焉而以言 其受命也如嚮 無有遠近幽深 遂知來物 非天下之至精 其孰能與於此

 

그러므로 군자는 장차 무슨 일을 하고 무슨 행위를 하려 할 때에는 점으로 물으면서 말의 형식을 갖추면 점이 제시하는 것이 메아리가 소리에 응답하는 것 같아서 먼 것이나 가까운 것, 그윽한 것이나 심원한 것을 가리지 않고 마침내 미래의 일을 알게 해준다. 천하의 지극히 정묘함이 아니면 어느 것이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是以라고 말한 것은 분명 위의 글과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지만 내용은 위의 글과 이어지지 않으므로 위에서 몇 구절이 빠졌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君子將有爲는 인위적인 행위가 있음을 말하고 流行은 실천이 있음을 말한다. ‘問焉은 점으로 물어서(問筮) 결정하는 것이다. 문서할 때의 말은 관직은 ㅇㅇ이고, 이름은 아무개인 ㅇㅇㅇ가 지금 무슨 일로 점을 치며 길흉, 득실, 회린, 우우를 모르니, 분명히 고해주십시오하는 따위이다. 이 문서 글에서 문서하는 본인이 말하면 이고 점[]이 화답한 말은 이다. ‘其受命也如嚮은 점쳐서 받은 명령이 마치 소리와 메아리처럼 저기에서 입이 떨어지자 마자 여기에서 메아리 치는 것과 같아서, 점으로 묻는 사람에 대한 반응이 매우 신속함을 형용한 것이다. ‘無有遠近幽深 遂知來物은 점친 사람이 제기한 문제가 시간과 공간상으로 먼가 가까운가, 은미한 것인가, 깊이있는 것인가를 따지지 않고 遂知來物’, 즉 회답을 주고 미래의 길흉, 득실을 미리 알게 해준다는 것을 말한다. ‘非天下之至精 其孰能與於此는 역의 도가 자세하다는 것을 힘주어 칭찬한 것이다.

 

參伍以變 錯綜其數 通其變 遂成天地之文 極其數 遂定天下之象 非天下之至變 其孰能與於此

 

이리저리 엇섞어 견줌으로써 변화를 이루고 법칙을 이리저리 뒤섞어 정리한다. 그 변화에 통달하여 세계의 괘와 효를 이루고, 그 법칙을 끝까지 탐구하여 괘와 효의 상을 정한다. 세상의 지극한 변화가 아니면 어느 것이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은 점을 찬미한 것이다. ‘參伍以變 錯綜其數두 귀절의 參伍’, ‘錯綜두 단어는 이해가 쉽지 않으므로 남송의 주희는 이미 삼오와 착종은 모두 옛날 말이다. 삼오가 더 알기 어렵다(參伍錯綜皆古語 以參伍尤難曉)”고 하였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이 參伍를 사용하던 상황을 살펴보면 그것의 함의를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순자󰡕에서는 적을 정탐하고 비밀을 살필 때에는엇섞어서 견주어 보아야 한다(窺敵制變欲伍以參;議兵)”고 하고, 󰡔한비자󰡕에서는 말의 이치, 차이를 살펴서 붕당의 갈래를 알아낸다. 이리저리 견주어보는 시험을 통해 내뱉은 말의 진실성 여부를 가린다(省同異之名[] 以知朋黨之分 偶參伍之險 以責陳言之實;備內)”고 하고, 󰡔사기󰡕에서는 반드시 견주어 본다(必參以伍之)”, “견주어 보는 것을 잃지 않는다(參伍不失)”이라 하였다. 󰡔한서󰡕에서 그 상품을 견주는 데는 유사한 것으로 기준을 정한다(參伍其賈 以類相準)”이라 하였다. 옛날 사람들의 參伍에 대한 이런 용례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參伍란 여러 요소를 연관시키고 서로 참고하여 실제와 부합하는 결론을 얻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參伍以變은 시초를 헤아려서 괘를 구하는 문제라 할만 하다. 시초를 헤아린다는 것은 49개의 시초를 손으로 나누어 7, 8, 9, 6을 구하는 것이다. ‘分二’, ‘掛一’, ‘’, ‘歸奇라는 네 단계로 49개의 시초를 나누는 과정이 參伍以變이다. ‘錯綜其數도 시초를 헤아려 괘를 구하는 문제를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錯綜이란 단어를 두 단어로 이해하고 은 뒤섞임, ‘은 정리함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하나의 단어로 위아래로 왔다갔다 하고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자리바꾸는 매우 복잡한 것을 의미한다. ‘錯綜其數49개의 수가 위 아래, 왼쪽 오른쪽을 바꾸어 시초를 나누고 끝으로 7,8,9,6을 얻는 것을 말한다. 총괄하자면 參伍以變 錯綜其數라는 두 귀절은 시초를 헤아려 괘를 구하는 동일한 일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參伍]는 점에서의 변화를 중시하고 다른 하나[錯綜]는 점에서의 수를 중시하는 것으로 이 둘은 호응하는 문장이다. ‘通其變極其數도 동일한 일로 이미 시초를 헤아려 괘를 구하는 과정을 완료하였음을 말한다. ‘通其變은 괘가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極其數는 시초를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成天地之文은 시초를 헤아려 모든 괘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定天下之象은 시초를 헤아려 모든 상을 확정지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은 괘와 효를 가리키고 은 괘와 효가 얻은 상을 말한다. ‘非天下之至變 其孰能與於此는 앞뒤 문맥으로 보아 至變을 칭찬한 것인데, 사실은 점치는 법을 칭찬하고 역을 칭찬한 것이다.

 

易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

 

󰡔주역󰡕은 사려하는 일이 없고 작위하는 일이 없다. 고요하여서 움직이지 아니하지만 감응하여 드디어 세상이 그렇게 된 일에 통달한다. 천하의 지극한 신묘함이 아니면 어느 것이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위의 글에서 至精이라고 찬미한 것은 점치는 묘용을 말한 것이고, ‘至變이라고 찬미한 것은 점으로부터 괘와 효를 생성하는 과정을 말한 것이다. 총괄하자면 점의 역동성을 말한 것이다. 지금은 정태적인 경우에서 말하여 점이 사용되지 않는 때에는 그곳에 그대로 놓여져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여 사려도 없고 행위도 없는 상태이지만, 일단 점으로 물어서 이용하고 감응시키면 역이 通天下之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역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게 된다. 그러므로 공자가 그것을 至神이라 찬미하였다. 󰡔주역󰡕의 이런 특징은 오늘날 컴퓨터와 매우 유사하다. 컴퓨터도 스위치를 껐을 때에는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고 생각도 없고 작용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일단 인간이 사용하면 通天下之故하여 그것이 저장한 정보를 수시로 당신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컴퓨터를 至神하다고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누구도 컴퓨터가 진실로 그렇게 신령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공자가 당시 󰡔주역󰡕至神이라고 칭찬한 것도 의미가 이와 같다.

 

夫易聖人之所以極深而硏幾也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惟神也 故不疾而速 不行而至

 

그러므로 󰡔주역󰡕은 성인이 심오한 이치를 극진히 탐구하고 조짐을 연구한 것이다. 심오한 것을 탐구하였기 때문에 세상의 이치에 통할 수 있다. 조짐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 작용이 신묘하므로 서두르지 않아도 빠르고 가려하지 않아도 이를 수 있다.

 

위의 글에서는 󰡔주역󰡕至精’, ‘至變’, ‘至神을 말했고 여기에서는 성인이 어떻게 󰡔주역󰡕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가를 말한다. ‘성인󰡔주역󰡕을 어떻게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가? ‘성인󰡔주역󰡕至精을 이용하여 심오한 것을 탐구하고, 󰡔주역󰡕至變을 이용하여 조짐을 연구한다. ()은 사물의 이치가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말하고 기()는 사물의 이치가 미미하여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인󰡔주역󰡕至精을 이용하여서 이치 가운데 헤아리기 어려운 을 끝까지 탐구하고, 󰡔주역󰡕至變을 이용하여 이치 가운데 쉽게 드러나지 않는 기미를 연구한다.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는 윗 글에서 말한 至精을 이은 것으로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여야만 천하의 법칙에 통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는 윗 글에서 말한 至變을 이은 것으로 기미를 연구하여야만 세상의 모든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惟神也 故不疾而速 不行而至도 윗 글을 이은 것이다. 󰡔주역󰡕寂然不動 感而遂通 天下之故에서 말미암았기 때문에 不疾而速 不行而至일 수 있다. 어째서 이런가? 왜냐하면 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의 중간에 서두름()’억지로 가려함()’을 용납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子曰 易有聖人之道四焉者 此之謂也

 

공자가 말한 󰡔주역󰡕에 성인의 도가 네가지 있다함은 이것을 말한다.

 

이 글은 윗 글과 연결되지 않으므로 군더더기 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Posted by 샤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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