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子曰, 乾坤其易之門邪? , 陽物也. , 陰物也. 陰陽合德而剛柔有體, 以體天地之撰, 以通神明之德.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변화)의 문인가?. 건은 양물陽物이다. 은 음물陰物이다. 음과 양이 덕을 합해서 강과 유에 체(모습 )가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하늘과 땅의 일을 체현하고, 그럼으로써 신명의 덕에 통달한다.

 



여기로부터 잃을 것인가 얻을 것인가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준다(以明失得之報)”까지가 제 6장이다. 이 단락은 앞에서 설명한 건곤은 역의 누비옷 (乾坤其<>之縕邪)”, “문을 닫는 것을 곤이라 하고, 문을 여는 것을 건이라 하니 한번 닫고 한번 여는 것을 변화라 하고 가고 오는 것이 무궁한 것을 통이라 한다(闔戶謂之坤, 闢戶謂之乾, 一闔一闢謂之變, 往來不窮謂之通)” “ (乾坤成列, 而立乎其中矣)”와 의미가 비슷한데, 모두 64괘의 뜻이 건괘와 곤괘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고, 64괘는 두 괘의 변화 발전의 결과라고 말한 것이다. 같은 의미의 말을 반복해서 설명한 것으로 보아, 乾坤 󰡔󰡕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작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乾坤其易之門邪는 문을 이용해 건곤과 역의 관계를 비유한 것인데, 매우 합당하다. 역은 문의 체와 같고( ), 건곤은 문의 용과 같으니, 문이 있어도 작용이 없으면, 문도 문이 되지 못하고, 문의 체가 없으면 문의 작용은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다. 문이 열리면 건이고, 문이 닫히면 곤이다. 문이 끊임없이 운동할 때에만 건과 곤이 있는데, 만약 문이 닫히거나 열려 있는 그 상태에서 정지해 운동하지 않으면, 건곤도 보이지 않고, (변화)도 멈춘다. “乾坤其易之門이라는 말을 문의 두 짝 중 한 짝은 건이고 나머지 한 짝은 곤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건곤은 본래 하나이지 둘이 아니며, 한 사물의 두 측면이기 때문이다. 건곤이 문이라고 한 것은 문의 한번 열리고 한번 닫힘이 건곤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문짝이 하나냐 둘이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하나라고 해도 좋고, 둘이라고 해도 좋은데, 한번 열렸다 한번 닫혔다 하는 식으로 운동할 때에만 건곤을 상징하고,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채 그대로 정지해 있으면 건곤을 상징하지 않는다. 또한 乾坤其易之門이라는 말을 은 방이고, 건곤은 문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역과 건곤은 사실상 하나여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곤이 문이라면 역도 또한 문이다. 건곤은 문의 운동변화이고, 역은 운동변화 중의 문이다. 만약 문이 운동변화를 그치면 건곤은 보이지 않고, 역도 보이지 않는다.

, 陽物也; , 陰物也”. 건은 (을 상징하는)이고; 곤은 (을 상징하는)이다. 건곤이 음양이라는 것은 바로 음양이 다함이 없다는 것과 같다. 건곤은 홀획 여섯개로 된 순양純陽과 짝획 여섯개로 된 순음純陰을 가지고 사물의 씩씩하고 온순한 두 성질을 대표하고, 64괘는 그것들로부터 발전변화해 나온다. 건곤을 음양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음양을 건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음양은 건곤에 비해 더 보편적인 의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음양은 사물의 어떤 성질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의 대립통일하는 측면을 대표하니 , 음양은 곧 모순이며, (따라서) 음양은 더 큰 추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음양은 8괘와 64괘 속에 있고, 8괘와 64괘는 음양으로부터 구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

陰陽合德而剛柔有體, 以體天地之撰, 以通神明之德 이라는 이 몇 귀절은 64괘의 산출 및 작용,기능을 설명한다.

64괘의 산출을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陰陽合德而剛柔有體”. 이 귀절 속의 음양은 대체로 건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건원乾元은 만물이 시작되는 바탕이다. 곤원坤元은 만물이 생겨나는 바탕이다. 만물은 곧 64괘이다. 건과 곤이 함께 64괘를 생성한다. 건은 있고 곤이 없을 때나 곤은 있고 건이 없을 때는 모두 64괘를 생성하지 못하고, “음양이 덕을 합할때만 64괘를 생성한다. “음과 양이 덕을 합한다”, 그리하여 강과 유에 체가 있게 된다”. 는 모습이 있어서 본뜰 수 있다. 64괘는 건곤이 덕을 합하는 데서 생겨나서 에 체가 있게 된다는 것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강이 있고 유가 있으니, 강과 유가 뒤섞이게 되고, 64괘가 비로소 마지막으로 생성되어 거기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게끔 배열된다. 환언하면, 64괘의 산출은 음양이 덕을 합친 뒤에 剛柔有體를 거쳐 완성된다.

는 체현한다는 뜻이고, 은 일이라는 뜻이다. “天地之撰이란 하늘과 땅이 만물을 창조한다는 것을 말한다. “以體天地之撰이란 64괘의 생성이 바로 하늘과 땅이 낳은 만물의 체현이라는 것이다.

신명神明은 다른게 아니라 바로 변화의 도를 아는 자는 아마도 신이 하는 바를 알 것이다(출전 )”이다. 신은 변화의 , 다시말해 객관적 법칙이다. “以通神明之德이란 건과 곤,음과 양, 강과 유가 서로 밀고 서로 흔들며( ),한번 하고 한번 하며,왕래함에 끝이 없는 것이 객관 세계의 변화 법칙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其稱名也雜而不越, 於稽其類, 其衰世之意邪!

 

(괘를)부르는 이름이 잡다한 것 같지만 (건곤,강유가 변화하는 범위를)넘지는 않고, 그 류(곧 역사적 내용)를 살펴 보건대, 그것은 아마도 쇠퇴하는 시대를 뜻할 것이다.

 

其稱名也雜而不越은 앞 문장에 바로 이어서 설명해 내려 온 것으로, 64괘의 괘 이름을 준, , , , , , , 등으로 부르는 것이 잡다하고 조리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상 아주 규칙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무슨 명칭으로 부르는가에 상관없이, 그것들은 모두 건곤, 강유가 변화하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於稽其類, 其衰世之意邪에서 는 어조사로 뜻이 없다. 는 살핀다는 뜻이다. 대의는, 64괘가 표현하는 일의 부류 즉, 역사내용을 살펴보면, 역의 괘사,효사가 쇠퇴하는 시대의 작품일 수 있다는 것이다.

 

󰡔󰡕彰往而察來, 而微顯闡幽, 開而當名辨物, 正言斷辭, 則備矣.

 

대저 󰡔󰡕은 지나간 것을 분명히 알고 올 것을 살피며, 은미한 것을 나타내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며, 열어서 해당하는 이름과 구별된 물, 바른 말과 판단된 가 갖추어진다.

 

彰往而察來는 곧 󰡔계사전 상󰡕에서 말한 신묘함으로써 올 것을 알고, 앎으로써 지나간 것을 간직한다”( )는 의미이다. 창왕彰往은 곧 장왕藏往이고,찰래察來는 곧 지래知來이다. 창왕<지나간 것을 분명히 안다> 혹은 장왕<지나간 것을 간직한다>은 괘의 기능이고, 찰래<올 것을 살핀다> 혹은 지래<올 것을 안다>는 시<시초로 점치는 것>의 기능이다. 괘와 시는 󰡔󰡕을 구성하는 양대 측면이고, 창왕과 찰래는 󰡔󰡕의 양대 기능이다.

주희의 말에 따르면, “而微顯闡幽는 마땅히 微顯而闡幽이라고 해야 한다. 미현微顯은 은미한 것을 변화시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천유闡幽는 숨겨진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微顯而闡幽는 뜻이 索隱<심오한 것을 탐구하고 숨겨져 있는 것을 찾는다>”과 비슷하다.

開而當名辯物, 正言斷辭, 則備矣라는 이 두 귀절은 알기가 어렵고, “開而는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더욱 모르겠다. 곽옹郭雍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명當名은 괘이고, 변물辯物은 상이다. 정언正言은 단사彖辭이고, 단사斷辭는 거기에다 길흉을 붙인 것이다.” 곽씨의 설에 의하면, 이 말은 연관連貫해서 이해해야 되는데, 당연히 먼저 괘에 명칭을 붙여 주고 그런 다음 구별 즉,괘 속의 상을 인식하고, 상에 근거해서 거기에 괘사를 붙이며, 괘사 속에 길흉의 내용을 포괄하여 판단한다.

 

其稱名也小, 其取類也大. 其旨遠, 其辭文, 其言曲而中, 其事肆而隱, 因貳以濟民行, 以明失得之報.

 

칭하는 이름은 작지만, 받아들이는 류(의 범위)는 크다. 그 의미는 심오하고 말은 세련되다. 그 말은 우회적이지만 (사리에) 맞고, 그 일은 진열되어 있으나 (함의는)숨겨져 있으니, (길흉,득실이) 정해져 있지 않은 각각의 일에 따라 백성의 행동을 지도하고, 잃을 것인가 얻을 것인가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준다.

 

其稱名也小, 其取類也大64괘는 , 괘 등과 같이 괘명이 포함하는 뜻은 아주 작고 구체적이지만, 그것들 각자가 받아들이는 무리는 오히려 아주 커서 각각의 모든 괘들은 한 무리의 사물, 일정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자연계와 인간 사회, 하늘의 도와 백성의 일, 일체사물의 변화발전 및 그 법칙은 모두 64괘 속에 포함되어 있고, 각 괘가 포괄하는 내용은 아주 넓다. 간단히 말하면, 부르는 이름은 작으나 받아들이는 류는 크다고 하는 것은 괘의 이름이 아주 구체적이어서 보기에 포괄하는 범위가 아주 작은 것 같지만, 괘가 반영하는 사상내용은 오히려 포괄하는 범위가 아주 크고, 비교적 큰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其旨遠, 其辭文64괘의 괘사에 지원旨遠, 사문辭文의 특징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원은 괘가 반영하는 사물의 의미가 심원하여 깊이 깨닫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사문은 괘가 사용하는 언어에 문채가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음미하게 함이 끝이 없음을 말한다.

其言曲而中, 其事肆而隱은 지원,사문이라는 두 말의 뜻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其言曲而中사문을 푼 것이다. 다만 말이 세련되다는 것은, 그 때문에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사리에 딱 들어 맞는다.

其事肆而隱지원을 푼 것이다. 󰡔󰡕 속에서 드는 사실이 겉으로는 진열되 있어서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인 듯하나 함의는 오히려 숨어 있어서 헤아리기 어렵다. 󰡔󰡕이 이런 특징을 갖추고 있는 이유는, 설명한 바 있듯이, 그것의 기원이 점치는 책이라는 데 있다.

는 의심한다는 뜻이니 길흉과 득실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因貳以濟民行이란 곧 길흉,득실을 통하여 인간의 행동을 지도한다는 것이다.

以明失得之報는 위 구절을 이어서 설명한 것으로, 사람은 노력을 통하여 성공할 수 있는데, 괘사는 이를 길로써 알려 준다는 것이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실패할 수도 있는데, 괘사는 이를 흉으로써 알려 준다. 󰡔󰡕은 길흉으로써 사람의 득실을 알려 준다.

 

7

󰡔󰡕之興也, 其於中古乎? 󰡔󰡕者其有憂患乎?

 

󰡔󰡕이 만들어진 것은 중고시대中古時代인가? 󰡔󰡕을 지은 자에게는 우환이 있었는가?

 

여기로부터 井以辨義, 巽以行權까지가 제 7장이다. 󰡔󰡕은 곧 󰡔周易󰡕이니 절대로 󰡔연산連山󰡕󰡔귀장歸藏󰡕( )이 아니다. 이 두 구절의 의문투로 보아 󰡔주역󰡕을 붙인 공자가 비록 춘추시대말에 살았으면서도 󰡔주역󰡕이 책으로 성립한 시대를 확실하게 가리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주역󰡕이 중고시대에 만들어 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고시대란 어느 시대인가? 공자가 춘추말에 중고라고 설명했으니, 중고는 분명히 은주殷周교체기일 것이다. (이것에 대해) 공자가 드는 근거는, 󰡔주역󰡕의 괘사와 효사에 일종의 분명한 우환이 들어 있고, 󰡔주역󰡕의 작자는 아마도 그러한 우환을 가진 사람일 것이라는 것이다.그 사람이 은의 주왕紂王과 싸움을 일으킨 문왕일 수 있으나, 공자는 아주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다만 시대를 지적하고 작자가 꼭 누구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是故履, 德之基也. , 德之柄也. , 德之本也. , 德之固也. , 德之修也. , 德之裕也. , 德之辨也. , 德之地也. , 德之制也. 履和而至, 謙尊而光, 復小而辨於物, 恒雜而不厭, 損先難而后易, 益長裕而不設, 因窮而通, 井居其所而遷, 巽稱而隱.

 

그래서 이는 덕의 기초이고, 은 덕의 손잡이이다. 은 덕의 근본이고, 은 덕의 견고함이다. 은 덕을 닦는 방법이고, 은 덕의 여유로움이다. 은 덕의 구별기준이고, 은 덕의 터밭이며, 은 덕을 제정하는 방법이다. 〔=는 조화로우면서도 지극하게 하고, 하면 높여지고 빛나게 된다. 은 작은 것을 닦아서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까지 파급해 가는 것이고, 은 순차적으로 되풀이해도 싫증내지 않는 것이다. 은 어려운 것을 먼저 하고 쉬운 것을 뒤에 하는 것이고, (덕의 증진으로 인해) 오래동안 여유로와도 꾸미지 않는 것이다. (육신으로는) 곤궁하나 (마음으로는) 형통하다는 것이고, 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옮겨다니는 것이다. 은 알맞음을 얻어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윗글에서 󰡔󰡕을 지은자에게는 우환이 있었는가?”라고 말했는데, 무엇때문에 󰡔󰡕을 지은자에게 우환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을까? 여기서는 어떻게 자신을 돌이켜 보고 수양하는지를 우환에 대처하는 , , , , , , , , 등 아홉 괘를 예증으로 삼아 설명하였다. 64괘 중에는 자신을 돌이켜 보고 수양하여 우환에 대처하는 것을 반영하는 괘가 이 아홉개만이 아닌데 왜 더도 덜도 아닌 꼭 아홉 괘를 들먹일까? 이는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연히 선탯되었을 뿐이다. 󰡔주역󰡕은 변통을 설명하는 책이어서 곳곳이 모두 핵심일 수는 없으므로 그것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굳이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 德之基也는 덕을 닦는 첫째 요점이 실천 즉 실제행위의 공부에 있다는 뜻이다.

, 德之柄也는 덕을 닦는 관건이 겸손하게 사양하는 것이니, 만약 환난에 처하여 교만하게도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뽐내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것이다.

, 德之本也는 덕의 근본이 끊임없이 외물의 영향을 떨쳐버리는 데 있으니 스스로 내 고유의 선한 본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 德之固也는 덕을 닦을 때는 반드시 항상되고 변하지 않는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끝나면 시작이 있으므로 왜 절대로 동요하지 않아야 하는지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항괘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 德之修也는 덕을 닦을 때는 덕에 유해한 것을 날로 덜어 내야 하고, 따라서 덕에 유익한 것으로 날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 德之裕也는 그 덕을 날로 증진해서 여유있게 한다는 것이다.

, 德之辨也는 날씨가 추워진 후에 송백이 늦게 시듦을 아는 것처럼 환란에 임하고 곤경에 처해 보면 덕의 깊고 얕음을 저절로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 德之地也는 우물의 특징이 사람을 양육하고 다른 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므로 입장을 정하여 고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덕을 함양하는 것은 마땅히 이래야 하는 것이니, 덕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은 자기의 덕성을 보존해서 고치지 않을 수 있어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 德之制也는 손의 뜻이 따르고 들어가서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니, 군자는 일을 도모할 때 권도를 행하여 고집하려고 하지 않고, 반드시 마음을 그 속에 깊이 쏟아서 자세히 헤아려 보아 때에 따라 마땅함을 제정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행을 쫓아 부정不正에 영합하지 않는다.

이하는 아홉 괘의 의미를 다시 분석한 것이다. “履和而至에서 이는 예이고, 예는 조화를 중시하며, 조화는 중에 들어 맞는 것이다. “는 중에 이르는 것이니 중에 못미치거나 중을 지나치면 가 아니다. “和而至에서 는 당연히 꼭 알맞은 것이니, 못미치거나 지나치는 것 모두 안된다.

謙尊而光은 사람이 겸허할 수 있으면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감추니, 자신을 낮추면 다른 사람들은 도리어 그를 높여 주고, 자신을 감추면 덕은 오히려 더 빛나게 된다는 것이다.

復小而辨于物에서 작다는 것은, 천하와 국가에 비해 일신은 작으므로, 일신을 의미한다. 은 편편-한자 으로 읽는데, 옛 글자에서 변과 편은 통한다. 복괘의 초구初九 소상小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멀지 않은 으로 몸을 닦는다.” 여기서 말하는 小而辨于物은 아마도 먼저 일신이라는 작은 것을 수양한 후에 齊家治國平天下라는 큰 것에 두루 미쳐 간다는 뜻일 것이다.

恒雜而不厭에서 은 마땅히 잡잡-한자 으로 읽어야 하는데 잡은 주의 뜻이다.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경과하는 것을 주라고 한다. 괘의 뜻은 마침과 시작이 순차적으로 되풀이하여 그침이 없다는 것일 뿐이므로 雜而不厭(순차적으로 되풀이해도 싫증내지 않는다. )”이라 한 것이다. 항괘 彖傳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利有攸往, 終則有始也”(해석 c.f-p242). 같은 뜻이다. 일이 이미 끝에 이르러 설사 한 바퀴 돌았다 해도 끝나면 또 시작되니, 어찌 순차적으로 되풀이해도 싫증냄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損先難而后易에서 손은 노여움을 누르고 욕심을 막아서 감정에 반하는 것이니, 의 처음에 나에게는 반드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있고, 남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 있으므로 어려운 것을 먼저 행한다. 더는날이 오래 가면 사리가 순해지고 사람의 마음도 순해지므로 후에는 쉬워진다.

益長裕而不設에서 설은 사람이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사람이 자기를 이익되게 하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 人君이 천하국가를 이익되게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물을 이익되게 하는 것과 같다. 귀중함은 성정誠正의 자연스러움에 있지, 꾸미고 조작하는 것에 있지 않다.

困窮而通은 군자가 곤경에 처할 때 육신으로는 괴로워도 마음()으로는 괴롭지 않다는 것이다. 곤괘 단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위험에 처해도 기뻐할 수 있으니, 곤경에 처해도 형통한 바를 잃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일 것이다.( ) p331, p529 ” 군자는 곤경에 처해도 기뻐할 수 있고,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井居其所而遷은 마을을 바꾸어도 우물을 바꾸지는 않으니, 우물은 그 자리에 있게 되고 따라서 우물은 자기를 보존한다. (사람들이) 우물에 왔다 갔다 하므로 이는 반대로 우물이 옮겨서 사람에게 미치는 것일 수 있으니,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한다. 보통의 경우, 무릇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자신에게는 잃음이 있고, 자신을 위하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데, 오직 우물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미칠 수 있고 자신을 보존할 수도 있어서 물과 내가 모두 보존된다.

巽稱而隱에서 칭은 알맞음을 얻는 것이고, 은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 (일의 정황에) 따를 수도 있고 들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니, 매사에 이로움과 해로움을 잘 헤아리고 적당한 정도를 파악해서, 처신할 때 어떤 때는 세련되게 하고 어떤 때는 수수하게 하며, 어떤 때는 너그럽게 하고 어떤 때는 사납게 하여 모든 경우에 적절함을 얻어도, 도리어 소리,,형태,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완전히 말없이 해낸다.

 

履以和行, 謙以制禮, 復以自知, 恒以一德, 損以遠害, 益以興利, 困以寡怨, 井以辨義, 巽以行權.

 

로써 조화롭게 행동하고, 으로서 를 제정한다 . 으로써 자신을 알고, 으로서 덕을 한결같이 한다. 으로써 해로움을 멀리 하고, 익으로써 이로움을 일으킨다. 으로써 원망을 줄이고, 으로써 의를 변별한다. 손으로써 권도權道을 행한다.

 

이것은 세번째로 아홉 괘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군자가 우환에 처하는 방법을 밝히고 있다. “履以和行는 군자가 이괘의 조화로움를 운용해서 행동한다는 뜻이다. 조화는 적당하고 꼭 맞는 것이니, 일을 할 때 지나침과 못미침이 없는 것이다.

謙以制禮는 겸괘의 겸손을 운용해서 예를 제정한다는 뜻이다. 겸손은 예를 행하는 전제이므로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의 행동은 예에 근거한 것일 수 없고, 겸손한 사람만이 예로써 자기를 절제할 수 있는 것이다.

復以自知는 군자가 복괘의 뜻을 운용해서 자기본유의 선한 본성을 스스로 반성한다는 뜻이니, 만일 불선不善이 있으면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고 일단 잘못을 알면 고치지 않음이 없다.

恒以一德은 군자가 항괘의 뜻을 운용하여 그 덕을 지켜 바꾸지 않음이 시종여일하다는 뜻이다. 일덕一德은 변덕의 반대인데, 군자는 항상됨을 지키기 때문에 덕을 한결같이하나, 소인에게는 항상됨이 없으므로 변덕스럽다.

損以遠害는 군자가 손괘의 뜻을 운용해서 자기에게 유해한 것을 없앤다는 뜻이다.

益以興利는 군자가 익괘의 뜻을 운용해서 개과천선한다는 것이니, 세상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는 천선하는 것만한 것이 없으므로 이로움을 일으킨다고 한 것이다.

困以寡怨은 군자가 곤괘의 뜻을 운용해서 원망을 줄인다는 것이다. 곤경에 처하는 것이 어떻게 원망을 줄일 수 있는가? 군자는 곤란한 때를 당하면 오로지 반성할 뿐이어서, 막혀도 통하고, 괴로워도 즐기니 무슨 원망,근심이 있겠는가!

井以辨義이라 함은 군자의 의는 사물을 구제하는 것에 있고, 우물의 의는 사람을 양육하는 것에 있으니, 군자가 정괘의 상을 보면, 자기를 보존하고 만물을 완성시켜 주는 것存己濟物을 환히 알 수 있어서, 각각 그 마땅한 의를 얻게 한다는 것이다.

巽以行權에서 손에는 따르고 들어간다는 뜻이 있는데, 따른다는 것은 이치에 따를 수 있다는 것이고, 들어간다는 것은 이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치에 따를 수 있고 이치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으므로 권도權道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은 저울추이니, 사물의 경중을 가늠한다. 권의 특징은 사물의 경중에 따라 조응하고, (권의) 動靜은 때에 따라 달라지는데, 판연하게 경계지워지지 않으니, 사람은 다만 그것이 균형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군자가 손괘의 뜻을 운용하니, 일을 도모하면 반드시 권도를 행하듯이 때에 따르고 이치에 좇으며 변화에 조응하고 또 은연중에 해내어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8

󰡔󰡕之爲書也, 不可遠, 爲道也屢遷. 變動不居, 周流六虛, 上下無窮, 剛柔相易, 不可爲典要, 唯變所適.

 

󰡔󰡕은 책이라는 과넘에서 보면 멀리할 수 없는 것이고, 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항상 변하는 것이다. 변화.운동하며 멈추지 않고, 六虛에 두루 유전하며, 상하가 무상하고, 강유가 서로 바뀌니, 일정한 표준을 세울 수 없고, 오직 변화에 맞출 뿐이다.

 

여기로부터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도는 헛되어 행해지지 않는다苟非其人, 道不虛行 까지가 제 8장이다. 이 장은 오직 효사爻辭를 논한 것이다. 이 단락은 󰡔󰡕의 특징이 변화에 있음을 거듭 설명하고 있다. “󰡔󰡕之爲書也, 不可遠󰡔󰡕이 책으로서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니, 어느 누구도 그것을 멀리할 수 없고 나아가 잠시라도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爲道也屢遷󰡔󰡕을 도로서 말한다면, 그것은 항상 변천하고 변화,운동이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하의 각 구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항상 변하는 것이다라는 말의 이치를 밝힌 것이다. 불거不居는 멈추지 않는 것이다. 육허六虛는 곧 육위六位인데, 바로 한 괘의 여섯 위치이다. 육위를 육위라고 하지 않고 육허라고 한 것은 여섯 개의 위치가 지금 비어 있으면서 변화,운동을 기다리고 있음을 나타낸다. “變動不居, 周流六虛는 강과 유가 육허 속에서 오르내리고, 왕래하며, 순환유전하고, 변화.운동하며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上下無常, 剛柔相易은 그것들이 혹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고, 혹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 가니, 위아래가 결코 일정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강이 오면 유는 가고, 유가 오면 강은 가니, 강은 유로 바뀌고, 유는 강으로 바뀌어 강유가 서로 바뀌는 것이 끝이 없다.

不可爲典要에 대해 한강백韓康伯일정한 기준을 정할 수 없다不可立定準也 고 했는데, 아주 잘 설명한 것이다. 은 어떤 특정한 것을 일정한 표준으로 삼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역은 확정 불변의 규정 없이 오직 변화에 맞출 뿐이고, 일체의 모든 것을 변화를 보고 정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바로 변화에 통한다는 것은 때를 좇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가 󰡔易傳󰡕에서 말한 역은 變易이니, 때에 따라 변이해서 를 따른다.”는 것이니, 길흉회린에는 일정한 표준이 없고, 전적으로 한 괘, 한 효 속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이 양의 자리에 있고, 음이 음의 자리에 있는 것이 정이고, 일반적으로 그것을 길이라고 하지만 어떤 때는 오히려 흉이 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길하던 대응이 어떤 때는 흉하다. 하나의 변치 않는 기준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곧 不可爲典要이다. < ??만약 揚雄󰡔태현太玄󰡕에서처럼, 죽음마다 354을 배정하여 낮(낮은 길하다)에 배당하고, 길 속에 또 경중을 구분해서 354찬을 밤(밤은 흉이다)에 배당하며, 흉 속에서 또 경중을 구분한다면, 이것이 바로 典要(일정한 표준을 새운다)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

 

其出入以度, 外內使知懼, 又明於優患與故, 無有師保, 如臨父母. 初率其辭而揆其方. 旣有典常, 苟非其人, 道不虛行.

 

출입은 법도에 맞게 하고, (남이) 안팍으로 두려움을 알게끔 한다. 또한 우환과 임무를 알리고, 스승과 벗師輔 이 없어도, (󰡔󰡕) 부모대하듯 한다. 먼저 그 사를 따르고 나서 방향을 헤아린다. 이미 지켜야 할 표준이 있어도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도는 헛되어 행해지지 않는다.

 

이 단락은 이해가 잘 안되는데, 우리는 다만 대체적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뿐이다. “其出入以度, 外內使知懼는 잠시도 을 떠나지 않는 사람의 출입, 실천과 은둔行藏은 반드시 신중하여 법도가 있고, 그 사람이 일을 도모할 때에는 반드시 마음을 보존하고 경계하며 두려워하여 감히 함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밖으로는 자기의 거동과 행위에 착오가 있을까 두려워 하고, 안으로는 자기의 도덕수양에 부족함이 있을까 두려워 한다.

又明於優患與故는 사람이 󰡔󰡕을 멀리하지 않으니, 타인으로 하여금 안팎으로 두려움을 알게 할 수 있을 뿐아니라, 자기에게 우환의식이 있다는 것과 천하국가의 일 속에서 자기가 마땅히 짊어 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타인이 인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無有師保, 如臨父母󰡔󰡕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비록 스승의 가르침이 없고 벗의 도움이 없더라도, 󰡔󰡕을 대하는 마음을 또한 마치 부모를 대하듯이 공경하고 흠애할 수 있다는 것이다.

初率其辭而揆其方은 역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설명한다. 먼저 역어떤 괘의 괘사.효사의 의미를 이해하고 운용한 다음, 그 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파악한다.

旣有典常이란 󰡔󰡕이 비록 일정한 기준이 될 수 없고, 강유剛柔의 변화 및 그것이 반영하는 길흉회린에는 정해진 기준이 없지만, 그 변화는 결코 잡다하지도 조리가 없지도 않아서 따를 만한 규칙이 있다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에도 지켜야 할 표준이 있다.

苟非其人, 道不虛行이란 역의 도는 실재하고, 역이라는 책은 그 점에서 성립하지만, 관건은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그것을 배우고 쓰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도를 넓힐 수 있지만, 도는 사람을 넓힐 수 없다. 󰡔󰡕은 반드시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배우고 써야 작용할 수 있다. 󰡔󰡕을 배우고 쓰는 모든 사람이 󰡔󰡕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의 도가 어떻게 세상에 행해지겠는가!

 

9

󰡔󰡕之爲書也, 原始要終以爲質也. 六爻相雜, 唯其時物也. 其初難知, 其上易知, 本末也. 初辭擬之, 卒成之終.

 

󰡔󰡕이라는 책은 시작을 추론.탐구해서 끝을 잘 알아차리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여섯 개의 효가 섞여 있으나, 오직 그 (섞인 것의 내용은) 시대와 사물?일 뿐이다. 초효初爻는 알기 어려우나 상효上爻는 알기 쉬우니, 그것은 양자가 본말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초효사가 헤아리면, 마지막(곧 상효)에서 완성된다.

 

여기부터 기유위, 기강승야까지가 제 9장이다. 이 장은 효의 지위와 작용을 중점적으로 설명한다.그러나 64괘의 효를 총괄적으로 설명하긴 하지만, 어떤 특정한 괘의 효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먼저 전체 󰡔󰡕의특징으로부터 설명한다. “󰡔󰡕之爲書也, 原始要終以爲質也󰡔󰡕이 하나의 책으로서 중요한 특징을 가지는데, 그것은 바로시작을 추론.탐구해서 끝을 잘 알아차린다原始要終는 것으로 전체 64괘의 배열은 물론 한 괘의 구성도 原始要終을 그 (바탕)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는 체로 이해할 수 있다. “原始要終以爲質也64괘 전체가 原始要終의 원칙에 따라 구성되고, 한 괘의 모습도 原始要終의 원칙에 따라 구성된다는 의미이다. “原始要終이란 바로 시작을 추론.탐구해서 끝을 잘 알아 차린다는 것이다. 시작을 통해 끝을 알고, 끝을 통해 시작을 안다. 요컨대, 시종의 문제를 중시하는 것이다. 󰡔󰡕이 시작과 끝의 문제를 특별히 강구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이 변화를 설명하는 책이고, 변화를 설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시를 설명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괘는 시대이고, 효는 시대의 변화에 맞는 것이다<출전 >”에서 를 설명할 때도 필연적으로 변화를 과정으로 여기니, 과정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시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라는 책 속에서 원시요종의 정신이 관철되지 않은 곳이 없다. 옛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의 원시요종을 겨우 한 괘를 가리켜 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이라는 책이어떠어떠하다라고 설명한 이상, 가리키는 것은 반드시 󰡔󰡕 전체여야 한다. 󰡔󰡕64괘 전체는 하나의 커다란 발전과정이니, 건곤 두 괘로부터 시작해서 한 괘가 한 시대로 되고 차례에 따라 질서있게 곧바로 기제미제라는 두 고리에 이르러 두 괘가 종결되고, 그런 후에 새로운 과정을 시작한다. 건곤은 곧 시작이고, 기제미제는 곧 끝이다. 건곤으로 시작해서 기제미제로 마친다는 것은, 의미가 매우 깊은데, 󰡔󰡕을 지은자에게 발전 곧 과정의 명확한 관념이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한 괘 속의 초효로부터 상효까지도 원시요종의 사상에 따라 생긴 것이다. 는 시작이고, 은 마침이니, 초와 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시요종이위질야는 비록 󰡔󰡕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지만, 아래 글의 내용에서 보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히 한 괘의 시작과 마침이다.

六爻相雜, 唯其時物也64괘가 육효상잡이라는 것을 밝힐 뿐 아니라 하나하나의 괘가 또한 육효상잡임을 밝힌 것이다. “육효상잡은 여섯 효의 剛柔動靜吉凶悔吝이 같지 않음을 말한다. 여섯 효의 강유동정길흉회린이 같지 않다는 것은 차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들이 같지 않은 시와 물을 반영한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시는 卦者時也, 하나의 시대로서 전체 64괘의 발전고리 속의 한 부분이다. 물은 物以群分<출전 >”, 다시말해 陰物陽物이라고 할 때의 물이다. 육효의 음양강유동정은 한 곳에서 섞여임으로써 하나의 괘를 형성하여 하나의 시대를 대표하고, 한 곳에서 뒤얽힌 여섯 효 속의 각 효는 한 시대 속의 한 발전단계를 대표한다. 다시말해 는 시대의 변화에 맞다”(爻者適時之變者也<출전 >는 의미이다.

其初難知, 其上易知, 本末也”. 한 괘속에서 초효初爻의 상은 관찰해서 파악하기가 아주 어렵고 따라서 초효의 사도 붙이기가 아주 어렵다. 그러나 상효上爻의 상은 비교적 관찰하고 파악하기가 쉽고 따라서 상효의 사도 붙이기가 쉽다. 왜냐하면 초와 상은 본말의 관계, 다시말해 시종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初辭擬之, 卒成之終은 초효의 사가 일단 헤아려져 어떤 상을 취할 것인가와 무슨 문제를 다룰 것인가가 이미 확정되면, 상효가 곧 어떻게 완성되고 끝맺어지는가의 문제는 자연히 쉽게 알게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건괘 초구효사가 潛龍勿用으로 헤아려지면 그 마지막의 上九亢龍有悔로 헤아려 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예를 들어 준괘屯卦 초구 磐桓, 利居貞, 利建侯는 머뭇거리며 나아가기가 어렵지만, 초구인 이 아래에 있으면서 또한 괘를 이루는 근본이므로 올바름을 지키고 제후 를 세우는 데서 이로와짐을 설명하고 있다. 불리한 와중에도 아직 유리한 일면이 있다는 것이다. 상육上六에 이르면 乘馬班如, 泣血漣如라 하니, 나아 가기 어려울 뿐만이 아닌데, 왜냐하면 준의 마지막(무르익은 상태)

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나아 가려 해도 나아 갈 수가 없고, 출로를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에 초와 상의 효사가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조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若夫雜物撰德, 辨是與非, 則非其中爻不備. 噫亦要存亡吉凶, 則居可知矣. 知者觀其彖辭, 則思過半矣.

 

만약 저 잡다한 물성질과 특징을 재고, 그것들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려면, 중간의 효(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안될 것이다. (나아가)존망길흉을 알려면 (각 효의 설명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지혜로운 자가 단사를 보면, 반이상을 알 것이다.

 

雜物撰德, 辨是與非, 則非其中爻不備라는 말은 한 괘의 여섯 효를 크게 초,과 중간의 효로 양분할 수 있다는 점에 기초한다. 윗글에서 설명했듯이 ,효는 한 괘의 시작과 끝으로서 한 괘 속에서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만일 중간의 2,3,4,5의 네 효가 없으면 곧 갖추어지지 않으면, 완전한 문제해결을 할 수가 없고, “잡물찬덕할 수 없으며, “시와 비를 구별할 수 없다. “雜物撰德은 다음 문장의 辨是與非과 마찬가지로 술어이다. “잡물은 존비귀천선악이 서로 같지 않은 잡다한 인간사의 상황을 반영한다; “찬덕은 사물의 서로 다른 성질과 특징을 표현한다. “변시여비는 그것들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성취하려는데, 초효와 상효만 있고 중효가 없으면, 매우 불충분하다.

噫亦要存亡吉凶, 則居 可知矣에서 희는 또한 의라고도 하는데, 아울러 억과도 같다. “희역은 곧 억역인데, 발어사로서 실제적인 뜻은 없다. 초효와 상효가 있고, 2,3,4,5의 중간 효가 있으면, 여섯 효가 갖추어지고, 그러면 존망길흉의 문제를 전부 알 수 있다.

知者觀其彖辭, 則思過半矣”. 단사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체로 단이라는 것은 한 괘의 모습을 총괄적으로 논하고, 은 효의 뜻을 각각 구별하기때문이다. 은 단사 곧 괘사이고, 상은 효사이다. 괘사는 한 괘의 총괄적인 설명이고, 효사는 한 괘 여섯 효의 개별적인 설명이다. 지자知者 곧 총명하고 예지로운 사람은 괘사를 한 번 보면 전체의 뜻에서 반을 안다. 이 장은 괘로부터 말을 시작한 다음 6효까지 논급했고, 여기에 이르러 다시 괘로 돌아가 말을 맺었다.

 

二與四同功而異位, 其善不同. 二多譽, 四多懼, 近也. 柔之爲道不利遠者, 其要無咎, 其用柔中也. 三與五同功而異位, 三多凶, 五多功, 貴賤之等也. 其柔危, 其剛勝邪.

 

이효와 사효는 기능이 같으나 위가 다르니, 그 가치가 같지 않다. 이효에는 영예가 많은 반면 사효에는 두려움이 많은데, 그것은 (사효가 오효에) 가깝기 때문이다. 는 본래 (오효로부터) 멀리 있는 것에게는 불리한데도, 근본적으로는 허물이 없는 것은 을 쓰기 때문이다. 삼효와 오효는 기능이 같으나 위가 다른데, 삼효에는 흉이 많고, 오효에는 공효가 많다. 그것은 귀천의 차이때문이다. 거기에곧 삼효와 오효의 위치에유효柔爻가 있으면 위태롭고, 강효剛爻가 있으면 임무를 감당할 수 있다.

 

이것은 64괘 안의 , 등 네 괘의 지위와 기능을 총괄적으로 논한 것이다. “二與四同功而異位, 其善不同에서 二與四는 한 괘 안의 두번쩨 효와 네번째 효이다. “동공同功二爻四爻 모두 짝수이고, 음의 자리라는 것이다. “이위異位五爻를 기준으로 말한 것인데, 이효는 오효로부터 멀고, 사효는 오효로부터 가깝다는 것이다. 오효는 임금의 자리인데, 오효로부터 거리가 같지 않으니 그 가치가 같지 않다”.

어떻게 다른가? “二多譽, 四多懼”. 64괘 안에서 이효는 대부분 영예이니, 좋다. 그러나 사효는 대부분 두려움이고, 좋지 않다. 사효에 두려움이 많은 이유는 임금의 자리에 가깝고”, 임금의 자리에 가까이 있으면 반드시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柔之爲道不利遠者, 其要無咎, 其用柔中也二爻에 영예가 많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이효는 오효에서 멀어서 본래는 불리하다. 그러나 이효는 오히려 대부분 허물이 없다. 이것은 이효가 유중柔中”, 즉 이미 유의 자리이면서 또한 괘의 가운데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유의 자리이면서도 괘의 가운데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허물이 없다” . 그런데 여기서는 이효를 설명하여 유의 자리이면서도 괘의 가운데에 들어 있고, “근본적으로는 허물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64괘에서 찾을 수 있는 통례이다.

三與五同功而異位에서 삼효와 오효는 모두 홀수이고, 의 자리이므로 동공同功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오효는 임금의 자리이고 삼은 신의 자리여서 그 귀천이 다르므로 이위異位라 한 것이다.

三多凶, 五多功, 貴賤之等也64괘 안에서 삼효는 대부분 흉이고, 오효는 대부분 공효인데, 이것은 삼효와 오효의 귀천,지위가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其柔危, 其剛勝邪, 삼효와 오효는 양의 자리인데 유효柔爻가 거기에 있으면 곧 어려움이 있게 되고, 강효剛爻가 거기에 있으면 곧, 강효가 양의 자리에 있으면 임무를 감당할 수 있고 어려움도 없다는 것이다.

 

10

󰡔󰡕之爲書也, 廣大悉備, 有天道焉, 有人道焉, 有地道焉, 兼三才而兩之, 故六, 六者非他也, 三才之道也.

 

󰡔󰡕이라는 책은 광대하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거기에는 천도天道가 있고, 인도人道가 있으며, 지도地道가 있는데, 이 삼재를 둘씩 묶으므로 모두 여섯이 된다. 이 여섯 개는 다름아닌 삼재의 도이다.

 

여기로부터 그러므로 길흉이 생긴다까지가 제 10장이다. “󰡔󰡕之爲書也, 廣大悉備, 󰡔󰡕은 하나의 책으로서 그 내용이 아주 광대하고 아주 완전하여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가 󰡔계사전상󰡕에서 말한 彌綸天地之道” ?冒天下之道” ?와 같다.

有天道焉, 有人道焉, 有地道焉이란 󰡔󰡕이라는 책이 광대하고 완전한 근거는 거기에 천도, 인도, 지도가 있어서 자연계에 대한 지식과 사상, 인간사회에 대한 지식과 사상을 전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계사전상󰡕󰡔󰡕하늘의 도를 밝히고, 백성의 일을 살핀다는 표현법과 사실상 같지만, 다른 것은 여기서는 인도人道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兼三才而兩之, 故六”. 여기서는 󰡔󰡕이 광대하고 완벽해서 앞에서 설명한 세상을 포괄하는 도와는 오히려 다른 바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역에 천도, 인도, 지도가 있고, 그것들이 여섯 효 위에서 구체화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일괘육효의 관점으로부터 역의 광대하고 완벽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천지인을 삼재라고 하는데, 각각은 괘 속의 두 효를 통해 대표된다. 오와 상 두 효는 위에 있으므로 하늘이 되고, 초와 이 두 효는 아래 있으므로 땅이 되며, 삼과 사 두 효는 괘의 중간에 있으므로 사람이 된다. 천지인은 각각 두 개의 효를 대표하고, 그래서 한 괘는 육효가 된다.

六者非他也, 三才之道也는 바로 앞의 말을 뒤집어 말한 것인데, 육효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천지인 이 삼재의 도라는 것이다.

 

道有變動, 故曰爻. 爻有等, 故曰物. 物相雜, 古曰文. 文不當, 故吉凶生焉.

 

도에는 변화운동이 있으므로 효라고 한다. 효에는 차등이 있으므로 사물이라고 한다. 사물은 서로 뒤섞이므로 문文彩이라고 한다. 문이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길흉이 생겨난다.

 

道有變動, 故曰爻는 삼재의 도가 변화와 운동을 가지고 있음을 󰡔󰡕 바깥의 객관 세계로부터 설명한 것이다. 천도에는 밤과 낮, 사계절의 변화가 있고, 지도에는 강유剛柔, 건조함과 습함의 변화가 있으며, 인도에는 동정動靜, 행지行止, 선악, 길흉의 변화가 있다. 󰡔󰡕 안에 있는 삼재의 도는 (효를) 둘씩 묶어서 육효가 되고, 따라서 운동.변화한다. “효라는 것은 하늘의 운동을 본받은 것이다”<출전 >라는 말은 괘 속 육효의 변화운동이 󰡔󰡕 바깥의 천도, 지도, 인도의 변화.운동을 본받은 것이라는 뜻이다. 효의 특징은 자신의 삼재지도의 변화.운동으로써 객관세계의 삼재지도의 변화.운동을 반영했다는 점이다. 효를 효라고 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각주 > 효가 변화운동을 가지는 이유는 삼재를 둘씩 묶어여섯 개의 효가 괘를 이루기 때문이다. 여섯 효가 괘를 이루어야 변화와 운동이 있고, 또한 그럴 때만 천하의 운동을 본받는다. 외톨의 효 혹은 둘씩 겹쳐지지 않은 세개의 효는 자체에 변화운동이 없고, 또한 천하의 운동을 본받음도 없어서 효가 될 수 없고, 또한 효라고 부를 수도 없다.

爻有等, 故曰物에서 물은 物以群分의 물이다. 육효의 초효로부터 상효까지의 배열에는 존비귀천상하원근의 구분이 있고, 즉 동등하지 않은 무리로 나누어지고, 그래서 괘 속의 육효를 사물로 간주할 수 있다.

物相雜, 故曰文”. 효에는 강유가 있고, 자리에는 음양이 있는데, 강효와 유효가 음양의 자리에 자다하게 자리잡아 복잡하게 서로 섞인 상태를 형성하니, 그래서 문文彩이라고 부른다.

文不當, 故吉凶生焉사물이 서로 섞이므로 문이라고 부르는데, 문의 특징에는 합당함과 부당함이 있다. “부당이란 강효가 음의 자리에 있고 유효가 양의 자리에 있는, 자리의 부당함이다. 자리의 부당함이 있으면 곧, 자리의 합당함이 있는데, 자리의 합당함이란 강효가 양의 자리에 있고, 유효가 음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리가 합당하면 길하고, 자리가 부당하면 흉하다. 가령 자리가 모두 합당하거나 모두 부당하다고 하면 문을 이루지 않고,따라서 길흉도 또한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은 자리의 합당과 부당을 중히 여기기보다는 때의 문제와 덕의 문제를 중시한다. 자리가 부당해도 때가 맞으면 또한 길할 수 있고, 자리가 합당해도 때가 맞지 않으면 또한 흉할 수도 있다. 요컨대, “文不當은 넓게 이해해야 하는데, 자리,시간, 덕의 세 측면을 모두 고려해 넣는 것이다.

 

11

󰡔󰡕之興也, 其當殷之末世, 周之盛德邪? 當文王與紂之事邪? 是故其辭危, 危者使平, 易者使傾. 其道甚大, 百物不廢, 懼以終始, 其要無咎, 此之謂易之道也.

 

󰡔󰡕이 생겨난 것은 末世, 盛世인가? (더 구체적으로) 문왕과 주왕이 다투던 때에 해당하는가? 그래서 그 사(의 내용)이 위태로운데, 위태롭다고 여기는 자세는 (일을) 견실하게 하고, 안이한 자세는 (일을) 그르치게 한다. 그 도는 아주 커서 온갖 사물을 페기시키지 않으니 , 시종 두려워하면, 근본적으로 허물을 없애는 것, 이것이 역의 도이다.

 

이 단락은 제 10장이다. “󰡔󰡕之興也, 其當殷之末世, 周之盛德邪? 當文王與紂之事邪?” 이것은 부정확하게 추측하는 말이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춘추말이어서 고대로부터 멀지 않은데도, 󰡔󰡕 괘효사를 지은 자가 누구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긴 하지만 기꺼이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가 이미 알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의 괘효사가 반영한 특징에 근거해서, 그것이 생겨난 시대가 은주殷周 교체기 곧 문왕과 주왕紂王이 싸우던 때일 수 있다고 추측했을 뿐이다. 이 추측을 오늘날에는 아주 실제에 부합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의 작자가 누구인지를 확정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사기󰡕󰡔한서󰡕에서는 문왕이 유리에 갖혀서 󰡔주역󰡕을 익혔다고 하는데, 아마 사실이 아닌 것 같고,믿을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 공자도 모르는 것을 한대漢代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是故其辭危󰡔󰡕이 은주교체기 곧 문왕과 주왕이 다투던 때에 생겨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에는 하나의 특징 즉 위태로움이 있다는 뜻이다. 󰡔󰡕의 설명 속에는 마치 얼음을 밟는 듯하고, 전전긍긍하는 위태로운 심리상태가 체현되어 있다.

危者使平, 易者使傾”, 󰡔󰡕에는 도처에서 이러한 이치를 반영한다: 마음에 두려움을 보존하여 전전긍긍하면 반드시 평안함을 얻으니, 예를 들어 망하겠구나! 망하겠구나! 하면서 뽕나무 뿌리에 매단다”<출전 >고 하는 것처럼 망할 것을 걱정할 수록 뽕나무 뿌리에 매단것처럼 견고해진다. 반대로 위태로움을 가볍게 여겨 안이하게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반드시 무너지고 패망한다. 예를 들어 하교멸이흉”<해석, 출전 >은 작은 악이라고 여겨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오래 누적되어 구제할 수 없다. ?.

其道甚大, 百物不廢는 위에서 말한 이치가 크고,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어서 온갖 사물 속에 존재하니, 어떠한 상황도 이 큰 이치 바깥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懼以終始, 其要無咎, 此之謂易之道也󰡔󰡕이라는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에게 일러 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다음의 두가지라는 것이다. 즉 하나는 삼가하고 두려워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구無咎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무구는 곧 허물을 말금히 씻는 것이니, 허물을 말끔히 씻으려면 반드시 삼가하고 두려워 해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나에게 몇 년만 더 주어진다면, 마침내 󰡔󰡕을 배워서 큰 과오가 없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나라 사람 焦循󰡔󰡕이란 과오를 적게 하는 책이라고 말했는데, 아주 설득력 있는 말이다.

 

12

夫乾天下之至建也, 德行恒易以知險. 夫坤天下之至順也, 德行恒簡以知阻.

 

대저 이 천하의 지극한 꿋꿋함이고, 그 덕행이 항상 안전한 것은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대저 곤이 천하의 지극한 순함이고, 그 덕행이 항상 간단한 것은 막힘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부터 제 12장 곧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 이 단락은 앞 장을 이어서 삼가하고 두려워하여 허물을 없앤다는 의미를 강조하는데, 계속해서 위험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벼이 나아가서는 안되는 이치를 설명한다. 은 천하의 지극한 꿋꿋함으로서 원형이정元亨利貞 이며, 춘하추동 네 계절의 운행과 같으니, 요컨대 조금의 위험도 어려움도 없다. 그래서 그 덕행은 항상 안전하다. 안전과 위험은 상반되므로 사람들은 이 이미 항상 안전하다고 곧 위험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그러나 사실 그헣지 않다. 왜냐하면 바로 건이 천하의 지극한 꿋꿋함이고, 그 덕행이 항상 안전한 것은 오직 위험을 가장 잘 알아서 반드시 위험에 빠지지 않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 은 천하의 지극한 온순함으로서 그것에는 安貞之吉이 있으며, 땅과 대응해서 강함이 없고, 암말이 숫말을 따르는 것과 같으니, 요컨대 이로움을 따라도 막힘 이 없다. 그래서 그것의 덕행은 항상 간단하다. 간단함과 막힘은 상반되므로 사람들은 곤이 이미 항상 간단하다고 곧 막힘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바로 곤이 천하의 지극한 순함이고, 그 덕행이 항상 간단한 것은 오직 막힘을 가장 잘 알아서 반드시 막힘에 빠지지 않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

 

能說諸心, 能硏諸候之慮, 定天下之吉凶, 成天下之亹亹者.

 

마음 속으로 기뻐할 수 있고, 생각을 다듬을 수 있는 것은 천하의 길흉을 확정하고 천하가 힘쓰는 일을 이루는 자뿐이다.

 

과 같다. “侯之라는 두 글자는 빼야 한다. 은 연마이다. 미미는 勉勉이다. 여기서는 건곤 두 괘의 작용을 설명하는데, 또한 전체 64괘의 작용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은 사람에 따라 응용해야 하는데, 그래야 성인이 우환에 처할 때 󰡔󰡕을 어떻게 써서 천하의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두 개의 는 아래 문장의 成能과 상응하는데, 그것은 오직 성인만이 이와 같이 할 수 있고, 일반 백성은 이와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能說諸心은 건곤이 지극히 꿋꿋하고 지극히 순해서, 항상 안전하고 항상 간단해서 ?, 그리고 위험을 알고 막힘을 알아서, 천하의 이치를 완전히 이해하니, 저절로 기쁘다는 것을 말한다.

能硏諸侯之慮는 이미 휘험을 알고 막힘을 아는데도, 또한 사정에 대해서 반복해서 연마할 수 있고, 살피고 또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리를 말끔히 이해해서 마음 속에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에 길흉성패득실이 명백하게 구별된다. 사정을 반복해서 연마할 수 있고, 살피고 또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일의 성취에 힘쓸 수 있고, 천하의 사업을 성취할 수 있다.

 

是故變化云爲, 吉事有祥; 象事知器, 占事知來.

 

이런 까닭에 변화하고 말하고 행동함에 좋은 일에는 상서로움이 있다. 일을 본떠서 구체적인 것을 알며 일을 점쳐서 올 것을 안다.

 

()은 말이고 위()는 행동이다. 변화는 음양의 변화이고 운위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다. 천도(天道) 음양의 변화는 물론이고 사람의 말과 행동은 모두 일에 앞서 징조가 드러난다. 비록 좋은 일에는 상서로움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나쁜 일도 그 속에 들어 있다. 천도가 좋으면 사람 일도 좋으며,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모두 각기 미리 드러나는 조짐이 있는 것이니 갑자기 일어 나는 것이 아니다. 윗 글에서 앞 두 구절은 객관적인 도리가 이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뒤 두 구절은 성인이 어떻게 이 도리에 의거하여 지나간 일과 앞으로 올 일을 아는가 하는 문제를 말한 것이다. ‘일을 본뜬다 (象事)’는 것은 모양을 취해 괘를 짓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이란 역()에서는 각종 도구 뿐만 아니라 모습을 볼 수 있는 실제 일을 가리킨다. ‘일을 본떠서 구체적인 것을 안다 (象事知器)’는 말은 만물에는 음양의 변화가 있고 사람에는 말과 행동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성인이 바로 이 변화 가운데서 모양을 취해 구체적인 것을 알며, 또 괘를 지어 변화의 도리를 괘 속에 갈무리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이 말은 지혜로써 지나 간 것을 갈무리 한다 (知以藏往)’, ‘괘의 덕이 바르기 때문에 안다 (卦之德方以知)’는 말과 뜻이 비슷하다. ‘일을 점친다 (占事)’는 것은 점치는 행위이며, ‘앞으로 올 것을 안다 (知來)’는 것은 좋을 것인가 나쁠 것인가, 얻을 것인가 잃을 것인가,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지킬 것인가 빼앗길 것인가를 미리 아는 것이다. ‘일을 점쳐서 앞으로 올 것을 안다 (占事知來)’는 말은 상황이 좋을 것인가 나쁠 것인가, 얻을 것인가 잃을 것인가는 먼저 징조가 나타나기 때문에, ‘성인이 점을 통해 좋을 것인가 나쁠 것인가를 미리 알 수 있음을 말한다. 만일 일이 본질적으로 감추어진 것으로부터 드러 나는 것으로의 점진적인 과정이 하나도 없이 완전히 갑자기 생겨나서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점쳐서 뽑은 괘가 사람들에게 좋을 것인가 나쁠 것인가를 알려 줄 수도 없으며, 좋을 것인가 나쁠 것인가를 알려 준다고 해도 길잡이의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점쳐서 앞으로 올 것을 안다 (占事知來)’고 한 말은 신비함으로써 올 것을 안다 (神以知來)’, ‘점치는 풀()의 덕은 원만하고도 신묘하다 (蓍之德圓而神)’는 말의 설명과 뜻이 비슷하다.

 

天地設位 聖人成能 人謀鬼謀 百姓與能 八卦以象告 爻彖以情言 剛柔雜居而吉凶可見矣

 

하늘과 땅의 위치를 정하여 성인이 조화 공능을 완성하고, 사람이 꾀하고 귀신이 꾀하여 백성들이 조화 공능에 참여한다. 8괘는 모양을 가지고 알려주고, 효사(爻辭) 단사(彖辭)는 실정을 가지고 말한다. 굳셈과 부드러움이 섞여 있어서 좋을 것인가 나쁠 것인가를 볼 수 있다.

 

앞 네 구절은 󰡔󰡕을 짓고 󰡔󰡕을 쓰는 문제에서 천지자연과 성인 및 성인과 백성의 관계를 말했다. ‘하늘과 땅의 위치를 정한다 (天地設位)’는 말은 계사전 상첫 머리에서 말한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 (天尊地卑)’의 뜻과 같다. 하늘은 위의 높은 자리에 있으며 땅은 아래의 낮은 자리에 있다는 자연계의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이 󰡔󰡕에서 건곤 두 괘의 중요한 자리를 결정하였다. 건곤의 지위가 정해진 뒤에 8괘가 배열을 이루었고, 그런 다음에 8괘를 겹쳐서 64384효가 만들어졌으니, 이렇게 되어 세상의 뛰어난 능력이 모두 그 속에 있게 되었다. ‘하늘과 땅의 위치를 정한다 (天地設位)’는 말은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 사계절, 낯과 밤 및 날짐승과 물고기, 동물과 식물 같은 전체 자연계의 운동 변화를 실제적으로 개괄한 것이다. 자연계의 운동 변화도 일종의 조화 공능()’이다. 그러나 이같은 조화 공능()’은 완전히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함도 없고 함도 없다. 따라서 사람의 조화 공능()’과 비교하면 자연의 조화 공능에서의 공능은 성()일 뿐이니 조화 공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연의 조화 공능은 인류에게 󰡔󰡕을 짓고 󰡔󰡕을 쓰는 밑그림과 모델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을 짓고 󰡔󰡕을 써서 온 세상의 뛰어난 능력을 다 하는 일은 성인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성인이 조화의 공능을 완성한다 (聖人成能)’는 구절은 바로 이런 뜻이다. 자연계의 운동 변화는 생각함도 없고 함도 없어 저절로 그러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성인은 자연계의 운동 변화를 본뜨고 거기에 자기의 주관적 정신을 더해 생각함도 있고 함도 있는 것으로써 󰡔󰡕을 짓고 󰡔󰡕을 써서 온 세상의 뛰어난 능력을 다 한다. 이 두 구절은 모두 자연과 사람이 하나이면서도 또 다름이 있다는 생각을 말하고 있다. ‘사람이 꾀하고 귀신이 꾀하여 백성들이 조화 공능에 참여한다 (人謀鬼謀 百姓與能)’는 두 구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을 대하는 태도에서 성인과 백성이 다르다는 사실을 밝게 드러내고 있다. 다른 점은 바로 사람이 꾀하고 귀신이 꾀한다고 표현한 문제이다. 󰡔󰡕에는 사람이 꾀하는 경우도 있고 귀신이 꾀하는 경우도 있다. ‘성인은 모양을 보고서 괘를 만들고 말을 붙였으며, ‘하늘의 도사람의 일을 그 속에 넣었으니, 바로 지혜로써 지나 간 것을 갈무리 한다 (知以藏往)’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꾀하는 것이며, 사람이 꾀하는 것은 밝다. ‘성인신물(神物)을 일으키고점을 이용하여 귀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만들어 백성의 행동을 지도하며, 백성들이 믿고 따르게 하니 이것이 귀신이 꾀하는 것이며, 귀신이 꾀하는 것은 어둡다. ‘사람이 꾀하고 귀신이 꾀한다 (人謀鬼謀)’는 말은 통치자, 즉 똑똑하며 앞을 미리 내다보는 성인이 천지자연의 유형에 의거해서 스스로 깨달아 만들어 낸 것이니, 바로 조화 공능의 완성(成能)’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조화 공능에 참여 (與能)’한다. ‘조화 공능에 참여 (與能)’한다는 것은 성인이 이미 설계하여 완성한 사람이 꾀하고 귀신이 꾀하는 (人謀鬼謀)’ 것에 믿고 참여하는 것이다. 백성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점치는 것이 참으로 귀신과 통하는 것이라 여겨서 귀신이 꾀하는 일에 대해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백성들이 조화 공능에 참여 (與能)’하는 까닭은 󰡔󰡕에 사람이 꾀하는 일 뿐만 아니라 귀신이 꾀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8괘는 모양을 가지고 알려주고, 효사(爻辭)와 단사(彖辭)는 실정을 가지고 말한다 (八卦以象告 爻彖以情言)’고 했는데 모양이란 괘 그림을 말한다. 8괘는 󰡔󰡕의 처음 형태이다. 그러나 사물의 성질을 보여줄 뿐 사물의 변화를 비춰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모양을 가지고 알려준다 (以象告)’고 하였다. ()와 단()8괘를 겹쳐 64괘와 384효가 된 다음의 괘와 효이다. 괘와 효는 말을 써서 사물의 운동 변화를 나타내기 때문에 실정을 가지고 말한다 (以情言)’고 하였다. ()과 성()은 서로 대응하지만 정은 변하고 성은 변하지 않는다. ‘실정을 가지고 말한다 (以情言)’고 한 말은 괘사(卦辭)와 효사(爻辭)가 융통성이 있으며 변화 가능하다는 뜻이다. ‘굳셈과 부드러움이 섞여 있어서 좋을 것인가 나쁠 것인가를 볼 수 있다. (剛柔雜居而吉凶可見矣)’고 했다. 한 괘의 6자리에 음도 있고 양도 있으며 한 괘의 6효에 굳센 것()도 있고 부드러운 것()도 있지만, 굳센 효라고 해서 반드시 양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며 부드러운 효라고 해서 반드시 음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굳셈과 부드러움이 서로 갈마들어 뒤섞여 있기 때문에 반드시 제자리를 잃은 경우도 있고 얻은 경우도 있게 되니, 제자리를 얻었으면 좋고 얻지 못했으면 나쁘다.

 

變動以利言 吉凶以情遷 是故愛惡相攻而吉凶生 遠近相取而悔吝生 情僞相感而利害生 凡易之情 近而不相得 則凶 或害之 悔且吝

 

변동은 이로움을 가지고 말하고 좋고 나쁨은 사정으로 바뀐다. 이런 까닭에 사랑과 미움이 서로 부딪혀 좋고 나쁨이 생기며, 먼 것과 가까운 것이 서로 갈마들어 뉘우침과 뉘우침에 인색한 것이 생기고, 참됨과 거짓됨이 서로 느껴서 이로움과 해로움이 생긴다. 대체로 󰡔󰡕의 참 모습은 가까우면서도 얻지 못하면 나쁘게 되고 혹 해치게 되면 뉘우치게 되거나 또는 뉘우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변동은 이로움을 가지고 말한다 (變動以利言)’는 말에서 변동이란 윗 글 ()에 변동이 있기 때문에 효()라고 한다는 문장의 변동이니, 바로 한 괘에서 6효의 변동이다. 효이면서도 변동하지 않는다면 그런 효는 다시 있을 수도 없다. 여기서의 ()’는 윗 글 가운데 변하여 통함으로써 이()를 다한다고 한 이()이니, 때와 이치를 따르면 흉이나 회린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이()는 바름()과 상대적인 말이지 해로움()과 상대적인 말이 아니다. 이로움은 바름의 반대이다. 만일 6효가 모두 제자리에 있거나 아니면 모두 제자리에 있지 않다면, 변동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도 6효의 변동은 ()’를 통해 드러난다. 때와 이치를 쫓아 이로우면 그렇게 하고 이로움이 없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변동이다. 예를 들어 둔()괘 초구(初九:맨 밑에 있는 양효) 처럼 어려움에 처음 처하여 머믓거려지고 나아가기 어려울 때에는 본래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인데도 효사에서는 오히려 제후를 세워야 이롭다 (利建侯)’고 했으니, 이 말은 제후를 세우는 것 (建侯)’이 이롭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이 때와 이치를 따르는 것이며 또한 변동이다. ‘좋고 나쁨은 사정으로 바뀐다 (吉凶以情遷)’고 한 말에서 좋고 나쁨 (吉凶)’은 그 아래에서 말한 뉘우침과 뉘우침에 인색한 것 (悔吝)’이로움과 해로움 (利害)’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이란 그 밑에 나오는 서로 부딪고 서로 갈마들며 서로 느끼는 정이니 실은 6효가 서로 관계하는 구체적인 상황이다. ‘사정으로 바뀐다 (以情遷)’고 한 것은 좋고 나쁨, 뉘우침과 뉘우침에 인색함, 이로움과 해로움이 반드시 6효의 상호관계가 만드는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하여 확정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효사(爻辭)를 만들고 이해하는 일이 모두 이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사랑과 미움이 서로 부딪혀 좋고 나쁨이 생기며, 먼 것과 가까운 것이 서로 갈마들어 뉘우침과 뉘우침에 인색한 것이 생기고, 참됨과 거짓됨이 서로 느껴서 이로움과 해로움이 생긴다 (是故愛惡相攻而吉凶生 遠近相取而悔吝生 情僞相感而利害生)’고 한 말에서 사랑과 미움, 먼 것과 가까운 것, 참됨과 거짓됨이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효와 효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효사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좋음과 나쁨, 뉘우침과 뉘우침에 인색한 것, 이로움과 해로움 이 세가지 뿐이지만 근본적인 뜻은 사람들에게 위험하고 막히는 경우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 좋음과 나쁨은 사랑과 미움이 서로 부딪히는데서 나오니, 이 효와 저 효가 미워하여 서로 부딪는 것이 흉()이다. 예를 들면 동인(同人)괘 구삼(九三 : 밑에서 세번째 있는 양효)적이 강하기 때문 (敵剛)’이라고 한 경우이니, 상구(上九 : 맨 위에 있는 양효)와 서로 맞서 부딪은 결과는 ‘3년이 지나도록 군대를 일으키지 못한다 (三歲不興)’이다. 뉘우침과 뉘우침에 인색한 것은 먼 것과 가까운 것이 서로 갈마드는 데서 생긴다. 이 효와 저 효가 멀리 있으면서 서로 갈마들거나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갈마들거나, 뉘우침과 뉘우침에 인색한 것을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면 예()괘의 육삼(六三 : 밑에서 세번째 있는 음효)과 구사(九四)는 가까우면서도 같은 종류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갈마든다. 그러므로 효사에서 웃 자리를 올려다 보고 미리 기뻐하면 뉘우치게 될 것이며, 늦어도 뉘우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움과 해로움은 참됨과 거짓됨이 서로 느끼는데서 생긴다. 이 효와 저 효가 거짓으로 서로 느끼면 해로움이 여기서 생긴다. 예를 들어 태()괘 구오(九五 :밑에서 다섯번째 있는 양효)가 굳센 양효로 가운데 바르게 자리하여 상육(上六 : 맨 위에 있는 음효)과 가까운데, 상육(上六)은 양이 사그러지도록 박해하니 이것이 거짓으로 서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사에서 박해하는 것을 믿고 있으니 위태로움이 있다 (孚于剝 有)’고 하였다. ‘대체로 󰡔󰡕의 참 모습은 가까우면서도 얻지 못하면 나쁘게 되고, 혹 해치게 되면 뉘우치게 되거나 또는 뉘우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凡易之情 近而不相得 則凶 或害之 悔且吝)’는 구절은 앞 세 구절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다. 좋음과 나쁨, 뉘우침과 뉘우침에 인색한 것, 이로움과 해로움의 근원은 이 효와 저 효가 가까워 서로 얻거나 아니면 얻지 못하는데 있다. 가까워서 서로 얻으면 좋고 이로우며, 뉘우칠 것이 없어져 후회가 없으며 잘못도 없다. 가까우면서도 서로 얻지 못하면 나쁘고 해가 되며, 뉘우치거나 뉘우칠 줄도 모르게 된다. ‘가까우면서도 서로 얻지 못한다 (近而不相得)’고 할 때 가까우면서도 ()’가 중요한 관건이다. 두 개의 효가 친하게 닮은 것이 가까운 것이지만 두 개의 효가 바르게 대응하는 것도 가까운 것이다. 서로 닮고 서로 응하면 가까운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먼 것이다. 한 괘에서 주축이 되는 효와 그 밖에 각각의 효와의 관계가 가까운 관계이다. 두 효가 가까운 상황에서 비로소 서로 얻느냐 서로 얻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나온다. 만일 이 효가 그 괘에서 주축이 되는 효가 아니고 또 저 효와 닮지도 않았고 대응하지도 않는다면 서로 얻었느냐 서로 얻지 못했느냐는 따질 것도 없게 된다. ‘서로 얻는다 (相得)’는 것은 이 효와 저 효가 서로 아끼고 친히 여기는 것이지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것이 아니며, 서로 돕는 것이지 서로 부딪는 것이 아니며, 참됨으로 서로 느끼는 것이지 거짓됨으로 서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서로 얻지 못한다 (不相得)’는 것은 이것과 반대이다.

 

將叛者其辭慙 中心疑者其辭枝 吉人之辭寡 躁人之辭多 誣善之人其辭游 失其守者其辭屈

 

장차 모반하려는 사람은 그 말이 부끄럽고, 마음 가운데 의심이 있는 사람은 그 말에 가지가 달린다. 길한 사람은 말이 적고, 조급한 사람은 말이 많다. 착한 사람을 속이려는 사람은 그 말이 뜨고, 지켜야 할 것을 잃은 사람은 그 말이 굽는다.

 

6 구절은 지극한 것을 얻는 데에 도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들은 󰡔󰡕의 말로는 어울리지 않으며 뒷 사람들이 끼워 넣었을 가능성이 아주 많으니 󰡔역전(易傳)󰡕의 원문이 아니다. ()은 점()과 같다. ‘장차 모반하려는 사람은 그 말이 부끄럽다 (將叛者其辭慙)’고 했는데, 사실에 맞지 않으면서도 양심적인 사람은 마음 속에 부끄러운 것이 있어서 그 말이 반드시 부끄러워 진다. 가지()는 갈라짐이다. ‘마음 가운데 의심이 있는 사람은 그 말에 가지가 달린다 (中心疑者其辭枝)’고 했으니, 마음 속에서 머뭇거리기만 하여 정해진 견해가 없는 사람은 마음이 미혹되고 어지러워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서도 뿌리가 없어서, 그 말에 반드시 가지가 달리게 되어 늘 스스로 서로 모순이 된다. ‘길한 사람은 말이 적다 (吉人之辭寡)’고 했으니 좋은 덕을 가진 사람은 착한 일을 하기에 스스로 부족하다고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이 적다. ‘조급한 사람은 말이 많다 (躁人之辭多)’고 했으니, 조급하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일만 하기에 바쁘기 때문에 말이 많다. ‘착한 사람을 속이려는 사람은 그 말이 뜬다 (誣善之人其辭游)’고 했으니, 남의 착함을 헐뜯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욕하거나 또는 감히 곧이 곧대로 밝혀 말하지 못하여, 헐뜯는 말 밖에 한 거풀 더 덮어 꾸미려고 하기 때문에 그 말이 뜬다. ‘지켜야 할 것을 잃은 사람은 그 말이 굽는다 (失其守者其辭屈)’고 하니, 지켜야 할 것을 잃었으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안으로는 안주할 곳이 없고 밖으로는 뜻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말이 굽는다.

 

계사전

Posted by 샤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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