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전 제1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 動靜有常 剛柔斷矣


천존지비 건곤정의 비고이진 귀천위의 동정유상 강유단의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 이에 따라 건괘와 곤괘의 순서가 정해진다. 낮은 자리(初爻)에서 높은 자리(上爻)까지 6효가 배열되어 귀한 신분과 천한 신분이 자리잡힌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안정된 법칙(常道)이 있어 굳셈()과 부드러움()이 결정된다.

 

공자는 계사전상하편을 지어서 󰡔주역󰡕 사상의 본질과 철학적 가치를 찾아냈으니, 투철하고 통쾌하며 깊이 있고 완전한 인식에 도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공자의 계사전이 없었더라면 후인들은 󰡔주역󰡕의 풍부한 이치(道理)를 완전히 이해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계사전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몇 구절은 󰡔주역󰡕 전체의 기본사상과 기본원리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天尊地卑 乾坤定矣라는 맨처음 두 구절에는 󰡔주역󰡕의 요점과 열쇠가 들어 있다.

乾坤定矣라는 한 구절은 괘의 배열 문제를 가르쳐 준다. 건곤 두 괘의 배열순서는 󰡔주역󰡕󰡔귀장󰡕이 서로 다르다. 󰡔歸藏󰡕은 은나라 때의 역이고, 거기에서는 곤괘를 64괘의 첫머리에 두고 건괘를 그 다음에 두었다. 그 때문에 이 역을 󰡔곤건 坤乾󰡕이라 부른다. 곤을 앞에 두고 건을 뒤에 놓은 배열방법은 은나라 사람들의 어머니 쪽(母系)을 중시한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주역󰡕은 은나라 역 󰡔곤건󰡕에서 곤괘를 첫머리에 두고 건괘를 다음에 놓은 배열을 뒤집어서, 건괘를 첫머리에 곤괘를 다음에 둔 방식으로 바꿨다. 그것은 은나라와 주나라 교체기에 의식형태 영역에서의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변화이고, 이 변화는 그 당시 사람들의 모든 사유방식을 바꾸어 놓아, 이후 수천년 동안 중국사상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주었고, 중국전통문화 가운데 특히 유가문화의 출발점은 이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건괘를 앞세우고 곤괘를 뒤로한 사상은 바로 주나라 사람들의 등급관념(계급관념)의 특징을 규정한다. 지아비는 높고 지어미는 낮다, 아버지는 높고 자식은 낮다,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다는 사상은 건괘를 앞세우고 곤괘를 뒤로한 사상이 발전하여 나온 것이고, 󰡔주역󰡕 64괘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꿰뚫고 있으며, 아울러 후세 유가사상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옛사람들은 이 사상을 윗사람을 받듦(尊尊)’이라고 개괄하게 된다. ‘尊尊사상은 주나라에 와서야 나타나게 된 것이고, 은나라 사람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친족을 친애하는(親親)’사상에 대한 부정이다. 주나라 때에도 여전히 친친을 말했지만 주나라 사람들이 더욱 강조한 것은 존존이다. 주나라 사람들은 존존을 강조하는 전제를 깔고 친친을 말한 것이다. 또는 주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친친존존사상을 개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주나라 사람들이 말한 친친존존관념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는 친친이기 때문에 은나라 사람들이 말한 친친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용󰡕에서 공자의 말로 기록하고 있는 친족을 받드는 질서와 현인을 높이는 차등에서 예의는 생긴다 라는 한 마디는 매우 좋은 증거자료다. ‘존현은 곧 친친이다. ‘친친존현은 다같이 차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친친은 부모를 으뜸으로 생각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서는 아버지를 높이고 어머니는 그 다음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온통 남존여비(男尊女卑), 부존처비(夫尊妻卑), 부존자비(父尊子卑)라는 의식이며, 이러한 의식은 󰡔주역󰡕 64괘의 괘사와 효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공자가 역을 연구한 것이 위편삼절’(韋編三絶 :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짐)에 이르렀고, 󰡔주역󰡕의 핵심 사상을 명확하게 꿰뚫었음은 바로 계사전첫머리에 乾坤定矣한 마디를 내놓은 것에서 알 수 있으니, 이 구절은 아름답고 힘이 있으며, 단 한 마디 말로 핵심을 설파한 것이다. 이 구절은 바로 󰡔주역󰡕 64괘의 배열에서 건괘를 앞세우고 곤괘를 뒤로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언뜻 보이지 않는 속에 지극히 깊고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乾坤定矣는 괘의 배열순서를 말하고, ‘天尊地卑는 자연현상을 말하였다. 이 두 구절이 결합하여 한층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건괘가 으뜸이고 곤괘가 다음이라고 하는 의미는 바로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듯이 하늘은 표준()이 되고 땅은 표준에 맞음()이 되어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주역󰡕의 독특한 사유방법이며, 그것은 하늘의 도로써 백성의 일을 증거삼는다고 요약할 수 있다.

하늘의 도는 바꿀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이 제시하는 모든 내용은 다 올바르며 바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사유방법일 뿐이다. 우리가 볼 때, 건괘를 앞세우고 곤괘를 다음으로 한 것과 자연계의 하늘이 높고 땅이 낮다는 것은 결코 필연적 연관이 없다. 은나라 사람들의 󰡔귀장󰡕역은 곤괘를 앞세우고 건괘를 뒤로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하나라 때의 󰡔連山󰡕은 근본적으로 건곤 두괘를 특별히 중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연계의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것은 하나라 때나 은나라 때나 주나라 때나 같았다.

또 분명히 지적하여야 할 것은, 공자에 의해 제기된 󰡔주역󰡕수건차곤’(首乾次坤 : 건이 으뜸이고 곤이 다음이다)의 원리 및 여기에서 도출된 부존처비(夫尊妻卑 : 지아비는 높고 지어미는 낮다), 부존자비(父尊子卑 : 아버지는 높고 자식은 낮다), 군존신비(君尊臣卑 :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다)는 사상은 그 가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민주사회 입장에서 말한다면 󰡔주역󰡕의 이러한 사상은 반드시 폐기해야 할 찌꺼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바로 알맹이(精華)였고, 그 시대 사상의 정수였으며, 심지어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하였다고 할 수 있으니, 은주 교체기에 있었던 역사의 위대한 진보는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에게는 당연히 우리의 시대정신이 있으니 󰡔주역󰡕의 건괘를 앞세우고 곤괘를 다음으로 한 사상을 계승할 필요는 없다.

卑高以陳 貴賤位矣이 두 구절은 하나의 괘 안에 있는 6효가 첫번째()로부터 여섯번째() 자리에 이르기까지 배열되는 의미를 설명한다.

以陳은 배열이란 뜻이다.

卑高以陳은 괘의 맨아래에서 시작하여,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의 배열이다. 이리하여 귀천이 자리잡으니’, 귀하고 천한 차등이 자리잡혀서 귀한 것은 곧 귀하고, 천한 것은 곧 천하여 바꿀 수 없다.

가 가리키는 것은 세상에서의 귀하고 천한 지위이며, 괘 안에서의 음의 자리와 양의 자리의 가 아니다.

괘의 6효 중에서 두번째와 네번째는 음의 자리이고 세번째와 다섯번째는 양의 자리이다.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의 두 효는 음양의 자리를 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384효 중에 각 괘의 처음()과 위()효사(小象)’는 모두 제자리를 얻었느냐 잃었느냐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건괘 上九 문언전귀하나 제자리가 없다(貴而无位)”라 하고, 수괘() 上六효사비록 제자리에 합당하지 않으나(雖不當位)”라 하였다. 이것은 바로 괘 안의 6효는 음의 자리와 양의 자리 문제를 가지고 있고, 또 귀하고 천한 자리의 문제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계사전의 이 부분에서 貴賤位矣라는 구절이 말하는 것은 귀하고 천한 지위의 문제이다.

動靜有常 剛柔斷矣이 두 구절도 괘와 효를 말한 것이며 객관세계를 말한 것이 아니다. 위 문장에서 말한 貴賤位矣는 맨 처음부터 맨 위까지의 6위를 가리켜 말하였고, 여기서의 剛柔斷矣6효는 결국 양효()와 음효()임을 설명한 것이다.

한 괘의 6효는 어떤 것은 양이고 어떤 것은 음이니, 아니면 이다. 는 양효이고 양은 이 되며, 은 음효로 음은 가 된다. 한 괘의 6효에서 를 보면 우리는 양효임을 알고, 양효는 강이며, 을 보면 우리는 음효임을 알고, 음효는 유이다. 이렇게 하여 쉽게 강유를 판단해낼 수 있을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강유는 동정을 통해야만 구분된다. 양은 동을 주관하고 음은 정을 주관하며, 변동이 의 안정태()이고, 불변이 의 안정태이므로 6효의 변화는 음양동정에 뿌리를 두며, 우리는 음양동정의 안정태()와 변동태()를 관찰함으로써 강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

 

일은 같은 무리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따라 나뉘어지니, 여기에서 길하고 흉함이 생겨난다. 하늘에서는 상()을 이루고 땅에서는 형()을 이루어 변화가 나타난다.

 

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에서 (사건, )이고, (만물, 물체)이다. 은 세상의 만사와 만물을 가리키니 곧 사물이다.

모임()과 나뉨()은 서로 호응하는 문자이고 도 그렇다.

천지간의 만사 만물은 모두 같은 종류끼리 서로 모이고, 같은 종류끼리 서로 모인 사물들은 모두 공동의 특징을 가지며, 서로 모인 같은 종류의 사물은 또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특징 때문에 다른 종류의 사물과 구분된다. 다시 말해 사물은 종류별로 무리짓는 것이고, 같은 종류의 사물은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에 모여서 합해지고, 다른 어떤 사물과는 상이점을 가지기 때문에 구분이 생긴다. 천지간의 만사 만물은 모두 같은 종류가 있고 다른 종류가 있으며, 모이고 갈라짐이 반드시 있으니, 길흉은 바로 여기에서 생긴다.

길흉은 운명이 좋게 또는 나쁘게 정해진 것이 아니고 인간 활동의 결과다. 인간이 일을 할 때, 때에 맞추어 실행하고, 가장 좋은 방안을 선택하여 문제를 처리하고, 객관조건이 허락하는 상황에서 주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하면 길할 수 있다.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사업상의 성공이다. 그것을 어기면 흉이니, 흉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사업상의 실패다.

그러면 성공과 실패는 方以類聚 物以群分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객관적 사물은 같은 종류가 있고 다른 종류가 있으며, 모임이 있고 갈라짐이 있으니, 이 법칙은 어길 수 없다. 사람의 사업이 천지만물의 같은 것끼리 모이고 다른 것과 헤어지는(同異聚散) 법칙에 순응한다면, 같이해야 할 것을 같이하고 달리해야 할 것을 달리하고 모여야 할 것에 모이고 갈라져야 할 것에 갈라져서 자연히 하다. 천지만물의 같은 것끼리 모이고 다른 것과 헤어지는(同異聚散) 법칙에 어긋난다면, 같이해야 할 것에 같이 하지 않고 달리해야 할 것에 달리하지 않으며, 모여야 할 것에 모이지 않고 갈라져야 할 것에 갈라지지 않으니 반드시 흉하게 된다.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에서 變化見矣는 역 괘의 변화를 말하고, ‘成象’ ‘成形두 구절도 역 괘의 변화를 말한 것이다.

천지의 변화는 상이 있고 형이 있으니 역괘의 변화도 그러하다. 역괘의 변화는 모두 건괘와 곤괘에서 비롯된다. 건은 굳세고() 곤은 부드러우니(), 강유는 바로 효의 으로서 역괘 변화의 몸체가 된다. 역괘의 변화는 실제로 강유의 변화이고, 강유의 변화는 진퇴에서 드러난다. 유가 강으로 변하는 것을 전진()이라 하고, 강이 유로 변하는 것을 후퇴(退)라 한다. 유는 전진하여 강으로 변하고 강은 후퇴하여 유로 변하니 역괘의 변화는 여기에서 밝게 드러난다.

 

是故剛柔相摩 八卦相盪 鼓之以雷霆 潤之以風雨 日月運行 一寒一暑 乾道成男 坤道成女

 

그러므로 강과 유가 서로 부딪치고, 팔괘가 서로 밀고 당겨서 천둥과 벼락으로 고동하고, 바람과 비로 적시며, 해와 달이 운행하여 한 번 추우면 한 번 더워진다. 건도는 남성을 이루고 곤도는 여성을 이룬다.

 

이 단락의 말은 위 문장과 서로 이어지고 서로 보완하여 의미를 밝혀주며, 나아가 역괘의 변화와 생성이 자연계 중의 천지만물의 변화와 생성에 일치하는 원리를 설명했다. 천지만물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처럼 역괘도 그렇게 변화하고 생성한다. 역괘의 변화 생성은 천지만물의 변화 생성을 모사한 것이다.

자는 계사전에서 윗 글을 잇는 작용을 하여, 앞에 제시한 원리로부터 뒤의 상황을 끌어냄을 나타낸다.

는 두 사물이 서로 마찰하고 부딪치는 것이다. ‘은 빙빙 돌며 격렬하게 밀어내는 것이니, 또한 의 의미가 있다. ‘이나 모두 운동, 변화, 발전을 말한 것이다. 운동 변화 발전을 말한 것은 곧 모순과 투쟁을 말한 것이다. 이 단락 전체는 자연계 만물의 생성을 설명했고 또 역괘의 생성을 설명했다. 자연계 만물의 생성 원리와 역괘의 생성 원리는 일치하기 때문에 둘을 묶어서 한꺼번에 설명한 것이다.

剛柔相摩 八卦相盪은 건곤 두 괘가 서로 부딪치고 밀어냄으로써 역의 64괘 전체를 생성함을 설명한 것이다. 건곤의 운동 변화가 괘를 생성하는 것은 마치 하늘과 땅이 서로 작용하고 해와 달이 운행하여 한서의 변화가 생기며, 우뢰와 번개의 고동을 거쳐서 바람과 비로 기르고 윤택하게 하며, 그리하여 만물을 생성하는 것과 같다.

乾道成男 坤道成女두 구절은 건곤 두 괘의 변화 발전이 64괘가 됨이 자연계의 만물 생성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미이다. 자연계의 만물은 천지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만물은 남녀로 나뉘며, 남녀는 64괘 중에서 바로 음양과 강유를 가리킨다. ‘건도성남 곤도성녀이 두 구절과 서괘전천지가 있고나서 만물이 탄생하였다, 계사전건곤은 역의 문, 건괘 단전곤괘 단전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이에 의지하여 비롯되도다, ‘지극하도다 곤원이여 만물이 그것에 의지하여 탄생하는구나 한 것은 의미가 서로 같지만, ‘건도성남 곤도성녀는 그것을 개괄하고, 간략하게 구체화시킨 것일 뿐이다.

특별히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주역󰡕이 자연계를 관찰할 때 우선 사계절의 변화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우뢰와 벼락’ ‘바람과 비는 사계절과 관련되고, ‘해와 달이 운행하고 추위와 더위가 갈마든다도 사계절과 관련된 것이다. 󰡔주역󰡕에서 천지의 변화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대체로 사계절을 강조하지 않는 때가 없다. 계사전에서 점치는 법을 설명할 때, ‘네 개씩 헤아림으로써 사계절을 상징하고라 하고, 건책(乾策)과 곤책(坤策)‘360은 일주하는 날 수이다라 한 것은 모두 사계절을 설명한 것이다. 󰡔주역󰡕은 사계절의 변화로써 천지만물의 변화를 대표하였다. 공자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사계절이 운행하고 만물이 자라니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라고 하여 󰡔주역󰡕의 사상과 딱 들어맞는다. 이것은 󰡔역대전󰡕의 사상이 공자로부터 나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乾知大始 坤作成物 乾以易知 坤以簡能. 易則易知 簡則易從. 易知則有親 易從則有功. 有親則可久 有功則可大. 可久則賢人之德 可大則賢人之業. 易簡而天下之理得矣 天下之理得 而成位乎其中矣.

 

건은 위대한 창조를 맡고 곤은 만물을 완성시킨다. 건은 쉬움()으로써 창조를 맡고, 곤은 간단함()으로써 완성할 수 있다. 쉬우면 알기 쉽고 간단하면 따르기 쉬우며, 알기 쉬우면 친숙해지고 따르기 쉬우면 공적이 있게 된다. 친숙하게 되면 덕이 오래갈 수 있고 공적이 있게 되면 사업이 커질 수 있다.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어진이의 덕이요 커질 수 있는 것은 어진이의 사업이다. 쉽고 간단해서 천하의 이치가 얻어지니 천하의 이치가 얻어지면 올바른 자리가 그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天尊地卑 乾坤定矣에서 이 단락까지가 제1장이다.

1장 전체는 모두 건곤 두 괘를 설명하였고, 건곤 두 괘의 지위, 생성, 작용, 특성 및 사람들이 어떻게 건곤을 본받을 것인가를 설명하였으며, 건도와 곤도로써 자기의 행동을 바르게 이끄는 문제를 설명하였다. 이 마지막 단락의 내용도 건의 덕과 곤의 덕을 설명하고 있으니, 곧 건곤 두 괘의 특성 및 사람들이 어떻게 건곤을 본받아서 실천할 것인가를 설명한 것이다.

乾知大始 坤作成物자는 주도하다() 관장하다()로 풀이해야 한다. 만물을 생성하는 문제에서 건은 굳건하고() 능동적임으로써() 사물의 시초를 주도하니, 건괘 단전에서 말한 만물이 이것에 의지하여 비롯된다는 것은 만물의 생성이 건을 통하여 시작된다는 것이다. 곤은 순종하고() 수동적임으로써() 사물의 완성을 담당하니, 곤괘 단전에서 말한 만물이 이것을 근거로 생장한다는 것은 만물이 결국 곤에서 생장 완성된다는 것이다.

乾知大始 坤作成物은 역괘에서 말하면 건곤 두 괘가 나머지 62괘를 생성하는 것이고, 자연계에서 말하면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점을 둔 것은 건곤이 62괘를 생성함이나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문제에 있지 않고, 건곤이 62괘를 생성하거나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건과 곤, 천과 지의 역할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지적한 데 있다. ‘乾知大始 坤作成物두 구절은 이미 건이나 천의 작용은 만물을 낳음(始物)’이고, 곤이나 지의 작용은 만물을 키움(成物)’이라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아직 부족하여 乾以易知 坤以簡能을 덧붙였다. 이 두 구절은 건과 곤의 특성을 드러낸 것이다. 쉬움()과 간단함()은 각각 건과 곤의 특성이다.

무엇이 쉬움()인가? 쉬움의 반대는 어려움이다. 쉬움은 바로 어렵지 않음이다.

乾以易知자는 여기에서 사태의 시초(開頭)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건은 쉬움의 특성을 가지고, 만물(곧 모든 괘) 창조를 시작하니, 매우 용이하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건이 쉬움의 특성을 갖는 근본적 원인은 쉬지않고 활동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건은 끊임없이 활동하기 때문에 주관적 의도가 없다. 건은 주관적 의도가 없기 때문에 만물(모든 괘)을 창조할 때 목적이 없다. 완전히 자연적이다.

무엇이 간단함()인가? 간단함의 반대는 복잡함이다. 간단함은 복잡하지 않음이다.

坤以簡能자는 여기에서 만든다()로 이해할 수 있다. 일을 완성함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곤은 간단함()’의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만물(모든 괘)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매우 간단하여 번잡하지 않을 수 있다. 곤이 간단함의 특성을 갖는 근본적 원인은 건을 따르는 성질에 있다. 왜냐하면 곤은 건을 따르기 때문에, 건은 주관적 의도가 없고, 곤도 주관적 의도가 없으며, 건은 목적이 없고, 곤도 목적이 없다. 건이 이미 일을 시작하면 곤은 순응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결코 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으니 어찌 간단함이 아니겠는가.

건의 쉬움과 곤의 간단함을 합하여 보면 저절로 그러하다’(自然)는 의미다. 건과 곤의 만물(모든 괘) 창생은 전혀 지능을 쓸 필요도 없고, 기력을 쓸 필요도 없이 자연히 만물을 낳고 만물을 완성한다. 한강백의 주에서 천지의 도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나(不爲) 잘 시작하고 애쓰지 않으나(不勞) 잘 완성하므로 쉽고 간단하다(易簡)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한씨의 설명은 기막히게 핵심을 찔렀고 실상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다(不爲)’ ‘애쓰지 않는다(不勞)’는 것은 󰡔노자󰡕천도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음이 없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사상은 󰡔노자󰡕와 다르다. 󰡔노자󰡕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여 사람을 자연상태로 끌고 들어가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계사전에서 건곤의 에 대한 이 해석은 비록 건곤이 자연무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또 자연무위를 긍정하지만, 계사전의 출발과 귀결은 인간을 자연상태로 끌어가서 되돌아올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계사전은 인간이 천지간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주관능동 작용을 중시하기 때문에 건곤의 쉬움과 간단함을 다 말한 뒤에 다시 인간과 인간의 사업으로 마루리하였다.

사람이 건곤의 쉽고 간단함을 본받으면 쉽게 알고(易知)’ ‘쉽게 따르며(易從)’, 쉽게 알고 쉽게 따르면 친함이 있고(有親)’ ‘공적이 있으며(有功)’, 친함이 있고 공적이 있으면 오래갈 수 있고(可久)’ ‘커질 수 있으며(可大)’, ‘오래 갈 수 있으면’ ‘현인의 덕이 되고, ‘커질 수 있으면’ ‘현인의 공적이 된다.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문제는 쉬우면 쉽게 알고 간단하면 쉽게 따른다(易則易知 簡則易從)’이고, 인류가 건곤의 쉽고 간단함을 본받는 것은 같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해와 친근, 복종과 참여를 얻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도덕과 사업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이와 같이 쉽고 간단함(易簡)의 본뜻을 이해하고 아울러 사업에 잘 응용할 수 있으면 바로 천하의 이치를 얻은 것과 같으며, 또한 천지 사이에 우뚝 서서 천지와 대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

 

2

 

聖人設卦觀象繫辭焉而明吉凶 剛柔相推而生變化. 是故吉凶者失得之象也 悔吝者憂虞之象也 變化者進退之象也 剛柔者晝夜之象也. 六爻之動 三極之道也.

 

성인은 괘를 베풀고 상을 살피고 말()를 달아서 인간사의 길흉을 밝혔다. 괘의 양효()와 음효()가 서로 밀쳐서 변화를 낳는다. 이런 까닭으로 길흉이라는 것은 잃고 얻음의 상이다. 뉘우치고 부끄러워 하는 것(悔吝)은 근심하고 두려워함의 상이다. 변화라는 것은 나아가고 물러남의 상이다. 강유라는 것은 낮과 밤의 상이다. 육효가 강에서 유로 유에서 강으로 변동함은 천인 삼극(三極)의 도이다.

 

이 단락부터 是以自天祐之 吉無不利까지가 제2장이다.

2장에는 큰 두 단락의 문장이 있다. 이 두 단락의 문장은 제1장에서 역 전체의 형성과정에 건곤 두 괘가 일으키는 중대한 작용을 밝힌 것에 기초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역괘 형성의 기본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聖人設卦觀象繫辭焉而明吉凶 剛柔相推而生變化두 구절은 단락 전체의 제목에 해당하며, 또한 문제를 제시한 것이고, 다음의 몇 구절은 이 제목을 해설한 것이다. 역을 만든 사람은 먼저 괘를 세웠으니 곧 64괘의 획을 그렸다. 예를 들면 건괘는 건상건하로 그리고, 곤괘는 곤상곤하로 그리며, 둔괘는 감상진하로 그리고, 몽괘는 간상감하로 그린다. 그 다음은 괘획 속의 상을 관찰한다. 마지막으로 말을 붙이니 괘와 효 아래에 문자를 달아서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이 괘와 효 아래 붙은 말을 보고 길흉을 알 수 있게 하였다.

剛柔相推而生變化의 강유는 괘 속의 음효와 양효이며, 음양과 강유는 본래 같은 것이다. 의 측면에서 보아 음양이라 하고, 의 측면에서 보아 강유라 한다. 괘 속의 효는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당연히 질의 측면에서 보며, 강유라고 말하고 음양이라고 하지 않는다. 괘사와 효사에서 효를 말할 때는 모두 강유라 하고 절대로 음양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64괘 가운데는 음양개념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강유가 곧 음양임을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강유는 서로 밀치니양효는 발전하여() 에 이르면 물러나고(退), 물러나서 에 이르면 변하여 음이 된다. 음효는 물러나서 에 이르면 나아가고, 나아가서 에 이르면 변하여 양이 된다. 음효와 양효는 이렇게 일진일퇴하니 이것이 바로 강유상추이다. ‘강유상추하여 변화를 일으킨다.

역의 변화두 글자와 오늘날 일상어인 변화와는 서로 같은 의미도 있고 다른 의미도 있다. 오늘날 쓰이는 단어 변화는 대체로 한 사물이 변화하여 다른 사물이 되거나 한 사태가 변하여 다른 사태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역의 변화두 글자도 오늘날 쓰이는 변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좁게 한정된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에서 변화는 양효(剛爻)가 변하여 음효(柔爻)로 되고, 음효가 변하여 양효로 되는 그 변화과정 자체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강유가 확정되지 않은 어떤 상황을 가리킨 것이다.

聖人設卦觀象繫辭焉而明吉凶 剛柔相推而生變化라는 이 두 구절은 실제로 괘효의 네가지 형상을 제시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64384효의 상이 비록 다종다양하지만 개괄하면 네 종류에 지나지 않으니, 바로 길흉(吉凶) 회린(悔吝) 강유(剛柔) 변화(變化). 맨 첫 구절의 而明吉凶은 실제로 悔吝을 내포하고 있다. 길흉과 회린은 인간사를 말한 것이고, 강유와 변화는 괘를 말한 것이다.

是故吉凶者失得之象也 悔吝者憂虞之象也 變化者進退之象也 剛柔者晝夜之象也라는 네 구절은 네가지 종류의 상의 의미를 더 자세히 말한 것이다.

길흉은 화복이 아니다. 󰡔주역󰡕은 길흉을 말하지 화복을 말하지 않는다. 화복을 말하는 것은 숙명론적 사상의 표현이다. 󰡔주역󰡕은 인간의 주체적 노력을 말하지 숙명론을 말하지 않는다. 길은 사업의 성공이니 곧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흉은 사업의 실패니 곧 잃는다()고 하는 것이다. 길흉과 득실은 미리 정해진 것에 따르지 않고, 전적으로 주체적 노력 여부의 결과이다. 󰡔주역󰡕은 상으로 사상을 표현하며, 상은 가장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사업의 득실은 괘의 길흉으로 표상하여 드러낸다. 괘의 길한 상을 보고 이득이 있을 것을 알며, 괘의 흉한 상을 보고 손실이 있을 것을 안다.

는 걱정스레 따져보는 것(憂慮)이고 는 조심스레 재어보는 것(虞度)이다. ‘憂虞는 주저하면서 결정하지 못함이니, 바로 길흉이 정해지지 않고 득실이 판단되지 않는 때다. 이러한 상태를 괘의 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悔吝이다.

은 길과 흉 둘 사이에 놓인다. 길과 흉은 두 극단이고, 회린은 그 사이에 있다. 회는 흉에서 길로 옮겨 가고 린은 길에서 흉으로 옮겨 간다. 사람이 걱정스럽고 괴로우며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반드시 우려하게 되지만, 우려는 곧 을 얻을 가능성을 가진다. 사람이 안락하고 멋대로 할 때 반드시 허물을 후회하게() 되므로, 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요약하면 는 길이 자라는 것이고, 은 흉이 자라는 것이다. 길흉과 회린 이상은 인간사를 말하였고, 강유와 변화 이하는 괘를 말하였다.

變化者 進退之象也변화는 무엇인가? ‘변화는 강이 유로 변하고 유가 강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진퇴는 무엇인가? ‘진퇴는 강유의 진퇴이다.

변화는 곧 괘에서 강유의 진퇴이다. 유의 본성은 물러남(退)이고, 이 이미 노성하여 다시 더 물러날 수 없으면 문득 나아가 이 되고 강이 된다. 이것이 곧 물러남(退)이고 또한 바뀜()이다. 강의 본성은 나아감()이니 가 이미 노성하여 다시 더 나아갈 수 없으면 문득 물러나 을 이루고 유가 된다. 이것이 곧 나아감()이며 또한 됨()이다. 변화는 바로 강유의 진퇴이고, 강유의 진퇴는 강유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이다.

剛柔者晝夜之象也주야는 일종의 비유며, ‘진퇴와 서로 대응한다. ‘진퇴는 바로 변화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고, 주야는 강이 유로 변하고 유가 강으로 변하여 이미 확정된 사실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니 낮과 밤이 분명히 구별되는 것과 같다. 변화를 말한 것은 강유가 바로 진퇴 미정임을 드러낸 것이고, 강유를 말한 것은 변화가 이미 확정되었음을 드러내니, 유는 이미 변하여 강이 되고 강은 이미 화하여 유가 된다.

강유와 변화의 관계는 112시진 가운데 자오(子午)와 묘유(卯酉)의 네 시진을 가지고 비유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는 한밤중이므로 밤임에 틀림없고, 음이며 유이고, 이것은 확정적이다. 는 한낮이므로 낮임에 틀림없고, 양이며 강이다. 이것은 확정적이다. 이른바 剛柔者 晝夜之象也라는 것이다. 는 해뜨는 시각이니 밤유가 낮강으로 해가는 과정에 있다. 강인지 아닌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는 해지는 시각이니 낮강이 밤유로 해가는 과정이며, 유인지 아닌지는 역시 확정되지 않았다. 이른바 變化者進退之象也라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강유와 변화의 관계는 길흉과 회린의 관계와 흡사하다. 길흉은 확정된 양끝이고 회린은 중간에서 길이나 흉으로 나가는 도중이다. 강유는 확정된 양끝이고 변화는 중간에서 유가 변하여 강이 되고 강이 변하여 유가 되는 과정에 있다.

六爻之動 三極之道也라는 한 구절은 위 문단의 결론이다. 六爻의 강유가 상호 작용하여(相推) 유가 변하여 강이 되고 강이 화하여 유로 되니, 모두 변동()이다. 6효는 물론 이렇게 운동하지만 모두 삼극(三極)의 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삼극은 괘 속의 천인 삼재(三才). 첫째와 둘째 효는 가 되고, 셋째와 넷째는 이 되고, 다섯째와 맨 위는 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주역󰡕이 이미 인간 자신을 천지 자연으로부터 분리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두고 천지와 나란히 일컬어 삼재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참으로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是故君子所居而安者易之序也 所樂而玩者爻之辭也. 是故君子居則觀其象而玩其辭 動則觀其變而玩其占 是以自天祐之 吉无不利.

 

이런 까닭으로 군자가 편안하게 따르는 것은 역의 순서이며, 즐겁게 보는 것은 효의 사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편안하게 쉴 때는 상을 살펴서 사를 보고, 일이 있어 움직일 때는 변하는 것을 살펴서 점을 본다. 이런 까닭으로 하늘이 도와서 길하고 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이 한 단락은 사람들이 어떻게 󰡔󰡕을 배울까 하는 문제를 설명하였다.

역을 어떻게 배울까 하는 문제는 사람들이 을 배울 때 마땅히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점을 지시한다. 하나는 󰡔󰡕의 순서에 편안히 따르고 즐거이 효사를 완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소 집안에 쉬면서는 을 보고 를 음미하며, 일을 벌여 활동할 때는 을 보고 을 음미하는 것이다. 앞뒤의 두 자는 의미가 다르다. 앞의 자는 활동함과 쉼(起居)자가 아니고, ‘居仁由義로서, 요컨대 몸이 자리잡은 곳(객관적 처지, )을 말한다. 뒤의 는 활동()에 대비되는 안정()을 말한 것으로 평상시라는 의미다.

󰡔󰡕의 순서는 곧 64괘의 차례이고, 차례란 시간의 차례다. 64괘의 배열 순서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괘는 한 시대를 대표한다. 한 시대는 한 시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비괘는 천지가 끊긴 상황이며, 꽉막혀 통하지 않는 시대이다. 군자는 비괘의 시대를 당하여서는 반드시 덕을 지키고 난을 피하여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 실천하고 처지에 편안해야 한다.

君子所居而安者 󰡔󰡕之序也이 한 구절은 실제로 군자가 󰡔󰡕을 배울 때, 우선 한 괘의 상황적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정확하게 대응해야 하며 , 그런 다음에는 괘 속의 각 효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所樂而玩者爻之辭也은 깊이 음이함(玩味), 깊이 사색함(玩索), 반복적 사색, 끝없는 연역(演繹)이다.

왜 효사만 말하고 괘사는 말하지 않았는가? 첫째 앞의 문장 所居安者󰡔󰡕之序也라는 말이 사실상 괘사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 하면 󰡔󰡕의 차례는 곧 괘의 차례를 말한 것이고, 괘의 차례를 말한 것은 괘를 말한 것이며, 괘를 말하는 것은 괘사를 떠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로 괘는 효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그 때문에 괘사는 훨씬 간단하여 파악하기 쉽다. 효는 괘에 비하여 변동이 미정이고, 그 때문에 효사의 상은 복잡한 경우가 많다. 그 의미는 하나가 아니어서 반복하여 생각하고 음미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의 차례에 편안히 따르고 효사를 사색하는 것은 󰡔󰡕을 배우는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는 한 측면이다.

위에서 효사를 음미하라는 것은 중점이 괘와 효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대응해야 함을 명확하게 지적하려는 데 있다. 괘에서는 편히 따라야 하고 효에서는 음미해야 한다. 여기서 를 음미하라는 것은 핵심이 에 대해 어떻게 달리 대응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다. ‘居則觀其象而玩其辭는 평상시에 일이 없으니 점을 치지 않고, 을 보고 를 음미한다는 것이다. 상은 괘상과 효상을 포괄하고, 사는 괘사 효사를 포괄한다. 상은 사와 견주어 보면 차이가 있지만 실제는 같다. 둘은 모두 괘효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다.

왕필은 말은 상을 밝히는 것이다라 하고, 상은 뜻을 표현해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은 의미를 드러내고 사는 상을 드러내며, 상은 저절로 분명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자세한 관찰이 필요하다. 도 깊이 숨겨진 뜻이 많아 반드시 반복하여 음미하는 데 힘써야 한다. 상을 보고 사를 음미함은 모두 괘효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므로 상을 보는 것과 말을 음미하는 것은 실제로 서로 관통하여 틈이 있을 수 없다.

평상시 무사할 때는 상을 보고 말을 음미할 수 있고, 일이 있어 점을 쳐야 할 때는 변화()를 보고 점을 음미한다’. 를 포괄하므로 변은 곧 변화다. 변화는 바로 진퇴며, 진퇴는 바로 강이 화하여 유가 되고 유가 변하여 강이 되는 과정이다. 󰡔주역󰡕은 효의 변화를 점치니 곧 을 점치고, 변하지 않는 효를 점치지 않으니 곧 은 점치지 않는다. 은 변효이다. 로 변할 수 있으니 강이 변하여 유가 되는 것이고, 은 변하여 이 될 수 있으니 유가 변하여 강이 되는 것이다.

평상시 편안히 쉴 때()는 상을 보고 사를 음미한다는 것은 자유로이 아무 괘나 효의 상과 말을 보고 음미하는 것으로 꼭 어떤 괘효를 지적하지 않는다. 만일 일을 벌이고 행동을 하고자 한다면 행동할 때는() 변괘를 보고 점을 음미해야 하니’, 6효가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변화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가 마땅히 어떻게 행사할까 하는 답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의 괘사나 효사를 확정하여 행동의 지침으로 삼고, 이모저모 생각하고 음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玩其占자는 옛사람들이 보통 괘사나 효사 중의 길흉과 회린으로 이해하였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가리키는 것은 변괘를 관찰함으로써 자기 행동 지침을 확정해주는 그 하나의 괘사와 효사이다. 물론 그 말 가운데 길흉이나 회린과 같은 글자가 있든 없든 모두 점이다.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하다. 반드시 이렇게 보아야 설명이 잘 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흉이나 회린과 같은 글자가 없는 괘효사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는가.

是以自天祐之 吉無不利이 두 구절은 전체 단락을 종합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점치는 목적은 길을 좇고 흉을 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앞에 말한 두 측면의 조건에 근거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조건이 허락하는 상황에서 최대한 주체적 노력을 다하고, 이룰 것은 모두 이루고 피할 것은 모두 피하여 결과적으로 불길하거나 불리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옛사람들은 점치는 측면에서 보아 하늘의 도움(天祐)’라고 부르는데, 사실은 모두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 있다.

 

3

 

彖者言乎象者也 爻者言乎變者也. 吉凶者言乎其失得也 悔吝者言乎其小疵也 无咎者 善補過也

 

단사는 상을 말한 것이고, 효사는 변화()를 말한 것이다. 길흉은 잃고 얻는 것(득실)을 말한 것이다. 뉘우치고 후회한다(회린)는 것은 조그만 허물을 말한 것이다. 허물이 없다(무구)는 것은 허물을 잘 보완한 것이다.

 

여기에서 各指其所之까지는 제3장이다.

3장도 계속하여 괘를 설명하고 효를 설명하며, 길흉을 설명하고, 회린을 설명한다.

彖者言乎象者也 爻者言乎變者也은 단사니, 단사는 곧 괘사다. 괘사는 한 괘의 상을 판단한 것이니 한 괘의 전체적인 설명이다.

는 효사이며, 효사는 한 효의 상을 설명한다.

한 괘는 한 시대를 반영한다. 한 시대의 특성은 한 괘의 괘상에서 표현되고, 한 괘의 괘상은 한 괘의 괘사로 설명된다. 한 효는 한 시대 중의 한 발전단계를 반영하며, 한 괘의 6효는 여섯 단계의 발전단계를 반영한다. 한 발전단계의 특징은 한 효의 효상으로 표현되고, 한 효의 효상은 한 효의 효사로 설명된다. 왕필이 괘는 때()이다. 효는 때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卦者時也 爻者適時之變也)”라고 하여, 괘와 효의 차이를 밝힌 것은 매우 정확하다. 괘는 주로 시대를 표현하고, 효는 주로 한 시대 내용의 각 단계 변화를 표현한다. 한 괘 안에서 괘는 상대적으로 안정 불변이고 효는 변한다. 그러나 64괘 전체에서는 64괘가 더욱 큰 하나의 발전과정이고, 각각의 한 괘는 모두 이 큰 발전과정 중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괘도 변화를 말한 것이다.

괘는 상이 있고, 효도 상이 있다. 마땅히 효도 상을 말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卦者言乎象爻者言乎變은 호응하는 글자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괘에 대하여만 말하였기 때문에 괘에서 을 강조하고, 효에서 을 강조하였다.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괘상 속에 효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으니, 변도 일종의 상이라는 점이다.

吉凶者言乎其失得也 悔吝者言乎其小疵也 无咎者善補過也이 몇 구절의 의미는 사를 음미()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데 있고, 사람들이 사를 음미할 때 길흉회린무구와 같이 괘사 효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알리는 데 있다.

길흉 회린무구는 근본적으로 잃음과 얻음(失得) 두 방향을 벗어나지 않으며, 다만 정도가 다를 뿐이다. 길흉은 크게 얻고 잃는 것이다. 회린은 작은 흠이고, 작은 흠은 작은 문제이며, 가벼운 병이다. 작은 흠은 결국 작은 허물이고, 작은 잘못이다.

는 뉘우쳐 고친다는 뜻이다. 뉘우쳐 고쳐서 으로 나가는 것은 좋은 일인데 어째서 작은 흠이라고 하는가? 그가 뉘우쳐 고치는 까닭은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잘못이 있으나 좋은 방향으로 바로잡을 줄 알기 때문에 작은 흠이라고 한다. 잘못이 있으나 고칠 줄 알아서 점점 허물 없음(무구)에 이를 수 있으므로 허물 없음(無咎)은 뉘우침()보다 나은 상태다.

무구는 사실 본래 허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허물을 잘 보완하여 허물 없는 데에 도달한 것이다. 허물 없음(無咎)과 뉘우침은 서로 긴밀하다. 괘사는 뉘우침은 말하지 않고 무구를 말하지만, 무구는 뉘우침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무구를 말하면 뉘우쳤음를 알 수 있다. 󰡔주역󰡕 가운데 또 누구를 탓할까(又誰咎)’란 말이 있고, ‘탓할 수 없다(不可咎)’란 말이 있다. ‘又誰咎는 사실 허물은 스스로 만든 것이어서 결과를 자기가 책임져야 하며, 다른 사람이 꼭 탓하지 않더라도 자기의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는 의미다. ‘不可咎는 잘못이 재주와 슬기의 부족 때문에 생긴 것이어서 양해할 수 있으므로, 비록 허물이 있으나 꼭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 흉은 서로 연결된다. 은 마땅히 뉘우쳐야 할 것인데 뉘우치지 않으니, 계속 발전해 가면 반드시 흉에 이르지만 아직은 흉에 이르지 않은 것이므로 작은 흠이라고 한다. 괘사에서는 흉을 말하고 린을 말하지 않았으니, 린은 작은 흠이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是故列貴賤者存乎位 齊小大者存乎卦 辯吉凶者存乎辭 憂悔吝者存乎介 震无咎者存乎悔. 是故卦有小大 辭有險易 辭也者 各指其所之.

 

이런 까닭으로 귀한 것과 천한 것을 벌여 놓는 것은 육효의 놓인 자리에서 드러나고, 작고 큰 것을 가리는 것은 괘에 있으며, 길흉을 판별하는 것은 사에 있다. 뉘우침과 후회를 근심하는 것는 선악을 구별하는 데 있고, 두려워해서 허물이 없는 것은 뉘우침에 있다. 이런 까닭으로 괘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으며, 사에는 까다롭고 쉬운 것이 있다. 사라는 것은 각각 그 갈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역󰡕은 귀천을 중시한다. ‘列貴賤者存乎位는 귀천의 구분이 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6효의 위치다. 6효는 아래에서 위로 가며, 위에 있는 것은 귀하고, 아래 있는 것은 천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효의 지위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위는 귀하고 아래는 천하다는 일반적 원칙 말고도 강유왕래(剛柔往來), 상하내외(上下內外), 득위(得位)와 실위(失位), 호응(互應)과 불응(不應) 등등이 모두 귀천을 표현할 수 있다.

齊小大者存乎卦의 요점은 小大이다. 작고 큼(小大)은 무엇을 가리켜서 한 말인가? 옛사람들의 설명은 같지 않다. 한강백의 주에서는 그 도가 광명하여 크다() 하고, 군자의 도가 줄어들어 작다() 한다고 설명하여, 󰡔주역󰡕에서 군자의 도와 군자의 덕을 크다 하고, 소인의 도와 소인의 덕을 작다고 한 의미로 풀이하였다. 이 해석이 정확하여 따를 만하다. ‘는 한강백의 주에 말로 분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齊小大는 작고 큰 것을 가리는 것이고, 군자의 도와 소인의 도를 분변하는 것이다. ‘齊小大者存乎卦는 작고 큰 것의 구분이고, 군자의 도와 소인의 도의 구분이며, 괘 속에서 보아야 한다. 괘는 곧 괘사며, 괘사는 음양을 통하여 작고 큼의 차이를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음의 도는 소인을 대표하고, 양의 도는 군자를 대표한다.

辯吉凶者存乎辭는 효사다. 앞 문장에서 말한 작고 큼을 가리는(齊小大)’ 문제는 괘사로부터 본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길흉을 판별하는(辯吉凶)’ 문제는 효사에서 본 것이다. 길흉의 문제는 귀천 소대(소대)의 문제에 비하여 복잡하다. 귀한 것도 길이 있고 천한 것도 길이 있다. 작은 것도 흉이 있으며 큰 것도 흉이 있다. 그러므로 효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길흉이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는다.

憂悔吝者存乎介悔吝은 길흉 사이에 자리잡는다. 길흉보다 미소하나 장차 변하여 길흉이 된다. 사태가 결국 흉의 상황으로 발전해가지 않도록 하려면 반드시 의 상태에서 일찍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야 한다. 이것을 存乎介라고 한 것이다. ‘는 실낱, 미세함의 뜻이다. 회린은 길흉의 미세함이고, 여기에서 말한 는 더 들어가서 회나 린으로 갈리는 미세한 실마리이다. 회린이 아직 싹이 트는 상태에 있을 때 기미를 살피고, 우려하고 예방하여 회린으로 커지지 못하도록 한다.

震无咎者存乎悔에서 은 두려워 떠는 것이다. 두려워하여 허물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은 뉘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無垢는 본래 허물이 있는 것이다. 허물 있는 것을 바꿔서 없도록 하려면 유일한 방법이 뉘우칠 줄 아는 것이다. 뉘우칠 줄 알면 허물을 없앨 수 있고, 뉘우칠 줄 알면 앞의 잘못을 소급하여 뉘우쳐서 기꺼이 고친다.

是故卦有小大 辭有險易. 辭也者 各指其所之는 괘의 작음과 큼(小大)을 군자 소인이란 측면에서 갈라낼 수 있고, 음양의 측면에서 갈라낼 수 있으므로, 둘은 일치하는 것이다. 실제로 좋은 괘는 대개 군자의 도를 반영한 괘이고, 양이 중심이 되는 괘다. 예를 들어 태괘(), 복괘(), 대유괘(大有)와 같은 것으로, 이 괘들은 모두 크다. 좋지 않은 괘는 대개 소인의 도를 반영하고, 음을 위주로 하는 괘로서 박괘() 비괘() 곤괘() 같은 것이니 곧 작다.

辭有險易는 괘사와 효사를 포괄한다. 괘사와 효사가 명백하고 구체적이고 뚜렷하며 깨치기 쉬운 것을 라고 부르고, 기이하고 구석지며 어렵고 깊어 알기 어려운 것을 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괘가 크면 말이 쉽고, 괘가 작으면 말이 험하다. 예를 들어 복괘() 六二休復吉’(아름답게 돌아오니 길하다) 이라는 말은 평이하고 명백하나, 곤괘() 上六困于葛얼올’(칡덩굴에 얽힌듯 불안 속에서 어려워한다) 라는 말은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괘의 대소를 막론하고, ()이 쉽고 어려운 것은 모두 군자에게 경계하고 힘쓰게 하며 소인에게 권장하고 독려하는 것이다.

辭也者 各指其所之所之(나아갈 방향)’는 실제로 좇는 것과 피하는 것, 두 방향이다. 말이 어렵고 쉬움은 각각 갈 곳을 가리키니’, 이것은 곧 괘사나 효사가 쉬울 때() ‘갈 방향()’은 평상()으로 돌아가서 사람에게 을 좇도록 하고, 괘사나 효사가 어려운 때 갈 방향으로 가서 사람에게 흉을 피하도록 한다. 흉을 피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로 돌아가도록 지시하는 것이다. 이미 작고 큼의 분별이 있으니 군자는 괘의 상을 보아서 편안히 따르는 것이 늘 같을 수 없다. 이미 말의 어렵고 쉬움의 차이가 있으니 군자는 괘와 효의 말을 음미하여 즐기는 것도 한 가지일 수 없다.

 

4

 

易與天地準 故能彌綸天地之道.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知幽明之故.

 

역은 하늘과 땅에 맞먹는다. 그러므로 천지의 도를 망라한다. 위로 우러러서는 천문을 보고 아래로 구부려서는 지리를 살핀다. 그러므로 음미한 것과 드러난 것(幽明)의 근원을 안다.

 

여기서부터 故神無方而易無體까지가 제4장이다.

이 장은 거시적 관점에서 󰡔주역󰡕이란 위대한 저작의 사상적 폭과 깊이 및 철학적 의의를 논술하였다.

易與天地準자를 주희는 대등하다()’로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역여천치준의 뜻은 󰡔주역󰡕이라는 책과 천지는 대등하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역󰡕이란 책은 천지의 법칙에 비추어서 만든 것이고, 천지의 복사본이다. ‘그러므로 천지의 도를 망라한다’.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之理 是故知幽明之故에서 는 무엇인가? ‘(쓰다, 이용하다)이다. 무엇을 쓰는가? 󰡔󰡕을 쓴다. 왜냐하면 󰡔󰡕천지의 도를 망라했기때문이다. 옛사람이 말한 천문은 해별을 가리키며, ‘지리라고 한 것은 산과 내, 언덕과 구릉을 가리킨다. 별의 운행에 따라 흐리고 맑고 춥고 더움이 생기며, 산과 내, 언덕과 구릉이 길러주기 때문에 새와 물고기, 동식물이 있다.

는 깊숙이 숨은 것이니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은 밝게 드러남이니 보아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幽明은 전반적으로 만물의 생생변화 속에 나타나는 두 가지 상황을 가리킨다.

는 원인이다.

知幽明之故는 만물의 생생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상황의 근본 원인은 하늘과 땅이 만물을 시작하게 하고(資始) 생장하게 하는(資生) 변화를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Posted by 샤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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