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문

 

󰡔주역전해󰡕󰡔역경󰡕󰡔역대전󰡕 전체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처음에는 직접 쓰면서 이 책을 통해 내가 몇 십년 동안 󰡔주역󰡕을 연구한 성과를 드러내려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나이가 이미 87세여서 오랜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일하면서 체력이 이기지 못할까 매우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내 조수 여소강呂紹綱 동지와 함께 일하기로 협의하여 원고는 여소강동지가 쓰고 나는 겨우 글을 빼고 다듬는 일과 마지막으로 원고를 확정하는 일을 떠맡았다.

내가 몇 십년 동안 해 온 󰡔주역󰡕 연구에 어떤 깨달음이 있는가? 이 책 속에는 어떤 특징이 드러나는가? 여기서 몇 가지를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1. 가장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이 책의 해설은 공자가 󰡔역대전(易大傳)󰡕을 지으면서 열어 놓은 길을 정성을 다해 힘써 지키고 있다. 이 점은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는 것을 결코 부인하지는 않지만 착안점은 오히려 점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사상에 있다. 몇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미신을 널리 알리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진리를 널리 알려야 하며, 마르크스주의를 널리 알려야 한다.

2. 공자의 󰡔역대전󰡕에 대한 앞 사람들의 이해는 내가 보기에는 매우 부족하며 계사전에 대한 이해 또한 잘못이 많다. 예를 들어 보자. 󰡔주역󰡕에서 점치는 일과 괘 두 가지는 똑같이 중요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점치는 데서 괘가 나오기 때문에 점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예전 사람들은 󰡔󰡕이라고 할 때 대부분 괘를 보았을 뿐 점치는 것을 가지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문제는 결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계사전속에서는 두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점치는 법을 말하면서 이런 까닭에 4번의 절차를 거쳐 역을 이루며, 18번 변하여 괘를 이룬다(是故四營而成易 十有八變而成卦)”고 하였다. 둘째는 본래 󰡔󰡕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夫易何爲者也)”라고 하면서, “이런 까닭에 점치는 풀의 덕은 원만하고도 신묘하며, 괘의 덕은 바르고 지혜롭다.……신묘하기 때문에 올 것을 알고, 지혜롭기 때문에 지나간 것을 담고 있다(是故蓍之德而神 卦之德方以知……神以知來 知以藏往)”고 하였다. 설괘전說卦傳에서는 또 옛날에 성인이 󰡔󰡕을 만들 때는 神明한 데서 슬며시 도움을 받아 점치는 풀을 내었다. 하늘을 셋으로 하고 땅을 둘로 하여 를 세웠다. 음양에서 변화를 살펴 괘를 세웠다. 굳센 것과 부드러운 것에서 발휘하여 를 내었다(昔者聖人之作易也 幽贊於神明而生蓍 參天兩地而倚數 觀變於陰陽而立卦 發揮於剛柔而生爻)”고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역대전󰡕 속에서 이미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다만 사람들이 보고서도 그냥 지나쳐버렸을 뿐이다. 내가 일찌기 1939년에 󰡔역통易通󰡕을 쓸 때 이 문제를 깊이 얘기했는데,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내 입장이 옳다고 믿고 있다.

3. 전해 오는 계사전가운데 점치는 법을 말하는 어떤 부분은 뒤섞인 곳도 있고 빠진 글자도 있다. 뒤섞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송나라 사람 정이, 주희朱熹, 항안세項安世가 알아차리고서 바로 잡아 놓았다. 빠진 글자에 대해서는 오랜 전 부터 말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경방京房, 마융馬融, 순상荀爽, 정현鄭玄, 요신姚信, 동우董遇로부터 주희에 이르기까지 모두 大衍50(大衍之數五十)”을 아주 잘못 풀이했다. 사실 大衍之數五十은 마땅히 대연의 수 55(大衍之數五十有五)”가 되어야 하며 끝에 有五두 글자가 빠졌다. 매우 분명하게 윗 문장은 하늘은 1 땅은 2, 하늘은 3 땅은 4, 하늘은 5 땅은 6, 하늘은 7 땅은 8, 하늘은 9 땅은 10이다. 하늘의 수가 다섯이고 땅의 수도 다섯이다(天一地二 天三地四 天五地六 天七地八 天九地十 天數五 地數五)”에서부터 본래 하늘과 땅의 수는 55이다. 이 때문에 변화를 이루고 귀신의 일을 행한다(凡天地之數五十有五 此所以成變化而行鬼神也)”까지의 한 덩어리 글이 바로 이 대연의 수가 만들어지는 설명이다. 그렇지 않다면 五十이라고 한 것이 근거가 없게 되고 앞의 한 덩어리 글도 군더더기 말이 되어 반드시 헛 일이 되고 만다. 이 문제는 1939년에 내가 󰡔역통󰡕을 쓸 때 이미 내 놓았다. 그리고 1955년에 󰡔역론易論󰡕을 쓸 때 다시 그 가운데 쓰는 것은 49이다(其用四十有九)”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줄여 말하면 “55”를 다 쓰지 않는 까닭은 다 쓰게 되면 둘로 나누고(分二)”, “하나를 걸고(掛一)”, “넷씩 세고()”, “기수로 떨어진(歸奇)” 뒤에 7896의 수가 나오지 않아서, 를 확정해 괘를 이룰 수 없고 예상했던 목적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쓰는 것은(其用)”이라고 말한 까닭도 바로 쓰이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완전히 인위적인 안배에서 나왔는데도 주희는 오히려 하도河圖를 잘못 믿어서 마침내 모두 이치와 형세가 자연스러운 것에서 나왔으니 사람의 지혜로서 덜어 내거나 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皆出於理勢之自然 而非人之知力所能損益也)”라고 했으니 틀림없이 잘못이다.

4. 나는 󰡔주역󰡕 한 권의 알맹이는 사상에 들어 있으며 사상이란 주로 64괘의 구조 가운데 들어있다고 본다. 이 점은 일찌기 공자가 지은 계사전에서도 번잡함을 무릅쓰고 되풀이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도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과 건곤 두 괘에 들어 있는 단전彖傳속에서도 모두 언급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사상은 이미 한 덩어리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공자가 󰡔역대전󰡕을 짓고부터 이천여년 동안 외워 익힌 자들은 하나 같이 멍청해서 그 의미에 통하는 자가 없었다. 나는 30년대 후반에 레닌이 지은 󰡔변증법 문제를 말한다󰡕를 읽고 깨달음을 받아 비로소 󰡔주역󰡕에 들어 있는 이 사상에 대해 초보적인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나는 󰡔역통󰡕을 쓰면서 마침내 이 이해를 󰡔역통󰡕 가운데 써 넣었다. 해방 후 나는 혁명작업에 참가하여 오랜 동안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배우면서도 󰡔주역󰡕의 이 사상을 이해하는 일에도 끊임없이 깊이를 더했다. 이 문제를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아래 면에 자주 여러 문장들을 가져다 갖추고서 관련 있는 원문을 증거로 끌어다 쓰면서 자세한 설명과 해설을 덧붙였다.

먼저 서괘전부터 얘기를 시작하자. 서괘전은 편 머리에서 하늘과 땅이 있은 뒤에 만물이 생겼다(有天地 然後萬物生焉)”고 했다. 여기서 하늘과 땅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확실히 이것은 64괘의 머리가 되는 건곤 두 괘를 가리킨다. 은 순수한 이며 하늘을 본땃고, 은 순수한 이며 땅을 본땃다. 󰡔역위易緯󰡕 「건착도에서는 건과 곤이 함께 생겨났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건과 곤 두 괘는 사실 하나면서 모순을 지닌 통일체이다. 󰡔주역󰡕을 지은이는 실제로 64괘의 구조를 이용해서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면서 머리가 되는 건과 곤 두 괘를 써서 하늘과 땅을 대표하게 했다. 그렇다면 󰡔주역󰡕의 이러한 관점에서 말할 때 건과 곤의 앞은 무엇일까? 나는 건과 곤의 앞이 태극이라고 생각한다. 계사전상에서는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았다(易有太極 是生兩儀)”고 하였다. 이 양의는 한 쌍의 모순으로 음과 양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하늘과 땅, 건과 곤이라고 할 수도 있다. 태극 또한 태일太一이라고도 하며, 절대적인 하나, 전체로서의 하나, 뒤섞여져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이다. 허신許愼󰡔설문說文󰡕 「일부一部일자一字에 대한 설명에서 최초에는 태극만 있었고 도가 하나에서 섰으며 하늘과 땅을 만들어서 나누고, 변화하여 만물을 이루었다(惟初太極 道立於一 造分天地 化成萬物)”고 하였다. 이같은 허신의 말은 바로 󰡔주역󰡕의 관점을 다시 설명한 것이다. 허신이 하늘과 땅을 만들어서 나누었다고 한 말을 오늘날의 말로 풀면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변화하여 만물을 이루었다는 허신의 말은 바로 서괘전에서 하늘과 땅이 있은 뒤에 만물이 생겼다(有天地 然後萬物生焉)”고 한 것이다. 64괘의 구조에서 보면 건과 곤은 하늘과 땅이며, 그 나머지의 여러 괘는 하늘과 땅이 만들어 낸 만물이다.

계사전상에서는 점치는 법을 말하면서 건의 점대가 216이오 곤의 점대가 144로 합쳐서 360이니 일년의 날 수에 해당한다. 두 편의 점대가 11520이니 만물의 수에 해당한다(乾之策二百一十有六 坤之策百四十有四 凡三百有六十 當期之日 二篇之策萬有一千五百二十 當萬物之數也)”고 하였다. 이 속에는 실제 하늘과 땅이 있은 뒤에 만물이 생겼다는 문제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속에는 설명이 필요한 어떤 문제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계사전상에서 말한 두 편의 점대가 11520이니 만물의 수에 해당한다이다. 여기서 만물의 수는 당연히 건과 곤 속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것은 건과 곤 두 괘가 이미 만물을 낳는 하늘과 땅이며 아울러 또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 데에서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어떤 독립된 부분임을 말한다. 이 점은 합쳐서 360이니 일년의 날 수에 해당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는 일년이고 일년은 4계절로 나뉘는데 4계절 가운데 하늘에서 보면 더위와 추위가 있고 땅에서 보면 낳는게 있고 이루는게 있지만 전체적으로 말하면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 것이오 나누어 말하면 하늘에서 시작되어 땅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다는 생각 가운데 하늘과 땅은 또 하나의 독립된 부분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말은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다는 것이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쉬지 않고 움직이며 만물이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노자󰡕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도다. 빈 듯 하면서도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힘이 나오는구나(天地之間其猶탁약! 虛而不屈, 動而愈出)”라고 했는데, 보아하니 󰡔주역󰡕󰡔노자󰡕의 이 두 구절은 짝을 이룬다.

계사전상에서는 건과 곤은 역의 온축이다. 건과 곤이 열을 이루어 역이 그 속에서 이루어진다. 건과 곤이 허물어지면 역을 볼 수가 없다. 역을 볼 수가 없으면 건과 곤도 거의 없어진다(乾坤其易之蘊耶! 乾坤成列而易立乎其中矣. 乾坤毁則无以見易, 易不可見, 則乾坤或幾乎息矣.)”고 하였다. 이 구절은 공자가 󰡔주역󰡕 64괘의 사상에 대해 내린 가장 전체적이면서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 ‘건과 곤은 역의 온축이다라는 것은 󰡔주역󰡕 64괘의 전체 의미가 모두 건과 곤 두 괘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전체 의미라고 말한 데에는 건과 곤은 하늘과 땅이며, 64괘는 건과 곤이 만들어 낸 하늘과 땅이 짓는 만물이고, 64괘가 만든 하늘과 땅이 낳는 만물이 발전과정 가운데 이룩한 몇 몇 부분 및 각 부분 사이의 차례차례 바뀌는 법칙, 그리고 가장 마지막 두 괘인 기제(旣濟)와 미제(未濟)64괘 가운데 특수 의미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건과 곤이 열을 이루어 역이 그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한 것은 건과 곤 두 괘가 64괘의 머리에 놓일 때 󰡔󰡕 64괘의 변화 발전이 이미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건은 순수한 양이고 곤은 순수한 음이고, 건과 곤은 하나의 모순 통일체이다. 이 모순 통일체의 변화 발전이 64괘를 만들어 낸다. 64괘의 배열은 두 괘씩 반대를 이루지 않으면 짝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건괘와 곤괘는 짜이며, 둔괘와 몽괘는 반대이다. 서괘전을 보면 둔괘 아래는 괘와 괘 사이의 자리 바꿈이 모두 ……반드시()……또는 ……할 수 없기 때문에(不可以)……같은 말을 쓰고 있는데 이 사실은 64괘의 형성이 건과 곤 두 괘의 변화 발전에서 나왔으며 이러한 변화 발전에는 법칙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건과 곤이 허물어지면 역을 볼 수가 없다. 역을 볼 수가 없으면 건과 곤도 거의 없어진다는 말은 사실상 64괘 가운데 가장 마지막 두 괘인 기제와 미제의 특수 의미에 대한 설명이다. 또한 건과 곤이 허물어지면 역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은 기제를 말한 것이고, ‘역을 볼 수가 없으면 건과 곤도 거의 없어진다는 것은 미제를 말한 것이다. 64괘가 만들어 내는 발전과정에서 보면 처음 시작할 때 건은 순수한 양이고 곤은 순수한 음이어서 가장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발전하여 기제에 이르면 여섯 효가 굳셈과 부드러움이 바르면서 제자리에 있으니(剛柔正而位當)” 이미 평형에 이른 것이다. 건과 곤의 변화 발전은 본래 음양의 불평형에서 나온다. 그러나 한 번 평형에 이르면 이같은 것이 건과 곤에서 무너진다. ‘건과 곤이 허물어지면 역을 볼 수가 없다는 말은 모순이 이미 해결되었고 아울러 변화 발전도 볼 수 없음을 뜻한다. 잡괘전에서 기제괘는 정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도 이 문제이다. ‘역을 볼 수가 없으면 건과 곤도 거의 없어진다는 말에서 거의 없어진다(幾乎息)’는 세 글자는 크게 생각해 볼 만하다. ‘거의 없어진다는 말은 실제 업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며 다만 없어진 것 같을 뿐이다. 거의 없어진다는 것은 기제괘를 가리키며,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미제괘를 가리킨다. 서괘전에서 물은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미제괘로 받아서 마친다고 하였으니 바로 미제가 없어지지 않음임을 말한 것이다. 64괘의 구조 가운데 기제괘와 미제괘가 한 부분에 놓여 있고 기제괘는 거의 없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미제괘는 없어지지 않음을 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괘란 건괘 곤괘로부터 기제괘 미제괘에 이르기 까지가 하나의 커다란 발전단계의 완성임을 말한 것이다. 변화 발전이란 그침이 없으며 또 그칠 수도 없다. 따라서 시간도 끝이 없으며 공간도 끝이 없고 물질운동 또한 영원히 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계사전에서 말하는 변화 발전은 음과 양의 다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의 화해에서 나오며, 앞을 향한 발전이 아니라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순환이며 중복이라고 했다. 나는 이같은 주장은 왜곡하려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니라도 󰡔주역󰡕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으로, 옳다고 한다면 잘못이다.

계사전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건곤은 역의 문인가. 건은 양이고 곤은 음이니 음과 양이 덕을 합침에 굳셈과 부드러움이 모습이 있게 된다. 이것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본받고 신명의 덕에 통하게 된다고 하셨다.(子曰, 乾坤其易之門耶! 乾陽物也, 坤陰物也, 陰陽合德而剛柔有體, 以體天地之撰, 以通神明之德.)” 이것은 공자가 처음으로 󰡔주역󰡕 64괘의 구조문제를 자세히 설명한 말이다. 그렇다면 역의 문(易之門)’이라고 하는 것과 역의 온축(易之蘊)’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나는 역의 온축은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고 역의 문은 건곤이 하나의 모순이라는 점에 치중해서 말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음과 양이 덕을 합침에 굳셈과 부드러움이 모습이 있게 된다는 말은 64괘의 굳셈과 부드러움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건과 곤 두괘 내부의 모순과 투쟁에서 나온 결과임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덧붙여 설명해야 할 문제는 이 자를 계사전의 다른 곳에서 명확하게 풀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 부분에서는 문을 닫는 것을 곤이라 하고, 문을 여는 것을 건이라 하며, 한 번 닫고 한 번 여는 것을 변한다고 하고, 옛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오면서 그침이 없는 것을 통한다고 한다고 하면서 이 자를 건과 곤이라는 모순이 변화 발전하는 속에 들어 있는 상황임을 생동감있게 설명하였다. ‘이것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본받고 신명의 덕에 통하게 된다(以體天地之撰, 以通神明之德.)’는 말은 64괘 전체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剛柔有體이고 이란 陰陽合德의 덕이다. 전체적인 의미는 64괘의 굳셈과 부드러움이 건괘와 곤괘의 굳셈과 부드러움을 체로 하고, 64괘의 덕이 건괘와 곤괘의 덕과 서로 통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계사전상에서는 하늘에서는 이미지를 이루고 땅에서는 모양을 이루어 변화가 드러난다. 이런 까닭에 굳센 것과 부드러운 것이 서로 갈마들고 8괘가 서로 부딪혀서 천둥으로 북돋우고 비바람으로 윤택하게 하여, 해와 달이 돌고 번 갈아 추웠다 더웠다 하게 한다. 건의 도는 남자를 이루고 건의 도는 여자를 이룬다(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 是故剛柔相摩, 八卦相, 鼓之以雷霆, 潤之以風雨, 日月運行, 一寒一署, 乾道成男, 坤道成女)”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것도 실제는 하늘과 땅이 있은 뒤에 만물이 생겼다(有天地 然後萬物生焉)’는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늘에서는 이미지를 이루고 땅에서는 모양을 이룬다(在天成象, 在地成形)’는 말은 하늘과 땅으로 구체화된 건과 곤이 갖추고 있는 각자의 특징이다. ‘변화가 드러난다(變化見矣)’는 말은 하늘과 땅으로 구체화된 건과 곤이라는 모순이 일으키는 변화이다. 그 아래 굳센 것과 부드러운 것이 서로 갈마들고(剛柔相摩)’부터 번 갈아 추웠다 더웠다 한다(一寒一署)’까지는 변화가 드러난다(變化見矣)’는 말에 대해 다시 구체적인 생동감을 말한 것이다. ‘건의 도는 남자를 이루고 건의 도는 여자를 이룬다(乾道成男, 坤道成女)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변화 가운데 생겨나는 만물이다. 여기서 말한 남자와 여자는 계사전하에서 하늘과 땅이 뒤엉켜서 만물이 생겨나고 남녀가 을 얽어서 만물이 자라난다(天地絪縕, 萬物化醇, 男女構情, 萬物化生)”고 했고, 서괘전에서 하늘과 땅이 있은 뒤에 만물이 있게 되고 만물이 있은 뒤에 남자와 여자가 있게 된다(有天地然後有萬物 有萬物然後有男女한 남자와 여자 처럼 다만 만물 가운데 들어 있는 양적인 성질과 음적인 성질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니 사람으로서의 남자와 여자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5. 왕필王弼󰡔주역약례周易略例󰡕 「명상明象편에서 뜻을 얻으려면 이미지를 버려야하고, 이미지를 얻으려면 말을 버려야 한다(得意忘象, 得象忘言)고 했다. 이어서 그러므로 뜻을 다해 이미지를 세우면 이미지는 잊어버릴 수 있고, 을 다해 그림그리는 일을 거듭하면 그림은 잊어버릴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어떤 대상을 만나면 그 이미지를 그릴 수 있고, 뜻을 모아 그것을 징험할 수 있다. 뜻이 진실로 굳센 것에 있다면 어찌 반드시 말뿐이겠으며, 찾는 대상이 순한 것에 있다면 어찌 반드시 소여야겠는가? 가 정말 순한 것에 드러 맞는다면 어찌 반드시 이 소가 되어야하며, 뜻이 정말 굳센 것에 응한다면 어찌 반드시 건이 말이 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말을 에 고정시켜 놓고서 글을 살피고 괘를 따져, 말을 빗댄 설명은 있지만 이 없으면 거짓말만 가득하여 법칙으로 삼기 어렵다고 보았다. 서로 체가 되기에 부족하여 마침내 괘가 바뀌는데 이르게 되고 괘가 바뀌고서도 부족하여 미루어 오행에 이르게 되니, 한 번 성인이 낸 본 뜻을 잃어버림으로써 꾸밈이 더 심해졌다. 제멋대로 하다가 다시 혹 본래 뜻에 들엄맞는다고 해도 뜻을 취할 수가 없는 까닭은 대체로 이미지만 보존하고 뜻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버림으로써 뜻을 구한다면 본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故立象以盡意, 而象可忘也, 重畵以盡情, 而畵可忘也. 是故觸類可爲其象, 合義可爲其徵. 義苟在健 何必馬乎? 類苟在順, 何必牛乎? 爻苟合順, 何必坤乃爲牛, 義苟應健, 何必乾乃爲馬. 而或者定馬於乾, 案文責卦, 有馬无乾, 則僞說滋漫, 難可紀矣. 互體不足, 遂及卦變, 變又不足, 推致五行, 一失其原, 巧愈彌甚, 縱復或値, 而義無所取, 蓋存象忘意之由也. 忘象以求其意, 義斯見矣)” 왕필이 이런 의견을 내놓은 뒤 학자들 사이에 칭찬과 헐뜯음이 반반이다. 나는 역상수파易象數派에 고정시켜 놓고 글을 살피고 괘를 따지는 것에 대한 왕필의 비판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뜻을 얻으려면 이미지를 버려야하고, 이미지를 얻으려면 말을 버려야 한다(得意忘象, 得象忘言)’는 방법을 응용하여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달리 생각한다. 나는 설괘전자체에서 이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는데 다만 사람들이 자주 입술로만 유창하게 읽어대면서도 그 뜻을 마음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일찌기 1885년에 󰡔설역說易󰡕을 쓸 때 이 문제를 얘기했었다. 내 생각에는 설괘전에서 은 굳건한 것이요, 은 순한 것이다. 은 움직이는 것이요, 은 들어가는 것이다. 은 빠지는 것이요, 는 걸리는 것이다. 은 그치는 것이요, 는 기뻐하는 것이다(, 健也. , 順也. , 動也. , 入也. , 陷也. , 麗也. , 止也. , 說也.)”라 한 것과 건은 말이요 곤은 소다. 진은 용이요 손은 닭이다. 감은 돼지요 이는 꿩이다. 간은 개요 태는 양이다. 건은 머리요 곤은 배다. 진은 발이요 손은 다리다. 감은 귀요 이는 눈이다. 간은 송이요 태는 입이다(乾爲馬, 坤爲牛, 震爲龍, 巽爲鷄, 坎爲豕, 離爲雉, 艮爲狗, 兌爲羊. 乾爲首, 坤爲腹, 震爲足, 巽爲股, 坎爲耳, 離爲目, 艮爲首, 兌爲口.)”라 한 것은 다르다. 앞의 것은 8괘의 성질을 말한 것이고, 뒤의 것은 8괘의 이미지를 말한 것이다. ‘, 健也.’는 건괘가 바로 굳건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乾爲馬는 건괘가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의 뜻은 ․․․이다()’와 같으며 바뀔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의 뜻은 ․․․이 된다()’와 같으며 바뀔 수 있음을 나타낸다. 호위胡渭가 쓴 󰡔우공추지禹貢錐指󰡕펼쳐져 아홉줄기 물이 된다(播爲九河)”는 글 아래 임씨의 주장을 인용하여 본래 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것으로부터 저것이 되는 것이다(凡言爲者, 皆從此而爲彼也)”라고 했다. 임씨의 자 해석은 옳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은 이미 말이 될 수 있었으며, 또 머리, 하늘, , 임금, 아버지가 될수 있다. 그러므로 말을 에 고정시켜 놓고서 글을 살피고 괘를 따지는(定馬於乾, 案文責卦)’ 것은 당연히 잘못이다.

6. 계사전하에는 옛날에 포희씨가 천하에서 왕노릇할 때 우러러서는 하늘에서 이미지를 보았고, 굽혀서는 땅에서 법을 보았고, 날짐승이나 길짐승의 무늬와 땅의 마땅함을 보았다. 가까이는 제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물건에서 취했다. 여기에서 비로소 8괘를 만들어 이것으로 신명한 덕에 통하고 만물의 정을 같게 했다. 노끈을 묶어 그물을 만들어 새도 잡고 물고기도 잡았으니 모두 괘에서 취한 것이다(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觀鳥獸之文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始作八卦, 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 作結繩而爲罔, 以佃以漁, 蓋取諸離)”에서부터 아주 옛날에는 노끈을 묶어 세상을 다스렸는데 뒷 세상의 성인이 이것을 문자와 신표로 바꾸었다. 신하들은 이것을 가지고 다스리며 백성들은 이것을 가지고 살핀다. 모두 쾌괘에서 취한 것이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 百官以治, 萬民以察, 蓋取諸)”까지 이르는 긴 글이 있다. 이 글은 뒷 세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1939년에 󰡔역통󰡕을 쓰면서는 이 설명을 믿었었다. 그러나 해방후 연구가 깊어지면서 비로소 이 설명이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 설명은 윗 글에서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았다.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8괘를 낳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고 한 설명과 들어맞지 않는다. 2. 아래 글에 있는 이것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본받고 신명의 덕에 통하게 된다(以體天地之撰, 以通神明之德.)’는 말은 8괘가 겹쳐져 64괘가 되어 이미 이 있으며, 아울러 건괘와 곤괘 두 괘를 머리로 삼아 64괘가 순서지었을 때이다. 그런데 비로소 8괘를 만들어(始作八卦)’ 내었는데 어떻게 신명한 덕에 통하고 만물의 정을 같게 할(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 수 있겠는가? 3. 사마천司馬遷많은 학파에서 황제를 말했지만 글이 매끄럽지 않은 까닭에 젊잖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百家言黃帝, 其文不雅馴, 紳先生難言之)”고 하였다. 이른 바 포희씨󰡔장자莊子󰡕, 󰡔관자管子󰡕, 󰡔회남자淮南子󰡕에만 보일 뿐 공자 계통의 책에는 보이지 않으니 이것으로써 계사전에서 포희씨가 비로소 8괘를 지었다는 주장이 근거없음을 알 수 있다. 4. 󰡔󰡕에 있는 정(), ()괘는 모두 실물에서 이미지를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노끈을 묶어 그물을 만들어 새도 잡고 물고기도 잡았으니 모두 괘에서 취한 것이다(作結繩而爲罔, 以佃以漁, 蓋取諸離)’고 하였으니 본말이 뒤바뀐 것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5. 󰡔역대전󰡕󰡔󰡕을 지은 사람을 말할 때 성인聖人이라고만 했을 뿐 어떤 사람인가를 확실하게 가리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포희씨가 비로소 8괘를 지었다고 밝혀 말했으니 믿을 수 없음을 가히 알 수 있다. 위에서 마한 다섯 가지를 바탕으로 나는 이 긴 글이 뒷 세상의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끼워 넣은 것일 뿐 계사전원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히 잘라 말할 수 있다.

7. 계사전상에는 하늘이 이미지를 드리워 길흉을 드러내자 성인이 이것을 본뜨고,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책이 나오자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天垂象, 見吉凶, 聖人象之, 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는 두 문장이 이런 까닭에 하늘이 신비로운 물건을 내니 성인이 이것을 본받고, 하늘과 땅이 변화하니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是故天生神物, 聖人則之, 天地變化, 聖人效之)”는 말 아래 있는데, 나는 이 두 문장이 계사전원문이 아니라 뒷 사람들이 끼워 넣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보는가? 위에 나온 이런 까닭에 하늘이 신비로운 물건을 내니 성인이 이것을 본받고, 하늘과 땅이 변화하니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는 글은 바로 위의 점치는데 쓰는 풀이나 거북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莫大乎蓍龜)”는 말을 이은 것이다. 그리고 점치는데 쓰는 풀이나 거북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말은 또 “8괘는 길흉을 정하고 길흉은 큰 일을 낳는다. 이런 까닭에 형체는 하늘과 땅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바뀌어 통하는 것은 4계절보다 더 큰 것이 없다(八卦定吉凶, 吉凶生大業, 是故法象莫大乎天地, 變通莫大乎四時)”는 글을 이어 말한 것이다. 이 속에서 하늘이 신비로운 물건을 내었다(天生神物)’는 것은 분명히 점치는데 쓰는 풀이나 거북이를 가리키고, ‘하늘과 땅이 변화한다(天地變化)’는 것은 분명히 형체는 하늘과 땅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바뀌어 통하는 것은 4계절보다 더 큰 것이 없다(法象莫大乎天地, 變通莫大乎四時)’는 말을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8괘가 길흉을 정한다(八卦定吉凶)’고 했을 뿐인데 어째서 하늘이 이미지를 드리워 길흉을 드러내자 성인이 이것을 본떴다(天垂象, 見吉凶)’고 마할 수 있겠는가? 또 윗 글에서 이미 하늘이 신비로운 물건을 내니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天生神物, 聖人則之)’고 했는데 어째서 또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책이 나오자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고 했겠는가? 말뜻이 겹쳐져서 서로 모순될 뿐인데 거기다가 하도낙서는 또 왠 뚱딴지 같은 말인가? 󰡔주역󰡕 경전 가운데 하도’, ‘낙서와 관련된 것은 그림자도 볼 수 없는데 성인이 본받았다는 말은 무슨 소리인가? 이런 까닭에 나는 하늘이 이미지를 드리워 길흉을 드러내자 성인이 이것을 본뜨고,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책이 나오자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天垂象, 見吉凶, 聖人象之, 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는 두 문장은 계사전원문이 아니라 뒷 사람들이 끼워 넣은 것이라고 본다.

8. 설괘전에서 옛날에 성인이 󰡔󰡕을 만들 때는 神明한 데서 슬며시 도움을 받아 점치는 풀을 내었다. 하늘을 셋으로 하고 땅을 둘로 하여 를 세웠다(昔者聖人之作易也, 幽贊於神明而生蓍, 參天兩地而倚數)”고 했다. 예전 사람들은 대부분 神明한 데서 슬며시 도움을 받아 점치는 풀을 내었다(幽贊於神明而生蓍)’는 것과 하늘을 셋으로 하고 땅을 둘로 하여 를 세웠다(參天兩地而倚數)’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희가 󰡔주역본의󰡕에서 하늘을 셋으로 하고 땅을 둘로 했다(參天兩地)’는 말을 풀면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둥근 것은 지름이 1이라면 둘레가 3이니 3은 그 하나로 단수가 되기 때문에 삼천參天3이 된다. 네모난 것은 한 족 길이를 1이라고 하면 둘레는 4이다. 42를 두 개 합한 것이기 때문에 양지兩地2가 된다(天圓地方, 圓者一而圍三, 三各一奇, 故參天而爲三, 方者一而圍四, 四合二偶, 故兩地而爲二)”고 한 것은 더욱 잘못이다. 사실 이 두 구절은 모두 점치는 풀을 말한 것으로, 윗 구절은 점치는 풀이 만들어 진 것을 말했고, 아래 구절은 점치는 풀의 응용을 말했다. 윗 구절의 뜻은 점치는 풀은 본래 일종의 풀로써 그것만 가지고는 길흉을 알 수가 없지만, 그것을 가지고 점을 쳐서 길흉을 알게 되어 신물이니 신명이니 하고 불리는 것은 성인이 슬며시 받은 도움(幽贊)’, 즉 성인이 남 모르는 사이에 하는 도움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남 모르는 사이에 돕는가? 이것이 바로 그 뒤에서 말한 하늘을 셋으로 하고 땅을 둘로 하여 를 세웠다(參天兩地而倚數)’는 것이다. ‘삼양參兩은 옛 말이다. 예를 들면 󰡔주례周禮󰡕 「천관질의天官疾醫에서는 아홉 구멍의 변화를 가지고 둘로 하고, 아홉 장기의 움직임을 가지고 셋으로 한다(兩之以九竅之變, 參之以九藏之動)”고 했고, 󰡔일주서逸周書󰡕 「상훈常訓에서는 둘로써 뜻을 의심해보고, 셋으로써 둘을 고르게 한다(疑意以兩, 平兩以參)”고 했다. ‘삼양에는 뒤섞는다는 뜻이 있다. 하늘과 땅이란 13579 다섯은 하늘의 수를 가리키고, 246810 다섯 수는 땅의 수를 가리킨다. ‘하늘을 셋으로 하고 땅을 둘로 하여 를 세웠다(參天兩地而倚數)’는 말은 점치는 법에서 하늘의 수가 다섯이고 땅의 수도 다섯이다. 다섯 자리가 서로 얻어 각기 합하는 것이 있다. 하늘의 수를 합하면 25이고 땅의 수를 합하면 30이다. 대체로 하늘과 땅의 수를 합하면 55이다. 이것이 변화를 이루고 귀신을 행하는 까닭이다. (天數五, 地數五, 五位相得而各有合 天數二十有五, 地數三十, 凡天地之數五十有五, 此所以成變化而行鬼神也)”라고 한 말이다.

9. 계사전상에서는 그러므로 하늘의 도를 밝혀서 백성의 일을 살핀다. 이것이 신물을 일으켜서 백성들의 쓰임에 예비하는 것이다(是以明於天之道而察於民之故, 是興神物, 以前民用)”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신물은 분명히 점치는 풀을 가리킨다. 이 점은 그 아래에서 하늘이 신비로운 물건을 내었다(天生神物)’고 할 때의 신물이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신물을 일으킨다(是興神物)’ 앞에 먼저 그러므로 하늘의 도를 밝혀서 백성의 일을 살핀다(是以明於天之道而察於民之故)’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나는 1985년에 󰡔설역󰡕을 쓰면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얘기했었다. 내 생각에는 점치는 풀이 생겨난 것을 말할 때 하늘의 도를 밝혀서 백성의 일을 살피는(明於天之道而察於民之故)’ 것이 전제조건이다. ‘하늘의 도를 밝힌다(明於天之道)’는 것은 지금 말로 바꾸면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백성의 일을 살핀다(察於民之故)’는 것을 지금 말로 바꾸면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점치는 법에서 둘을 본뜨고(象兩)’, ‘4계절을 본뜬다(象四時)’는 것은 하늘의 도를 이해했다는 증거이고, ‘3을 본뜬다(象三)’는 것은 백성의 일을 이해했다는 증거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계사전하에서는 역이라는 책은 넓고 커서 다 갖추었다. 하늘의 도가 있고, 사람의 도가 있고, 땅의 도가 있다(易之爲書也, 廣大悉備, 有天道焉, 有人道焉, 有地道焉)”고 하였고, 설괘전에서는 옛날에 성인이 역을 만들 때에는 성명의 이치를 따르려고 했다. 그래서 하늘의 도를 세워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워 부드러움과 굳셈이라 하고, 사람의 도를 세워 어짐과 올바름이라 했다(昔者聖人之作易也, 將以順性命之理, 是以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고 하였다. 예괘단전豫卦彖傳에서는 하늘과 땅이 순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해와 달이 벗어나지 않고 4계절이 어그러지지 않는다. 성인이 순하게 움직이면 곧 형벌이 맑아지고 백성들이 복종한다(天地以順動, 故日月不過而四時不, 聖人以順動, 則刑罰淸而民服)”고 했고, 분괘단전賁卦彖傳에서는 천문을 보아 시대의 바뀜을 살피고, 인문을 보아 세상을 감화시켜 이룬다(觀乎天文以察時變, 觀乎人文以化成天下)”고 하였다. 박괘단전剝卦彖傳에서는 군자가 다 쓰면 쉬고 가득 차면 기우는 이치를 숭상하는 까닭은 하늘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君子尙消息盈虛, 天行也)”라 했고, 이괘단전이卦彖傳에서는 하늘과 땅은 만물을 기르고, 성인은 어진이를 길러 덕이 모든 백성에 미친다(天地養萬物, 聖人養賢以及萬民)”고 하였다. 함괘단전咸卦彖傳에서는 하늘과 땅이 감응하여 만물이 변화 생성하고, 성인이 사람 마음에 감응하여 온 세상이 화평해 진다(天地感而萬物化生, 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고 했고, 항괘단전恒卦彖傳에서는 해와 달은 하늘을 얻어 오래도록 비출 수 있고, 4계절은 변화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이룰 수 있고, 성인은 그 도에 오래기 때문에 온 세상을 변화 완성 시킨다(日月得天而能久照, 四時變化而能久成, 聖人久於其道而天下化成)”고 하였다. 규괘단전규卦彖傳에서는 하늘과 땅이 서로 다르지만 그 하는 일은 같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지만 그 뜻은 서로 통한다. 만물이 서로 다르지만 그 일은 서로 같다(天地而其事同也, 男女而其志通也, 萬物而其事類也)”고 하였고, 혁괘단전革卦彖傳에서는 하늘과 땅이 바뀌어서 4계절이 이루어지고, 탕임금과 무임금이 혁명하여 하늘에 따르고 사람들에게 응했다(天地革而四時成, 湯武革命, 順乎天而應乎人)”고 했고, 풍괘단전豊卦彖傳에서는 해가 가운데 오면 기울기 시작하고 달이 꽉 차면 사그러들기 시작한다. 하늘과 땅의 차고 기움도 때와 더불어 생겼다 없어진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임에랴? 하물며 귀신임에랴?(日中則, 日盈則食, 天地盈虛與時消息,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라고 하였다. 위에서 살핀 글들은 모두 하늘의 도를 밝혀서 백성의 일을 살핀다(明於天之道, 而察於民之故)’는 말이 분명히 점치는 풀을 만들어 낸 전제조건임을 증명하고 있다. 점치는 풀을 만들어 내는 데 하늘의 도를 밝혀서 백성의 일을 살핀다(明於天之道, 而察於民之故)’는 것이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이 생각은 아주 자연스럽게 괘 속에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 전체 속에까지 드러나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그러므로 하늘의 도를 밝혀서 백성의 일을 살핀다. 이것이 신물을 일으켜서 백성들의 쓰임에 예비하는 것이다(是以明於天之道而察於民之故, 是興神物, 以前民用)’는 말이 󰡔주역󰡕을 이해하기 위해 아주 중요하며 절대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 󰡔주역󰡕󰡔귀장歸藏󰡕 두 책은 기본이 되는 괘가 8개이고, 거기서 갈라져 나온 괘가 모두 64개이다(其經卦皆八, 其別皆六十有四)”라는 점에서 보면 서로 같다. 그러나 갈라져 나온 괘의 순서는 󰡔귀장󰡕은 곤괘가 머리가 되고 건괘가 그 다음이며, 󰡔주역󰡕은 건괘가 머리가 되고 곤괘가 그 다음이니 두 책이 오히려 아주 반대이다. 이것은 우연적인 것인가? 나는 일찌기 그 까닭을 따져봄으로써 이처럼 서로 다른 것이 은나라와 주나라가 드러낸 정치사상의 큰 차이를 반영한 것임을 알았다. 예를 들어 󰡔사기󰡕 「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저효손저孝孫의 보충글에 태후가 황제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은나라의 도는 친한 이를 친히 여기고, 주나라의 도는 존귀한 이를 높이는데 그 뜻은 같다고 했다. 편안한 수레와 큰 가마는 양효왕이 타는데 쓰라고 하였다.……원앙앙 등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나라의 도에서 친한 이를 친히하는 것은 아우를 세우는 것이며, 주나라의 도에서 존귀한 이를 높인다는 것은 자식을 세우는 것입니다.……그래서 주나라의 도는 태자가 죽으면 맏손자를 세우고, 은나라의 도는 태자가 죽으면 그 동생을 세웁니다’(太后謂帝曰, 吾聞殷道親親, 周道尊尊, 其義一也. 安車大駕, 用梁孝王爲寄……等曰, 殷道親親者立弟, 周道尊尊者立子……周道太子死立嫡孫, 殷道太子死立其弟)”라는 말이 있다. 이 글을 󰡔예기󰡕 「표기表記에서 어머니는 친히 하지만 존귀하게 여기지는 않고 아버지는 존귀하게 여기지만 친히하지는 않는다(母親而不尊, 父尊而不親)”고 한 말과 합쳐 생각해 보면 은나라의 도가 친한 이를 친히 한다(殷道親親)’는 것은 모계를 중시하는 것이고, ‘주나라의 도가 존귀한 이를 높인다(周道尊尊)’는 것은 부계를 중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모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은나라의 역은 곤괘를 머리로 삼았으며, 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주역󰡕은 건괘를 머리로 삼았다. 󰡔주역󰡕이 건괘를 머리로 하고 곤괘를 다음으로 한 것은 주나라 사람들이 했던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 아비를 높이고 자식을 낮추며, 남편을 높이고 아내를 낮추는 사상을 집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점은 󰡔󰡕을 배우려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 두어야 할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10가지는 내가 󰡔󰡕을 배우면서 깨달은 것을 말한 것이기도 하고 이 책의 특징을 말한 것이기도 한데, 전체적으로는 앞 사람들의 견해와 아주 다르다는 것이 득히 이 점들에서 잘 드러난다.

여소강동지는 사람이 공손하고 덕이 많으며 오랜 동안 글을 써왔는다. 일찌기 50년대에 내게 공부를 배웠고, 1979년 초에 비로소 길림대학에 와서 내 조교가 되었다. 그리고 10년 동안 적지 않게 내 이을 도왔다. 내가 출판한 󰡔중국노예사회사󰡕󰡔주역강좌󰡕 두 권은 그의 도움이 더욱 많았다. 이제 나와 함께 󰡔주역전해󰡕의 원고를 쓰면서는 그의 글쓰는 특기를 발휘하여 숨겨진 것을 정미하게 드러내어 밝히고 남들이 얘기할 수 없는 것들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글을 더 발전시키고 덧붙이고 채워넣고 바로잡았다. 이 사실은 그가 서술하는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미 짓는 사람임을 증명한다. 특히 건괘곤괘기제괘미제괘 중요한 관계에 있는 여러 괘들로부터 계사전가운데 약간 어려운 장절의 해석에서 더욱 솜씨를 보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주역󰡕책의 글 뜻이 깊고 오묘해서 읽기 어렵기 때문에 설령 그 뜻을 다 통했다고 하더라도 책으로 써 내면 또 일반 보통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이제 여소강동지가 한 해석은 적절하고 자세하며 심오한 내용을 알기 쉽게 말했으니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 처럼 분명해서 부족을 메우기에 딱 좋으니 이런 결과는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일이다.

여소강동지는 1987년 말에 이 일을 맡기 시작하여 거의 일년 약간 넘는 정도 동안에 40여만자의 원고를 다 썼으니 그 놀랠만한 정력과 민첩한 글 솜씨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원고 쓰는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길림대학 출판사에서 출판 허락을 받았으니 이 책은 아주 빠른 속도로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해도 저물어 가는데 이렇게 좋은 일을 보게 되어서 너무도 기쁘다. 출판사 동지들에게 삼가 깊은 감사의 뜻을 보낸다.

 

여든 일곱 먹은 늙은이 김경방이

장춘 길림대학에서 서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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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샤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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