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전 제1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 動靜有常 剛柔斷矣


천존지비 건곤정의 비고이진 귀천위의 동정유상 강유단의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 이에 따라 건괘와 곤괘의 순서가 정해진다. 낮은 자리(初爻)에서 높은 자리(上爻)까지 6효가 배열되어 귀한 신분과 천한 신분이 자리잡힌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안정된 법칙(常道)이 있어 굳셈()과 부드러움()이 결정된다.

 

공자는 계사전상하편을 지어서 󰡔주역󰡕 사상의 본질과 철학적 가치를 찾아냈으니, 투철하고 통쾌하며 깊이 있고 완전한 인식에 도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공자의 계사전이 없었더라면 후인들은 󰡔주역󰡕의 풍부한 이치(道理)를 완전히 이해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계사전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몇 구절은 󰡔주역󰡕 전체의 기본사상과 기본원리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天尊地卑 乾坤定矣라는 맨처음 두 구절에는 󰡔주역󰡕의 요점과 열쇠가 들어 있다.

乾坤定矣라는 한 구절은 괘의 배열 문제를 가르쳐 준다. 건곤 두 괘의 배열순서는 󰡔주역󰡕󰡔귀장󰡕이 서로 다르다. 󰡔歸藏󰡕은 은나라 때의 역이고, 거기에서는 곤괘를 64괘의 첫머리에 두고 건괘를 그 다음에 두었다. 그 때문에 이 역을 󰡔곤건 坤乾󰡕이라 부른다. 곤을 앞에 두고 건을 뒤에 놓은 배열방법은 은나라 사람들의 어머니 쪽(母系)을 중시한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주역󰡕은 은나라 역 󰡔곤건󰡕에서 곤괘를 첫머리에 두고 건괘를 다음에 놓은 배열을 뒤집어서, 건괘를 첫머리에 곤괘를 다음에 둔 방식으로 바꿨다. 그것은 은나라와 주나라 교체기에 의식형태 영역에서의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변화이고, 이 변화는 그 당시 사람들의 모든 사유방식을 바꾸어 놓아, 이후 수천년 동안 중국사상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주었고, 중국전통문화 가운데 특히 유가문화의 출발점은 이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건괘를 앞세우고 곤괘를 뒤로한 사상은 바로 주나라 사람들의 등급관념(계급관념)의 특징을 규정한다. 지아비는 높고 지어미는 낮다, 아버지는 높고 자식은 낮다,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다는 사상은 건괘를 앞세우고 곤괘를 뒤로한 사상이 발전하여 나온 것이고, 󰡔주역󰡕 64괘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꿰뚫고 있으며, 아울러 후세 유가사상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옛사람들은 이 사상을 윗사람을 받듦(尊尊)’이라고 개괄하게 된다. ‘尊尊사상은 주나라에 와서야 나타나게 된 것이고, 은나라 사람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친족을 친애하는(親親)’사상에 대한 부정이다. 주나라 때에도 여전히 친친을 말했지만 주나라 사람들이 더욱 강조한 것은 존존이다. 주나라 사람들은 존존을 강조하는 전제를 깔고 친친을 말한 것이다. 또는 주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친친존존사상을 개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주나라 사람들이 말한 친친존존관념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는 친친이기 때문에 은나라 사람들이 말한 친친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용󰡕에서 공자의 말로 기록하고 있는 친족을 받드는 질서와 현인을 높이는 차등에서 예의는 생긴다 라는 한 마디는 매우 좋은 증거자료다. ‘존현은 곧 친친이다. ‘친친존현은 다같이 차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친친은 부모를 으뜸으로 생각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서는 아버지를 높이고 어머니는 그 다음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온통 남존여비(男尊女卑), 부존처비(夫尊妻卑), 부존자비(父尊子卑)라는 의식이며, 이러한 의식은 󰡔주역󰡕 64괘의 괘사와 효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공자가 역을 연구한 것이 위편삼절’(韋編三絶 :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짐)에 이르렀고, 󰡔주역󰡕의 핵심 사상을 명확하게 꿰뚫었음은 바로 계사전첫머리에 乾坤定矣한 마디를 내놓은 것에서 알 수 있으니, 이 구절은 아름답고 힘이 있으며, 단 한 마디 말로 핵심을 설파한 것이다. 이 구절은 바로 󰡔주역󰡕 64괘의 배열에서 건괘를 앞세우고 곤괘를 뒤로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언뜻 보이지 않는 속에 지극히 깊고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乾坤定矣는 괘의 배열순서를 말하고, ‘天尊地卑는 자연현상을 말하였다. 이 두 구절이 결합하여 한층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건괘가 으뜸이고 곤괘가 다음이라고 하는 의미는 바로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듯이 하늘은 표준()이 되고 땅은 표준에 맞음()이 되어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주역󰡕의 독특한 사유방법이며, 그것은 하늘의 도로써 백성의 일을 증거삼는다고 요약할 수 있다.

하늘의 도는 바꿀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이 제시하는 모든 내용은 다 올바르며 바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사유방법일 뿐이다. 우리가 볼 때, 건괘를 앞세우고 곤괘를 다음으로 한 것과 자연계의 하늘이 높고 땅이 낮다는 것은 결코 필연적 연관이 없다. 은나라 사람들의 󰡔귀장󰡕역은 곤괘를 앞세우고 건괘를 뒤로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하나라 때의 󰡔連山󰡕은 근본적으로 건곤 두괘를 특별히 중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연계의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것은 하나라 때나 은나라 때나 주나라 때나 같았다.

또 분명히 지적하여야 할 것은, 공자에 의해 제기된 󰡔주역󰡕수건차곤’(首乾次坤 : 건이 으뜸이고 곤이 다음이다)의 원리 및 여기에서 도출된 부존처비(夫尊妻卑 : 지아비는 높고 지어미는 낮다), 부존자비(父尊子卑 : 아버지는 높고 자식은 낮다), 군존신비(君尊臣卑 :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다)는 사상은 그 가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민주사회 입장에서 말한다면 󰡔주역󰡕의 이러한 사상은 반드시 폐기해야 할 찌꺼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바로 알맹이(精華)였고, 그 시대 사상의 정수였으며, 심지어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하였다고 할 수 있으니, 은주 교체기에 있었던 역사의 위대한 진보는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에게는 당연히 우리의 시대정신이 있으니 󰡔주역󰡕의 건괘를 앞세우고 곤괘를 다음으로 한 사상을 계승할 필요는 없다.

卑高以陳 貴賤位矣이 두 구절은 하나의 괘 안에 있는 6효가 첫번째()로부터 여섯번째() 자리에 이르기까지 배열되는 의미를 설명한다.

以陳은 배열이란 뜻이다.

卑高以陳은 괘의 맨아래에서 시작하여,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의 배열이다. 이리하여 귀천이 자리잡으니’, 귀하고 천한 차등이 자리잡혀서 귀한 것은 곧 귀하고, 천한 것은 곧 천하여 바꿀 수 없다.

가 가리키는 것은 세상에서의 귀하고 천한 지위이며, 괘 안에서의 음의 자리와 양의 자리의 가 아니다.

괘의 6효 중에서 두번째와 네번째는 음의 자리이고 세번째와 다섯번째는 양의 자리이다.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의 두 효는 음양의 자리를 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384효 중에 각 괘의 처음()과 위()효사(小象)’는 모두 제자리를 얻었느냐 잃었느냐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건괘 上九 문언전귀하나 제자리가 없다(貴而无位)”라 하고, 수괘() 上六효사비록 제자리에 합당하지 않으나(雖不當位)”라 하였다. 이것은 바로 괘 안의 6효는 음의 자리와 양의 자리 문제를 가지고 있고, 또 귀하고 천한 자리의 문제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계사전의 이 부분에서 貴賤位矣라는 구절이 말하는 것은 귀하고 천한 지위의 문제이다.

動靜有常 剛柔斷矣이 두 구절도 괘와 효를 말한 것이며 객관세계를 말한 것이 아니다. 위 문장에서 말한 貴賤位矣는 맨 처음부터 맨 위까지의 6위를 가리켜 말하였고, 여기서의 剛柔斷矣6효는 결국 양효()와 음효()임을 설명한 것이다.

한 괘의 6효는 어떤 것은 양이고 어떤 것은 음이니, 아니면 이다. 는 양효이고 양은 이 되며, 은 음효로 음은 가 된다. 한 괘의 6효에서 를 보면 우리는 양효임을 알고, 양효는 강이며, 을 보면 우리는 음효임을 알고, 음효는 유이다. 이렇게 하여 쉽게 강유를 판단해낼 수 있을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강유는 동정을 통해야만 구분된다. 양은 동을 주관하고 음은 정을 주관하며, 변동이 의 안정태()이고, 불변이 의 안정태이므로 6효의 변화는 음양동정에 뿌리를 두며, 우리는 음양동정의 안정태()와 변동태()를 관찰함으로써 강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

 

일은 같은 무리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따라 나뉘어지니, 여기에서 길하고 흉함이 생겨난다. 하늘에서는 상()을 이루고 땅에서는 형()을 이루어 변화가 나타난다.

 

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에서 (사건, )이고, (만물, 물체)이다. 은 세상의 만사와 만물을 가리키니 곧 사물이다.

모임()과 나뉨()은 서로 호응하는 문자이고 도 그렇다.

천지간의 만사 만물은 모두 같은 종류끼리 서로 모이고, 같은 종류끼리 서로 모인 사물들은 모두 공동의 특징을 가지며, 서로 모인 같은 종류의 사물은 또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특징 때문에 다른 종류의 사물과 구분된다. 다시 말해 사물은 종류별로 무리짓는 것이고, 같은 종류의 사물은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에 모여서 합해지고, 다른 어떤 사물과는 상이점을 가지기 때문에 구분이 생긴다. 천지간의 만사 만물은 모두 같은 종류가 있고 다른 종류가 있으며, 모이고 갈라짐이 반드시 있으니, 길흉은 바로 여기에서 생긴다.

길흉은 운명이 좋게 또는 나쁘게 정해진 것이 아니고 인간 활동의 결과다. 인간이 일을 할 때, 때에 맞추어 실행하고, 가장 좋은 방안을 선택하여 문제를 처리하고, 객관조건이 허락하는 상황에서 주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하면 길할 수 있다.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사업상의 성공이다. 그것을 어기면 흉이니, 흉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사업상의 실패다.

그러면 성공과 실패는 方以類聚 物以群分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객관적 사물은 같은 종류가 있고 다른 종류가 있으며, 모임이 있고 갈라짐이 있으니, 이 법칙은 어길 수 없다. 사람의 사업이 천지만물의 같은 것끼리 모이고 다른 것과 헤어지는(同異聚散) 법칙에 순응한다면, 같이해야 할 것을 같이하고 달리해야 할 것을 달리하고 모여야 할 것에 모이고 갈라져야 할 것에 갈라져서 자연히 하다. 천지만물의 같은 것끼리 모이고 다른 것과 헤어지는(同異聚散) 법칙에 어긋난다면, 같이해야 할 것에 같이 하지 않고 달리해야 할 것에 달리하지 않으며, 모여야 할 것에 모이지 않고 갈라져야 할 것에 갈라지지 않으니 반드시 흉하게 된다.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에서 變化見矣는 역 괘의 변화를 말하고, ‘成象’ ‘成形두 구절도 역 괘의 변화를 말한 것이다.

천지의 변화는 상이 있고 형이 있으니 역괘의 변화도 그러하다. 역괘의 변화는 모두 건괘와 곤괘에서 비롯된다. 건은 굳세고() 곤은 부드러우니(), 강유는 바로 효의 으로서 역괘 변화의 몸체가 된다. 역괘의 변화는 실제로 강유의 변화이고, 강유의 변화는 진퇴에서 드러난다. 유가 강으로 변하는 것을 전진()이라 하고, 강이 유로 변하는 것을 후퇴(退)라 한다. 유는 전진하여 강으로 변하고 강은 후퇴하여 유로 변하니 역괘의 변화는 여기에서 밝게 드러난다.

 

是故剛柔相摩 八卦相盪 鼓之以雷霆 潤之以風雨 日月運行 一寒一暑 乾道成男 坤道成女

 

그러므로 강과 유가 서로 부딪치고, 팔괘가 서로 밀고 당겨서 천둥과 벼락으로 고동하고, 바람과 비로 적시며, 해와 달이 운행하여 한 번 추우면 한 번 더워진다. 건도는 남성을 이루고 곤도는 여성을 이룬다.

 

이 단락의 말은 위 문장과 서로 이어지고 서로 보완하여 의미를 밝혀주며, 나아가 역괘의 변화와 생성이 자연계 중의 천지만물의 변화와 생성에 일치하는 원리를 설명했다. 천지만물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처럼 역괘도 그렇게 변화하고 생성한다. 역괘의 변화 생성은 천지만물의 변화 생성을 모사한 것이다.

자는 계사전에서 윗 글을 잇는 작용을 하여, 앞에 제시한 원리로부터 뒤의 상황을 끌어냄을 나타낸다.

는 두 사물이 서로 마찰하고 부딪치는 것이다. ‘은 빙빙 돌며 격렬하게 밀어내는 것이니, 또한 의 의미가 있다. ‘이나 모두 운동, 변화, 발전을 말한 것이다. 운동 변화 발전을 말한 것은 곧 모순과 투쟁을 말한 것이다. 이 단락 전체는 자연계 만물의 생성을 설명했고 또 역괘의 생성을 설명했다. 자연계 만물의 생성 원리와 역괘의 생성 원리는 일치하기 때문에 둘을 묶어서 한꺼번에 설명한 것이다.

剛柔相摩 八卦相盪은 건곤 두 괘가 서로 부딪치고 밀어냄으로써 역의 64괘 전체를 생성함을 설명한 것이다. 건곤의 운동 변화가 괘를 생성하는 것은 마치 하늘과 땅이 서로 작용하고 해와 달이 운행하여 한서의 변화가 생기며, 우뢰와 번개의 고동을 거쳐서 바람과 비로 기르고 윤택하게 하며, 그리하여 만물을 생성하는 것과 같다.

乾道成男 坤道成女두 구절은 건곤 두 괘의 변화 발전이 64괘가 됨이 자연계의 만물 생성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미이다. 자연계의 만물은 천지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만물은 남녀로 나뉘며, 남녀는 64괘 중에서 바로 음양과 강유를 가리킨다. ‘건도성남 곤도성녀이 두 구절과 서괘전천지가 있고나서 만물이 탄생하였다, 계사전건곤은 역의 문, 건괘 단전곤괘 단전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이에 의지하여 비롯되도다, ‘지극하도다 곤원이여 만물이 그것에 의지하여 탄생하는구나 한 것은 의미가 서로 같지만, ‘건도성남 곤도성녀는 그것을 개괄하고, 간략하게 구체화시킨 것일 뿐이다.

특별히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주역󰡕이 자연계를 관찰할 때 우선 사계절의 변화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우뢰와 벼락’ ‘바람과 비는 사계절과 관련되고, ‘해와 달이 운행하고 추위와 더위가 갈마든다도 사계절과 관련된 것이다. 󰡔주역󰡕에서 천지의 변화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대체로 사계절을 강조하지 않는 때가 없다. 계사전에서 점치는 법을 설명할 때, ‘네 개씩 헤아림으로써 사계절을 상징하고라 하고, 건책(乾策)과 곤책(坤策)‘360은 일주하는 날 수이다라 한 것은 모두 사계절을 설명한 것이다. 󰡔주역󰡕은 사계절의 변화로써 천지만물의 변화를 대표하였다. 공자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사계절이 운행하고 만물이 자라니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라고 하여 󰡔주역󰡕의 사상과 딱 들어맞는다. 이것은 󰡔역대전󰡕의 사상이 공자로부터 나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乾知大始 坤作成物 乾以易知 坤以簡能. 易則易知 簡則易從. 易知則有親 易從則有功. 有親則可久 有功則可大. 可久則賢人之德 可大則賢人之業. 易簡而天下之理得矣 天下之理得 而成位乎其中矣.

 

건은 위대한 창조를 맡고 곤은 만물을 완성시킨다. 건은 쉬움()으로써 창조를 맡고, 곤은 간단함()으로써 완성할 수 있다. 쉬우면 알기 쉽고 간단하면 따르기 쉬우며, 알기 쉬우면 친숙해지고 따르기 쉬우면 공적이 있게 된다. 친숙하게 되면 덕이 오래갈 수 있고 공적이 있게 되면 사업이 커질 수 있다.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어진이의 덕이요 커질 수 있는 것은 어진이의 사업이다. 쉽고 간단해서 천하의 이치가 얻어지니 천하의 이치가 얻어지면 올바른 자리가 그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天尊地卑 乾坤定矣에서 이 단락까지가 제1장이다.

1장 전체는 모두 건곤 두 괘를 설명하였고, 건곤 두 괘의 지위, 생성, 작용, 특성 및 사람들이 어떻게 건곤을 본받을 것인가를 설명하였으며, 건도와 곤도로써 자기의 행동을 바르게 이끄는 문제를 설명하였다. 이 마지막 단락의 내용도 건의 덕과 곤의 덕을 설명하고 있으니, 곧 건곤 두 괘의 특성 및 사람들이 어떻게 건곤을 본받아서 실천할 것인가를 설명한 것이다.

乾知大始 坤作成物자는 주도하다() 관장하다()로 풀이해야 한다. 만물을 생성하는 문제에서 건은 굳건하고() 능동적임으로써() 사물의 시초를 주도하니, 건괘 단전에서 말한 만물이 이것에 의지하여 비롯된다는 것은 만물의 생성이 건을 통하여 시작된다는 것이다. 곤은 순종하고() 수동적임으로써() 사물의 완성을 담당하니, 곤괘 단전에서 말한 만물이 이것을 근거로 생장한다는 것은 만물이 결국 곤에서 생장 완성된다는 것이다.

乾知大始 坤作成物은 역괘에서 말하면 건곤 두 괘가 나머지 62괘를 생성하는 것이고, 자연계에서 말하면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점을 둔 것은 건곤이 62괘를 생성함이나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문제에 있지 않고, 건곤이 62괘를 생성하거나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건과 곤, 천과 지의 역할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지적한 데 있다. ‘乾知大始 坤作成物두 구절은 이미 건이나 천의 작용은 만물을 낳음(始物)’이고, 곤이나 지의 작용은 만물을 키움(成物)’이라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아직 부족하여 乾以易知 坤以簡能을 덧붙였다. 이 두 구절은 건과 곤의 특성을 드러낸 것이다. 쉬움()과 간단함()은 각각 건과 곤의 특성이다.

무엇이 쉬움()인가? 쉬움의 반대는 어려움이다. 쉬움은 바로 어렵지 않음이다.

乾以易知자는 여기에서 사태의 시초(開頭)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건은 쉬움의 특성을 가지고, 만물(곧 모든 괘) 창조를 시작하니, 매우 용이하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건이 쉬움의 특성을 갖는 근본적 원인은 쉬지않고 활동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건은 끊임없이 활동하기 때문에 주관적 의도가 없다. 건은 주관적 의도가 없기 때문에 만물(모든 괘)을 창조할 때 목적이 없다. 완전히 자연적이다.

무엇이 간단함()인가? 간단함의 반대는 복잡함이다. 간단함은 복잡하지 않음이다.

坤以簡能자는 여기에서 만든다()로 이해할 수 있다. 일을 완성함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곤은 간단함()’의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만물(모든 괘)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매우 간단하여 번잡하지 않을 수 있다. 곤이 간단함의 특성을 갖는 근본적 원인은 건을 따르는 성질에 있다. 왜냐하면 곤은 건을 따르기 때문에, 건은 주관적 의도가 없고, 곤도 주관적 의도가 없으며, 건은 목적이 없고, 곤도 목적이 없다. 건이 이미 일을 시작하면 곤은 순응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결코 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으니 어찌 간단함이 아니겠는가.

건의 쉬움과 곤의 간단함을 합하여 보면 저절로 그러하다’(自然)는 의미다. 건과 곤의 만물(모든 괘) 창생은 전혀 지능을 쓸 필요도 없고, 기력을 쓸 필요도 없이 자연히 만물을 낳고 만물을 완성한다. 한강백의 주에서 천지의 도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나(不爲) 잘 시작하고 애쓰지 않으나(不勞) 잘 완성하므로 쉽고 간단하다(易簡)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한씨의 설명은 기막히게 핵심을 찔렀고 실상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다(不爲)’ ‘애쓰지 않는다(不勞)’는 것은 󰡔노자󰡕천도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음이 없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사상은 󰡔노자󰡕와 다르다. 󰡔노자󰡕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여 사람을 자연상태로 끌고 들어가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계사전에서 건곤의 에 대한 이 해석은 비록 건곤이 자연무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또 자연무위를 긍정하지만, 계사전의 출발과 귀결은 인간을 자연상태로 끌어가서 되돌아올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계사전은 인간이 천지간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주관능동 작용을 중시하기 때문에 건곤의 쉬움과 간단함을 다 말한 뒤에 다시 인간과 인간의 사업으로 마루리하였다.

사람이 건곤의 쉽고 간단함을 본받으면 쉽게 알고(易知)’ ‘쉽게 따르며(易從)’, 쉽게 알고 쉽게 따르면 친함이 있고(有親)’ ‘공적이 있으며(有功)’, 친함이 있고 공적이 있으면 오래갈 수 있고(可久)’ ‘커질 수 있으며(可大)’, ‘오래 갈 수 있으면’ ‘현인의 덕이 되고, ‘커질 수 있으면’ ‘현인의 공적이 된다.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문제는 쉬우면 쉽게 알고 간단하면 쉽게 따른다(易則易知 簡則易從)’이고, 인류가 건곤의 쉽고 간단함을 본받는 것은 같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해와 친근, 복종과 참여를 얻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도덕과 사업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이와 같이 쉽고 간단함(易簡)의 본뜻을 이해하고 아울러 사업에 잘 응용할 수 있으면 바로 천하의 이치를 얻은 것과 같으며, 또한 천지 사이에 우뚝 서서 천지와 대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

 

2

 

聖人設卦觀象繫辭焉而明吉凶 剛柔相推而生變化. 是故吉凶者失得之象也 悔吝者憂虞之象也 變化者進退之象也 剛柔者晝夜之象也. 六爻之動 三極之道也.

 

성인은 괘를 베풀고 상을 살피고 말()를 달아서 인간사의 길흉을 밝혔다. 괘의 양효()와 음효()가 서로 밀쳐서 변화를 낳는다. 이런 까닭으로 길흉이라는 것은 잃고 얻음의 상이다. 뉘우치고 부끄러워 하는 것(悔吝)은 근심하고 두려워함의 상이다. 변화라는 것은 나아가고 물러남의 상이다. 강유라는 것은 낮과 밤의 상이다. 육효가 강에서 유로 유에서 강으로 변동함은 천인 삼극(三極)의 도이다.

 

이 단락부터 是以自天祐之 吉無不利까지가 제2장이다.

2장에는 큰 두 단락의 문장이 있다. 이 두 단락의 문장은 제1장에서 역 전체의 형성과정에 건곤 두 괘가 일으키는 중대한 작용을 밝힌 것에 기초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역괘 형성의 기본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聖人設卦觀象繫辭焉而明吉凶 剛柔相推而生變化두 구절은 단락 전체의 제목에 해당하며, 또한 문제를 제시한 것이고, 다음의 몇 구절은 이 제목을 해설한 것이다. 역을 만든 사람은 먼저 괘를 세웠으니 곧 64괘의 획을 그렸다. 예를 들면 건괘는 건상건하로 그리고, 곤괘는 곤상곤하로 그리며, 둔괘는 감상진하로 그리고, 몽괘는 간상감하로 그린다. 그 다음은 괘획 속의 상을 관찰한다. 마지막으로 말을 붙이니 괘와 효 아래에 문자를 달아서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이 괘와 효 아래 붙은 말을 보고 길흉을 알 수 있게 하였다.

剛柔相推而生變化의 강유는 괘 속의 음효와 양효이며, 음양과 강유는 본래 같은 것이다. 의 측면에서 보아 음양이라 하고, 의 측면에서 보아 강유라 한다. 괘 속의 효는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당연히 질의 측면에서 보며, 강유라고 말하고 음양이라고 하지 않는다. 괘사와 효사에서 효를 말할 때는 모두 강유라 하고 절대로 음양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64괘 가운데는 음양개념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강유가 곧 음양임을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강유는 서로 밀치니양효는 발전하여() 에 이르면 물러나고(退), 물러나서 에 이르면 변하여 음이 된다. 음효는 물러나서 에 이르면 나아가고, 나아가서 에 이르면 변하여 양이 된다. 음효와 양효는 이렇게 일진일퇴하니 이것이 바로 강유상추이다. ‘강유상추하여 변화를 일으킨다.

역의 변화두 글자와 오늘날 일상어인 변화와는 서로 같은 의미도 있고 다른 의미도 있다. 오늘날 쓰이는 단어 변화는 대체로 한 사물이 변화하여 다른 사물이 되거나 한 사태가 변하여 다른 사태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역의 변화두 글자도 오늘날 쓰이는 변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좁게 한정된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에서 변화는 양효(剛爻)가 변하여 음효(柔爻)로 되고, 음효가 변하여 양효로 되는 그 변화과정 자체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강유가 확정되지 않은 어떤 상황을 가리킨 것이다.

聖人設卦觀象繫辭焉而明吉凶 剛柔相推而生變化라는 이 두 구절은 실제로 괘효의 네가지 형상을 제시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64384효의 상이 비록 다종다양하지만 개괄하면 네 종류에 지나지 않으니, 바로 길흉(吉凶) 회린(悔吝) 강유(剛柔) 변화(變化). 맨 첫 구절의 而明吉凶은 실제로 悔吝을 내포하고 있다. 길흉과 회린은 인간사를 말한 것이고, 강유와 변화는 괘를 말한 것이다.

是故吉凶者失得之象也 悔吝者憂虞之象也 變化者進退之象也 剛柔者晝夜之象也라는 네 구절은 네가지 종류의 상의 의미를 더 자세히 말한 것이다.

길흉은 화복이 아니다. 󰡔주역󰡕은 길흉을 말하지 화복을 말하지 않는다. 화복을 말하는 것은 숙명론적 사상의 표현이다. 󰡔주역󰡕은 인간의 주체적 노력을 말하지 숙명론을 말하지 않는다. 길은 사업의 성공이니 곧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흉은 사업의 실패니 곧 잃는다()고 하는 것이다. 길흉과 득실은 미리 정해진 것에 따르지 않고, 전적으로 주체적 노력 여부의 결과이다. 󰡔주역󰡕은 상으로 사상을 표현하며, 상은 가장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사업의 득실은 괘의 길흉으로 표상하여 드러낸다. 괘의 길한 상을 보고 이득이 있을 것을 알며, 괘의 흉한 상을 보고 손실이 있을 것을 안다.

는 걱정스레 따져보는 것(憂慮)이고 는 조심스레 재어보는 것(虞度)이다. ‘憂虞는 주저하면서 결정하지 못함이니, 바로 길흉이 정해지지 않고 득실이 판단되지 않는 때다. 이러한 상태를 괘의 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悔吝이다.

은 길과 흉 둘 사이에 놓인다. 길과 흉은 두 극단이고, 회린은 그 사이에 있다. 회는 흉에서 길로 옮겨 가고 린은 길에서 흉으로 옮겨 간다. 사람이 걱정스럽고 괴로우며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반드시 우려하게 되지만, 우려는 곧 을 얻을 가능성을 가진다. 사람이 안락하고 멋대로 할 때 반드시 허물을 후회하게() 되므로, 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요약하면 는 길이 자라는 것이고, 은 흉이 자라는 것이다. 길흉과 회린 이상은 인간사를 말하였고, 강유와 변화 이하는 괘를 말하였다.

變化者 進退之象也변화는 무엇인가? ‘변화는 강이 유로 변하고 유가 강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진퇴는 무엇인가? ‘진퇴는 강유의 진퇴이다.

변화는 곧 괘에서 강유의 진퇴이다. 유의 본성은 물러남(退)이고, 이 이미 노성하여 다시 더 물러날 수 없으면 문득 나아가 이 되고 강이 된다. 이것이 곧 물러남(退)이고 또한 바뀜()이다. 강의 본성은 나아감()이니 가 이미 노성하여 다시 더 나아갈 수 없으면 문득 물러나 을 이루고 유가 된다. 이것이 곧 나아감()이며 또한 됨()이다. 변화는 바로 강유의 진퇴이고, 강유의 진퇴는 강유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이다.

剛柔者晝夜之象也주야는 일종의 비유며, ‘진퇴와 서로 대응한다. ‘진퇴는 바로 변화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고, 주야는 강이 유로 변하고 유가 강으로 변하여 이미 확정된 사실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니 낮과 밤이 분명히 구별되는 것과 같다. 변화를 말한 것은 강유가 바로 진퇴 미정임을 드러낸 것이고, 강유를 말한 것은 변화가 이미 확정되었음을 드러내니, 유는 이미 변하여 강이 되고 강은 이미 화하여 유가 된다.

강유와 변화의 관계는 112시진 가운데 자오(子午)와 묘유(卯酉)의 네 시진을 가지고 비유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는 한밤중이므로 밤임에 틀림없고, 음이며 유이고, 이것은 확정적이다. 는 한낮이므로 낮임에 틀림없고, 양이며 강이다. 이것은 확정적이다. 이른바 剛柔者 晝夜之象也라는 것이다. 는 해뜨는 시각이니 밤유가 낮강으로 해가는 과정에 있다. 강인지 아닌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는 해지는 시각이니 낮강이 밤유로 해가는 과정이며, 유인지 아닌지는 역시 확정되지 않았다. 이른바 變化者進退之象也라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강유와 변화의 관계는 길흉과 회린의 관계와 흡사하다. 길흉은 확정된 양끝이고 회린은 중간에서 길이나 흉으로 나가는 도중이다. 강유는 확정된 양끝이고 변화는 중간에서 유가 변하여 강이 되고 강이 변하여 유가 되는 과정에 있다.

六爻之動 三極之道也라는 한 구절은 위 문단의 결론이다. 六爻의 강유가 상호 작용하여(相推) 유가 변하여 강이 되고 강이 화하여 유로 되니, 모두 변동()이다. 6효는 물론 이렇게 운동하지만 모두 삼극(三極)의 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삼극은 괘 속의 천인 삼재(三才). 첫째와 둘째 효는 가 되고, 셋째와 넷째는 이 되고, 다섯째와 맨 위는 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주역󰡕이 이미 인간 자신을 천지 자연으로부터 분리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두고 천지와 나란히 일컬어 삼재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참으로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是故君子所居而安者易之序也 所樂而玩者爻之辭也. 是故君子居則觀其象而玩其辭 動則觀其變而玩其占 是以自天祐之 吉无不利.

 

이런 까닭으로 군자가 편안하게 따르는 것은 역의 순서이며, 즐겁게 보는 것은 효의 사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편안하게 쉴 때는 상을 살펴서 사를 보고, 일이 있어 움직일 때는 변하는 것을 살펴서 점을 본다. 이런 까닭으로 하늘이 도와서 길하고 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이 한 단락은 사람들이 어떻게 󰡔󰡕을 배울까 하는 문제를 설명하였다.

역을 어떻게 배울까 하는 문제는 사람들이 을 배울 때 마땅히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점을 지시한다. 하나는 󰡔󰡕의 순서에 편안히 따르고 즐거이 효사를 완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소 집안에 쉬면서는 을 보고 를 음미하며, 일을 벌여 활동할 때는 을 보고 을 음미하는 것이다. 앞뒤의 두 자는 의미가 다르다. 앞의 자는 활동함과 쉼(起居)자가 아니고, ‘居仁由義로서, 요컨대 몸이 자리잡은 곳(객관적 처지, )을 말한다. 뒤의 는 활동()에 대비되는 안정()을 말한 것으로 평상시라는 의미다.

󰡔󰡕의 순서는 곧 64괘의 차례이고, 차례란 시간의 차례다. 64괘의 배열 순서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괘는 한 시대를 대표한다. 한 시대는 한 시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비괘는 천지가 끊긴 상황이며, 꽉막혀 통하지 않는 시대이다. 군자는 비괘의 시대를 당하여서는 반드시 덕을 지키고 난을 피하여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 실천하고 처지에 편안해야 한다.

君子所居而安者 󰡔󰡕之序也이 한 구절은 실제로 군자가 󰡔󰡕을 배울 때, 우선 한 괘의 상황적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정확하게 대응해야 하며 , 그런 다음에는 괘 속의 각 효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所樂而玩者爻之辭也은 깊이 음이함(玩味), 깊이 사색함(玩索), 반복적 사색, 끝없는 연역(演繹)이다.

왜 효사만 말하고 괘사는 말하지 않았는가? 첫째 앞의 문장 所居安者󰡔󰡕之序也라는 말이 사실상 괘사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 하면 󰡔󰡕의 차례는 곧 괘의 차례를 말한 것이고, 괘의 차례를 말한 것은 괘를 말한 것이며, 괘를 말하는 것은 괘사를 떠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로 괘는 효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그 때문에 괘사는 훨씬 간단하여 파악하기 쉽다. 효는 괘에 비하여 변동이 미정이고, 그 때문에 효사의 상은 복잡한 경우가 많다. 그 의미는 하나가 아니어서 반복하여 생각하고 음미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의 차례에 편안히 따르고 효사를 사색하는 것은 󰡔󰡕을 배우는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는 한 측면이다.

위에서 효사를 음미하라는 것은 중점이 괘와 효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대응해야 함을 명확하게 지적하려는 데 있다. 괘에서는 편히 따라야 하고 효에서는 음미해야 한다. 여기서 를 음미하라는 것은 핵심이 에 대해 어떻게 달리 대응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다. ‘居則觀其象而玩其辭는 평상시에 일이 없으니 점을 치지 않고, 을 보고 를 음미한다는 것이다. 상은 괘상과 효상을 포괄하고, 사는 괘사 효사를 포괄한다. 상은 사와 견주어 보면 차이가 있지만 실제는 같다. 둘은 모두 괘효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다.

왕필은 말은 상을 밝히는 것이다라 하고, 상은 뜻을 표현해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은 의미를 드러내고 사는 상을 드러내며, 상은 저절로 분명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자세한 관찰이 필요하다. 도 깊이 숨겨진 뜻이 많아 반드시 반복하여 음미하는 데 힘써야 한다. 상을 보고 사를 음미함은 모두 괘효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므로 상을 보는 것과 말을 음미하는 것은 실제로 서로 관통하여 틈이 있을 수 없다.

평상시 무사할 때는 상을 보고 말을 음미할 수 있고, 일이 있어 점을 쳐야 할 때는 변화()를 보고 점을 음미한다’. 를 포괄하므로 변은 곧 변화다. 변화는 바로 진퇴며, 진퇴는 바로 강이 화하여 유가 되고 유가 변하여 강이 되는 과정이다. 󰡔주역󰡕은 효의 변화를 점치니 곧 을 점치고, 변하지 않는 효를 점치지 않으니 곧 은 점치지 않는다. 은 변효이다. 로 변할 수 있으니 강이 변하여 유가 되는 것이고, 은 변하여 이 될 수 있으니 유가 변하여 강이 되는 것이다.

평상시 편안히 쉴 때()는 상을 보고 사를 음미한다는 것은 자유로이 아무 괘나 효의 상과 말을 보고 음미하는 것으로 꼭 어떤 괘효를 지적하지 않는다. 만일 일을 벌이고 행동을 하고자 한다면 행동할 때는() 변괘를 보고 점을 음미해야 하니’, 6효가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변화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가 마땅히 어떻게 행사할까 하는 답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의 괘사나 효사를 확정하여 행동의 지침으로 삼고, 이모저모 생각하고 음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玩其占자는 옛사람들이 보통 괘사나 효사 중의 길흉과 회린으로 이해하였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가리키는 것은 변괘를 관찰함으로써 자기 행동 지침을 확정해주는 그 하나의 괘사와 효사이다. 물론 그 말 가운데 길흉이나 회린과 같은 글자가 있든 없든 모두 점이다.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하다. 반드시 이렇게 보아야 설명이 잘 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흉이나 회린과 같은 글자가 없는 괘효사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는가.

是以自天祐之 吉無不利이 두 구절은 전체 단락을 종합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점치는 목적은 길을 좇고 흉을 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앞에 말한 두 측면의 조건에 근거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조건이 허락하는 상황에서 최대한 주체적 노력을 다하고, 이룰 것은 모두 이루고 피할 것은 모두 피하여 결과적으로 불길하거나 불리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옛사람들은 점치는 측면에서 보아 하늘의 도움(天祐)’라고 부르는데, 사실은 모두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 있다.

 

3

 

彖者言乎象者也 爻者言乎變者也. 吉凶者言乎其失得也 悔吝者言乎其小疵也 无咎者 善補過也

 

단사는 상을 말한 것이고, 효사는 변화()를 말한 것이다. 길흉은 잃고 얻는 것(득실)을 말한 것이다. 뉘우치고 후회한다(회린)는 것은 조그만 허물을 말한 것이다. 허물이 없다(무구)는 것은 허물을 잘 보완한 것이다.

 

여기에서 各指其所之까지는 제3장이다.

3장도 계속하여 괘를 설명하고 효를 설명하며, 길흉을 설명하고, 회린을 설명한다.

彖者言乎象者也 爻者言乎變者也은 단사니, 단사는 곧 괘사다. 괘사는 한 괘의 상을 판단한 것이니 한 괘의 전체적인 설명이다.

는 효사이며, 효사는 한 효의 상을 설명한다.

한 괘는 한 시대를 반영한다. 한 시대의 특성은 한 괘의 괘상에서 표현되고, 한 괘의 괘상은 한 괘의 괘사로 설명된다. 한 효는 한 시대 중의 한 발전단계를 반영하며, 한 괘의 6효는 여섯 단계의 발전단계를 반영한다. 한 발전단계의 특징은 한 효의 효상으로 표현되고, 한 효의 효상은 한 효의 효사로 설명된다. 왕필이 괘는 때()이다. 효는 때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卦者時也 爻者適時之變也)”라고 하여, 괘와 효의 차이를 밝힌 것은 매우 정확하다. 괘는 주로 시대를 표현하고, 효는 주로 한 시대 내용의 각 단계 변화를 표현한다. 한 괘 안에서 괘는 상대적으로 안정 불변이고 효는 변한다. 그러나 64괘 전체에서는 64괘가 더욱 큰 하나의 발전과정이고, 각각의 한 괘는 모두 이 큰 발전과정 중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괘도 변화를 말한 것이다.

괘는 상이 있고, 효도 상이 있다. 마땅히 효도 상을 말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卦者言乎象爻者言乎變은 호응하는 글자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괘에 대하여만 말하였기 때문에 괘에서 을 강조하고, 효에서 을 강조하였다.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괘상 속에 효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으니, 변도 일종의 상이라는 점이다.

吉凶者言乎其失得也 悔吝者言乎其小疵也 无咎者善補過也이 몇 구절의 의미는 사를 음미()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데 있고, 사람들이 사를 음미할 때 길흉회린무구와 같이 괘사 효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알리는 데 있다.

길흉 회린무구는 근본적으로 잃음과 얻음(失得) 두 방향을 벗어나지 않으며, 다만 정도가 다를 뿐이다. 길흉은 크게 얻고 잃는 것이다. 회린은 작은 흠이고, 작은 흠은 작은 문제이며, 가벼운 병이다. 작은 흠은 결국 작은 허물이고, 작은 잘못이다.

는 뉘우쳐 고친다는 뜻이다. 뉘우쳐 고쳐서 으로 나가는 것은 좋은 일인데 어째서 작은 흠이라고 하는가? 그가 뉘우쳐 고치는 까닭은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잘못이 있으나 좋은 방향으로 바로잡을 줄 알기 때문에 작은 흠이라고 한다. 잘못이 있으나 고칠 줄 알아서 점점 허물 없음(무구)에 이를 수 있으므로 허물 없음(無咎)은 뉘우침()보다 나은 상태다.

무구는 사실 본래 허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허물을 잘 보완하여 허물 없는 데에 도달한 것이다. 허물 없음(無咎)과 뉘우침은 서로 긴밀하다. 괘사는 뉘우침은 말하지 않고 무구를 말하지만, 무구는 뉘우침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무구를 말하면 뉘우쳤음를 알 수 있다. 󰡔주역󰡕 가운데 또 누구를 탓할까(又誰咎)’란 말이 있고, ‘탓할 수 없다(不可咎)’란 말이 있다. ‘又誰咎는 사실 허물은 스스로 만든 것이어서 결과를 자기가 책임져야 하며, 다른 사람이 꼭 탓하지 않더라도 자기의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는 의미다. ‘不可咎는 잘못이 재주와 슬기의 부족 때문에 생긴 것이어서 양해할 수 있으므로, 비록 허물이 있으나 꼭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 흉은 서로 연결된다. 은 마땅히 뉘우쳐야 할 것인데 뉘우치지 않으니, 계속 발전해 가면 반드시 흉에 이르지만 아직은 흉에 이르지 않은 것이므로 작은 흠이라고 한다. 괘사에서는 흉을 말하고 린을 말하지 않았으니, 린은 작은 흠이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是故列貴賤者存乎位 齊小大者存乎卦 辯吉凶者存乎辭 憂悔吝者存乎介 震无咎者存乎悔. 是故卦有小大 辭有險易 辭也者 各指其所之.

 

이런 까닭으로 귀한 것과 천한 것을 벌여 놓는 것은 육효의 놓인 자리에서 드러나고, 작고 큰 것을 가리는 것은 괘에 있으며, 길흉을 판별하는 것은 사에 있다. 뉘우침과 후회를 근심하는 것는 선악을 구별하는 데 있고, 두려워해서 허물이 없는 것은 뉘우침에 있다. 이런 까닭으로 괘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으며, 사에는 까다롭고 쉬운 것이 있다. 사라는 것은 각각 그 갈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역󰡕은 귀천을 중시한다. ‘列貴賤者存乎位는 귀천의 구분이 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6효의 위치다. 6효는 아래에서 위로 가며, 위에 있는 것은 귀하고, 아래 있는 것은 천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효의 지위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위는 귀하고 아래는 천하다는 일반적 원칙 말고도 강유왕래(剛柔往來), 상하내외(上下內外), 득위(得位)와 실위(失位), 호응(互應)과 불응(不應) 등등이 모두 귀천을 표현할 수 있다.

齊小大者存乎卦의 요점은 小大이다. 작고 큼(小大)은 무엇을 가리켜서 한 말인가? 옛사람들의 설명은 같지 않다. 한강백의 주에서는 그 도가 광명하여 크다() 하고, 군자의 도가 줄어들어 작다() 한다고 설명하여, 󰡔주역󰡕에서 군자의 도와 군자의 덕을 크다 하고, 소인의 도와 소인의 덕을 작다고 한 의미로 풀이하였다. 이 해석이 정확하여 따를 만하다. ‘는 한강백의 주에 말로 분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齊小大는 작고 큰 것을 가리는 것이고, 군자의 도와 소인의 도를 분변하는 것이다. ‘齊小大者存乎卦는 작고 큰 것의 구분이고, 군자의 도와 소인의 도의 구분이며, 괘 속에서 보아야 한다. 괘는 곧 괘사며, 괘사는 음양을 통하여 작고 큼의 차이를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음의 도는 소인을 대표하고, 양의 도는 군자를 대표한다.

辯吉凶者存乎辭는 효사다. 앞 문장에서 말한 작고 큼을 가리는(齊小大)’ 문제는 괘사로부터 본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길흉을 판별하는(辯吉凶)’ 문제는 효사에서 본 것이다. 길흉의 문제는 귀천 소대(소대)의 문제에 비하여 복잡하다. 귀한 것도 길이 있고 천한 것도 길이 있다. 작은 것도 흉이 있으며 큰 것도 흉이 있다. 그러므로 효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길흉이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는다.

憂悔吝者存乎介悔吝은 길흉 사이에 자리잡는다. 길흉보다 미소하나 장차 변하여 길흉이 된다. 사태가 결국 흉의 상황으로 발전해가지 않도록 하려면 반드시 의 상태에서 일찍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야 한다. 이것을 存乎介라고 한 것이다. ‘는 실낱, 미세함의 뜻이다. 회린은 길흉의 미세함이고, 여기에서 말한 는 더 들어가서 회나 린으로 갈리는 미세한 실마리이다. 회린이 아직 싹이 트는 상태에 있을 때 기미를 살피고, 우려하고 예방하여 회린으로 커지지 못하도록 한다.

震无咎者存乎悔에서 은 두려워 떠는 것이다. 두려워하여 허물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은 뉘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無垢는 본래 허물이 있는 것이다. 허물 있는 것을 바꿔서 없도록 하려면 유일한 방법이 뉘우칠 줄 아는 것이다. 뉘우칠 줄 알면 허물을 없앨 수 있고, 뉘우칠 줄 알면 앞의 잘못을 소급하여 뉘우쳐서 기꺼이 고친다.

是故卦有小大 辭有險易. 辭也者 各指其所之는 괘의 작음과 큼(小大)을 군자 소인이란 측면에서 갈라낼 수 있고, 음양의 측면에서 갈라낼 수 있으므로, 둘은 일치하는 것이다. 실제로 좋은 괘는 대개 군자의 도를 반영한 괘이고, 양이 중심이 되는 괘다. 예를 들어 태괘(), 복괘(), 대유괘(大有)와 같은 것으로, 이 괘들은 모두 크다. 좋지 않은 괘는 대개 소인의 도를 반영하고, 음을 위주로 하는 괘로서 박괘() 비괘() 곤괘() 같은 것이니 곧 작다.

辭有險易는 괘사와 효사를 포괄한다. 괘사와 효사가 명백하고 구체적이고 뚜렷하며 깨치기 쉬운 것을 라고 부르고, 기이하고 구석지며 어렵고 깊어 알기 어려운 것을 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괘가 크면 말이 쉽고, 괘가 작으면 말이 험하다. 예를 들어 복괘() 六二休復吉’(아름답게 돌아오니 길하다) 이라는 말은 평이하고 명백하나, 곤괘() 上六困于葛얼올’(칡덩굴에 얽힌듯 불안 속에서 어려워한다) 라는 말은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괘의 대소를 막론하고, ()이 쉽고 어려운 것은 모두 군자에게 경계하고 힘쓰게 하며 소인에게 권장하고 독려하는 것이다.

辭也者 各指其所之所之(나아갈 방향)’는 실제로 좇는 것과 피하는 것, 두 방향이다. 말이 어렵고 쉬움은 각각 갈 곳을 가리키니’, 이것은 곧 괘사나 효사가 쉬울 때() ‘갈 방향()’은 평상()으로 돌아가서 사람에게 을 좇도록 하고, 괘사나 효사가 어려운 때 갈 방향으로 가서 사람에게 흉을 피하도록 한다. 흉을 피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로 돌아가도록 지시하는 것이다. 이미 작고 큼의 분별이 있으니 군자는 괘의 상을 보아서 편안히 따르는 것이 늘 같을 수 없다. 이미 말의 어렵고 쉬움의 차이가 있으니 군자는 괘와 효의 말을 음미하여 즐기는 것도 한 가지일 수 없다.

 

4

 

易與天地準 故能彌綸天地之道.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知幽明之故.

 

역은 하늘과 땅에 맞먹는다. 그러므로 천지의 도를 망라한다. 위로 우러러서는 천문을 보고 아래로 구부려서는 지리를 살핀다. 그러므로 음미한 것과 드러난 것(幽明)의 근원을 안다.

 

여기서부터 故神無方而易無體까지가 제4장이다.

이 장은 거시적 관점에서 󰡔주역󰡕이란 위대한 저작의 사상적 폭과 깊이 및 철학적 의의를 논술하였다.

易與天地準자를 주희는 대등하다()’로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역여천치준의 뜻은 󰡔주역󰡕이라는 책과 천지는 대등하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역󰡕이란 책은 천지의 법칙에 비추어서 만든 것이고, 천지의 복사본이다. ‘그러므로 천지의 도를 망라한다’.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之理 是故知幽明之故에서 는 무엇인가? ‘(쓰다, 이용하다)이다. 무엇을 쓰는가? 󰡔󰡕을 쓴다. 왜냐하면 󰡔󰡕천지의 도를 망라했기때문이다. 옛사람이 말한 천문은 해별을 가리키며, ‘지리라고 한 것은 산과 내, 언덕과 구릉을 가리킨다. 별의 운행에 따라 흐리고 맑고 춥고 더움이 생기며, 산과 내, 언덕과 구릉이 길러주기 때문에 새와 물고기, 동식물이 있다.

는 깊숙이 숨은 것이니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은 밝게 드러남이니 보아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幽明은 전반적으로 만물의 생생변화 속에 나타나는 두 가지 상황을 가리킨다.

는 원인이다.

知幽明之故는 만물의 생생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상황의 근본 원인은 하늘과 땅이 만물을 시작하게 하고(資始) 생장하게 하는(資生) 변화를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Posted by 샤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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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與天地準, 故能彌綸天地之道.仰以觀於天文,俯以察於地理,是故知幽明之故.

 

易與天地準(역여천지준), 故能彌綸天地之道(고능미륜천지지도).仰以觀於天文(앙이관어천문),俯以察於地理(부이찰어지뢰),是故知幽明之故(시고지유명지고).

 

은 천지의 법칙에 준거하여 이루진 것이므로, 천지의도를 포섭한다. 우러러서 보아서 천문을, 굽어보아서는 지리를 살핀다. 이런 까닭에 幽明의 원인을 아다.

 

여기부터 이하 故神无方而易无體까지는 제4장이다. 이장은 거시적 각도에서 周易이 위대한 저작의 사상 넓이와 깊이 및 철학의의를 논술한다.“易與天地準자는 주희는 로 해석하였다. 그럼 易與天地準의 뜻은 바로 周易이란 책과 천지는 같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말하면 周易은 천지의 법칙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천지의 모사본(模寫本)이므로 故能彌綸天地之道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知幽明之故

는 무엇인가? “는 용이다. 무엇을 씀인가? “을 씀이다. 왜냐하면 역은 彌綸天地之道 이기때문이다. 옛날사람이 천문이라 말한것은 해..별을 가르키며 이른바 지리는 산.하천.언덕.진펄을 가리켜 말한다. ..별의 운행으로 말미암아 흐림과 맑음, 추움과 더움이 생겨나고, .하천.진펄의 양육으로 말미암아 나는 새와 물고기, 동물과 식물이 있게된다.

유는 깊이 숨음이고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명은 드러남으로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유명은 일반적으로 만물이 생성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표현해 내고 있는 두 종류의 상황을 가르킨다.

고는 원인이다. 知幽明之故는 만물이 생성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표현해 내는 두 종류의 상황을 알 수 있음을 말하며 그 근본 원인은 천지라는 두 가지 큰 시작인 근원인 천과 생성의 근원인 지가 발생하는 변화에 있다.

 

 

原始反終,故知死生之說. 精氣爲物,游魂爲變,是故知鬼神之情狀.

 

사물의 시초를 미루어 사물의 종말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정기는 물이 되고 유혼은 변이 된다. 이런 까닭에 귀신의 정황을 알수있는 것이다.

 

原始反終󰡔경전석문󰡕 에 의거하면 어떤 책에는 原始及終으로 되어 있는 데 原始及終이 아마도 옳은것 같다. 문맥의 이치를 보나,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해 쉽게 혼동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 납득이 간다. 사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사람은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 사람에게 태어남과 죽음이 있고, 사물에 시작과 마침이 있는 이치는 똑 같다. 시작을 미루어 보면, 바로 마침에 이르니及終마침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같은 이치로, 을 알면 를 아니, 태어남을 미루어 보면,죽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말하기를 생을 알지 못 하는 데 어찌 사를 알겠느냐 라고 하였다. 공자는 일에는 시작과 마침이 있고 사람에게는 태어남과 죽음이 있다는 문제에 관하여 매우 현명하게 파악하고 대처 하였다.

故知死生之說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삶을 적극적으로 영위해 나감을 말한다. 공자가 이해한 삶과 죽음의 문제는, 도가(道家)가 주장하는 제생사(齊生死. 삶과 죽음의 문제를 똑같이 여김)’, ‘민생사(生死.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함)’, ‘경생사(輕生死.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볍게 여김)’, ‘임생사(任生死. 삶과 죽음의 문제는 내버려 둠)’, 등의 사생관(死生觀)과는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공자는 인생관에 있어서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현실주의자로, 죽음의 문제는 그대로 놔두고, 삶의 문제는 더욱 중시 하였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精氣爲物이 형체를 이루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물의 모임이다.

游魂爲變은 물이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아도 알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또한 물의 흩트러짐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영원히 쉬지 않고 흩어졌다 모이고,있다가 사라지고, 하는 운동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운동 변화는 사람이 파악하고 예측하여 알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는 그것을 귀신이라 말한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귀신은 정황이 없다고 하나, 󰡔󰡕에서는 귀신은 정황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에서 말한 귀신은 어떠한 신비도 갖고 있지 않고 다만, 세상의 모든 만사만물이 흩어지고 모이고, 있다가 사라지는 과정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은 그것을 조화의 흔적이며 음양이기(陰陽二氣)의 양능(良能)이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말한 유명(幽明), 사생(死生), 귀신(鬼神)은 모두 유물론의 명제이다. , 유명, 사생, 귀신은 (사람의 생명과정 속에 내재된 것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현상을 말한 것인데, 󰡔󰡕에서는 바로 이러한 현상들을 반영하여 설명한다.

 

 

與天地相似, 故不違.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 旁行而不流, 樂天知命, 故不憂. 安土敦乎仁, 故能愛.

 

󰡔󰡕과 천지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어긋나지 않는다. 지혜는 만물에 두루 미치고 도는 천하를 구제하기 때문에 지나침이 없다. 두루 행하지만 추호도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자연과 자연(사회)의 객관법칙을 기꺼이 다른다. 그런 까닭에 근심하지 않는다. 편안히 거처하고 인에 돈독하니 만인과 만물을 사랑할수 있다.

 

與天地相似, 故不違는 윗 문장 易與天地準과 의미가 서로 통한다. 󰡔󰡕은 하늘과 땅의 모사본(模寫本) 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이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는가에 따라 󰡔󰡕 또한 바로 그 모양을 갖추고 있게 된다. 그러므로 󰡔󰡕과 천지는 어긋남이 없다. 어긋남이 없는 것은 또한 서로 비슷하고 같은 것이다. 󰡔󰡕은 천지와 더불어 그 을 합하고 그 밝음을 합하고 그 길흉(吉凶)을 합한다. 우주 사이에는 천지가 있으면, 󰡔󰡕에는 건곤이 있다. , 천지는 만물을 낳고, 건곤은 64를 낳는다. 천지에 유명, 사생, 귀신이 있음에, 󰡔󰡕에 또한 유명, 사생, 귀신이 있다. 󰡔󰡕의 발전변화는 천지의 발전변화를 반영한다. 공자는 생각하기를, 천지는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 또한 자연적인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천지와 󰡔󰡕에서는 어떠한 인위적 작용도 있을 수 없다.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에서 천지에는 마치 지혜가 있는 듯하고, 그 지혜는 만물에 두루 미친다. 천지의 법칙은 세상의 모든 사물 가운데에 퍼져 있어 털끝만큼의 빠트림이나 잘못됨이 있을 수 없다. 󰡔󰡕과 천지는 완전히 똑같아, 󰡔󰡕의 지혜는 64괘 가운데 널리 존재하고 또 자연계 만사만물의 문제를 두루 반영한다. 또한 󰡔󰡕의 도는 만사만물의 법칙을 두루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물, 모든 문제는 모두 󰡔󰡕의 작용범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화에 대해서 말하자면, 조화는 보편적이면서, 세밀하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은 모두 조화의 작용을 벗어날 수 없으니, 절대로 빠트림이나 잘못됨이 있을 수 없다. 또한 󰡔󰡕도 마찬가지로, 보편적이면서 세밀하고, 포용하는 폭 또한 넓고 크며, 작용이 완전히 갖추어져,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旁行而不流旁行은 보편의 의미이고, ‘는 어떤 책에는 로 되어 있다. ‘不流는 사실 不違’, ‘不過와 뜻이 비슷하다. ‘旁行而不流이 구절은 앞의 구절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를 보강한 것이다.

樂天知命,故不憂’, 이 구절의 주어는 마땅히 󰡔󰡕이어야 하고, 동시에 󰡔󰡕을 배우는 사람이다. 대체적인 의미는 의 문제를 설명한 것으로, 아랫 구절에서 의 문제를 설명한 安土敦乎仁과는 서로 대조가 된다. 󰡔󰡕에서 말하는 지는 매우 깊이가 있고, 높은 단계의 것으로, 이미 자연과 자연의 객관법칙을 순순히 따라서 근심하지 않음의 수준에로 까지 인식되어 진다. 천은 자연계이고 樂天은 바로 자연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다. 은 사람의 의지로는 바꿀 수 없는 객관법칙으로, ‘知命은 바로 객관의 법칙을 승인함과 아울러 그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다. 맹자가 그렇게 함이 없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은 천이고, 이르게 함이 없는데도 이르는 것은 명이다.’ 라고 말한 것도 천을 자연으로 생각하고 명을 법칙으로 생각하였으니, 모두 󰡔󰡕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맹자와 󰡔󰡕은 천과 명을 모두 저절로 그러하여 그러한 것 이고,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이해 하였기 때문에 의지적이며 주재적인 내용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요컨대, 인격화된 상제와 상제의 의도는 모두 아니다. 󰡔󰡕 중에는 상제의 지위를 드러내 놓지 않는다. 󰡔󰡕의 사상과 󰡔역대전(易大傳)󰡕을 지은 공자의 사상은 일치한다. 공자의 사상은 아마도 󰡔󰡕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매우 큰 것 같고, 󰡔󰡕의 사상 또한 공자의 󰡔역대전󰡕으로 말미암아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공자가 일찌기 말한 오십에 천명을 터득했다, ‘오십에 󰡔󰡕을 배움에 크게 잘못됨이 없었다라고 한 것과, 여기의 樂天知命의 뜻은 실제로 상통한다. 왜냐하면, 천지자연과 그 법칙을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름지기 오십세에 이르러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은 자연 및 사람의 일人事, 그 법칙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을 배우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가령 󰡔󰡕에서 말한 천명이 상제와 상제의 의도라고 한다면, 어찌 오십에 이르러서야 만이 천명을 터득할 수 있단 말인가? 상제의 보살핌이 있다면 어찌 또한 󰡔󰡕을 배워야만 허물이 없단 말인가? 󰡔󰡕 가운데 천명 이 한단어의 함의는 의심할 것 없이 객관법칙이며 필연성이다. 󰡔󰡕은 자연과 사회, 천과 인, 주체와 객체를 함께 고찰한다. 세계가 어떤 모습인가에 따라 󰡔󰡕 또한 바로 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어긋남이나, 지나침不違不過不流이 없다. 세계는 쉬지않고 끊임없이 운동변화하고 있으며, 󰡔󰡕 또한 쉬지않고 끊임없이 운동변화하고 있다. 󰡔󰡕에는 모든 자연과 사회의 법칙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 자연(사회)의 객관법칙을 순순히 따르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고樂天知命故不憂’, 󰡔󰡕을 배우는 사람도 자연과 자연(사회)의 객관법칙을 순순히 따르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 “樂天知命故不憂는 역의 이지이성의 일면을 표현하고, 아랫 구절 安土敦乎仁, 故能愛는 역의 정황과 인성(人性)의 일면을 표현한다. 이 점은 노자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노자는 말하기를 천지가 불인하니 만물은 하찮은 것이 된다.” 라고 하니 󰡔󰡕에서는 지혜로움과 자애로움을 함께 언급하며, 󰡔󰡕 가운데에는 인이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한다. 󰡔󰡕 중에는 자애로움이 이미 있으므로 도는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 󰡔󰡕을 배우는 사람은 편안히 거처하고하니 인에 돈독하니 만인과 만물을 사랑할 수 있다.

 

 

範圍天地之化而不過, 曲成萬物而不流, 通乎晝夜之道而知, 故神无方而易无體.

 

천지의 조화를 규정하니 지나치지 아니하며, 만물을 곡진하게 이루어 빠뜨리지 않으며, 낮과 밤의 도에 통하여 안다. 그러므로 은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고, 역은 일정한 형체가 없다.

 

 

이 제4장은 모두 사실 음양이라는 한 쌍의 개념을 통하여 󰡔󰡕의 철학적의의를 논술한 것이다. 󰡔장자󰡕 「천하(天下)역은 음양을 설명한 것 이다라는 말의 정확성은 이 단락에서 음양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증명이 된다. 󰡔󰡕에서 말하는 , , 은 그 명칭은 다르나 실제로는 같은 개념으로서 모두 음양이다. 즉 음인지 양인지 헤아릴 수 없음을 ,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 음양이 낳고 또 낳는 것을 이라고 일컫는다.

여기에서 天地之化는 음양의 , 만물은 음양의 형체를, ‘晝夜는 음양의 이치를 말한다. ‘範圍는 테두리를 만들고 제약함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치지 못함이 없으니 곧 이다. 즉 역과 천지의 조화는 일치한다. 이는 대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만약 상세한 부분을 들춰내 언급한다면, 그것은 또한 각기 다른 다양한 종류의 사물을 곡진하게 이룰 수 있지만 빠뜨리거나 빼놓는 경우는 없다.

通乎晝夜之道而知, 이 구절은 옛날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제로 주야의 도는 곧 음양의 도이다. 세상의 만사만물에는 음양이라는 두 측면이 있고, 이 음양 두 측면은 또한 유명, 혹은 주야의 두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확대하여 보면 굳셈과 부드러움剛柔, 죽음과 삶死生,움직임과 고요함動靜, 크고 작음大小, 넓고 좁음闊狹,길고 짧음長短, 모남과 둥금方園및 인사(人事)의 흥성과 쇠락함, 다스려짐과 어지러움治亂, 나아감과 물러남進退, 존재함과 망함存亡,잃고 얻음失得이 되는데 이는 모두 음양이며 또한 주야이다.

神无方에서 은 일정한 방향과 소재가 없다고 하는 까닭은 신은 음인지 양인지 헤아릴 수 없어서 갑자기 음이 되고 또한 갑자기 양이 되기 때문이다. ‘은 상하사방이다. 신은 혹은 여기에도 있고, 혹은 저기에도 있어서 전혀 일정치 않다. 그러므로 神无方이라 한다.

易无體에서 역은 당연히 형체가 없다. 왜냐하면 역은 음양이 낳고 또 낳아 쉬지않는 것으로, 어떤 때는 음에서 양으로, 어떤 때는 양에서 음으로 되는 변동의 과정이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조금도 확정된 형체를 가지고 있지않다. 마치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것처럼 서로 엇갈린 것이 번갈아 듦으로 그것이 결국 무엇인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라고 말한다. 역의 특징은 형체가 없다는 점이다. 정이()역은 변역이다. 때에 따라 변역하니 이것으로서 도를 따른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通乎晝夜之道易知이기 때문에 신은 한자리에 정체한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으며, 역은 변역함므로 일정한 형체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은 음양주야의 두 측면에 모두 통한다는 말로 만약 양은 통하는데 음은 통하지 않고, 낮은 통하는데 밤은 통하지 않고, 생은 통하는데 사는 통하지 않고, 명은 통하는데 유는 통하지 않는다면 바로 알지 못한다. 또한 이것은 신이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역은 일정한 형체를 가지게 있다는 말이다.

 

5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라고 한다. 도를 찾아 이어가는 것은 이고, 이를 이어받아 완성한 것이 이다. 어진 사람은 그것을 보고 이라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보고 라고 하는데, 일반 사람들은 매일 매일 도를 쓰면서도 그 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를 갖춘 사람은 드물다.

 

여기부터 음양불측지위신까지가 제5장이다. 이 장에서는 도의 의미를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一陰一陽之謂道에서 一陰一陽을 말하는 것과 음양을 말하는 것은 같지 않다. 음양을 말함은 곧 를 가르키는 것으로, 기는 형이하의 것이어서 실제 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만물은 기가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기는 반드시 음양 두 측면으로 나누어지는데, ‘낮과 밤晝夜추위와 더위寒暑흐림과 맑음陰晴움직임과 고요함動靜굽힘과 폄屈伸말함과 잠잠함語黙위와 아래上下앞과 뒤前後왼쪽과 오른쪽左右차고 기움숨음과 나타남隱顯및 군자와 소인 등등 같은 것은 모두 한가지 사물의 음양의 두가지 측면이다. 음양 두 측면은 서로 마주하여 작용하고 있어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된다. 사실 이것은 바로 사물이 대립하고 통일하는 관념에 대하여 단지 음양이라는 통속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一陰一陽이란 기가 움직이는 어떤 법칙을 말하며 그것은 형이상으로 텅 비어 있어서 볼 수 없다. 단지 음양만을 말할 때는 도라고 할 수 없고 일음일양이라고 말할 때 비로소 도인 것이다. 음양을 말함은 단지 사물이 음양의 두 측면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므로, 사물의 운동발전변화를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一陰一陽이란 사물은 반드시 운동발전변화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물의 운동발전변화는 반드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는데, 일음일양이 바로 이 법칙이다. 일음일양은 음이 바뀌어 양이 되고 양이 바뀌어 음이 됨을 말한다. 한편 음은 또 바뀌어 양으로 되고, 양은 또 바뀌어 음으로 된다. 음양이 교대로 번갈아 가며 운동하니 사물은 비로소 발전이 있게 된다. 길을 가는것에 비유하면 왼발과 오른발이 서로 교대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되고, 또한 시간의 흐름에 비유하면 반드시 낮과 밤, 오전과 오후, 여름과 가을겨울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길을 걷는데 왼발은 움직이고 오른발은 움직이지 않으며, 시간에 낮은 있고 밤은 없다면, 사람은 곧바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시간도 장차 멈출 것이다. 일음일양이란 말은 기의 유동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진(戴震)도란 행함이다. 기의 변화가 어느 곳이나 흘러가니, 낳고 또 낳아 그치지 않는다.” 라고 말하였는데 매우 합당한 표현이다.

繼之者善也는 계속해서 끊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도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생성하여 그침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이다. 선은 큰 시작은 좋음의 으뜸이다.”의 선이다. 대진의 󰡔원선(原善)󰡕에 의하면 선은 세가지 방면을 포괄한다. 끊임없이 생성하여 그치지 않음이 이며, 끊임없이 생성하되 조리가 있음이 이고, 조리가 있으면서도 경계가 분명하여 어지럽힐 수 없음이 이다.“氣化流行, 生生不已의 도는 일종의 완전하여 결함이 없는 이상상태에 놓여있다는 말인데 이것이 바로 선이다.

成之者性也.”氣化流行, 生生不已의 선이 일단 구체화되어 어떤 구체사물을 형성할 때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다. “도에서 나뉘어지는 것을 명이라 하고, 일에서 드러나는 것을 성이라 한다.” 이것은 繼之者善成之者性의 두 관계에 대한 매우 적절한 설명이다.

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는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하는데, 이 도는 오직 한 개가 있을 뿐이고 세상의 만사만물 가운데에 있어서 그것은 있지 않은 곳이 없고,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부분만 인식하고, 어떤 이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도는 일음일양의 두 측면이 있다. “繼之者善也만물을 만들어 자라게 하는 공적을 말한 것으로化育之功을 말한 것으로 이 하는 일이며, “成之者性也는 생물의 일을 말하며 이 하는 일이다. 음과 양은 서로 대응한다. 음은 이고 양은 이다. 사람들은 도의 일면만 보고 곧바로 도의 전체라 여긴다. 양의 일면만을 본 사람은 도는 바로 인이라 생각하며, 음의 일면만 본 사람은 도는 바로 지라고 생각한다. 도를 인이라고 또는 지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인과 지를 함께 보고 음과 양을 함께 체득하여야만 비로소 도의 전체 모습를 파악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의 경우, 날마다 도와 접촉하지만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도에 익숙하지만 살피지 않고, 도를 수행하지만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쓰지만 알지 못한다.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는 도에 대해서 전면적이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지, 결코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도라 한다의 자연의 도가 적다는 말은 아니다. 자연의 도가 영원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은 많고 적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에서 드러내고 쓰임에서 감춘다. 만물을 부추기되 성인과 같은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 대한 옛날 사람들의 해석은 설이 분분하여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사실 이 단락에서 말한 것은 󰡔󰡕의 효용이다. ‘󰡔󰡕의 응용을 가리키고, ‘󰡔󰡕을 쓰지 않음이다. 사람들이 시초를 응용하여 점을 칠 때, 󰡔󰡕의 인은 드러난다. 그것은 사람들의 행동을 지도하고 길흉회린무구를 알려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길함을 쫓고 흉함을 피하도록 노력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顯諸仁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 그것은 바로 점대와 괘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藏諸用이다. 주희가 일찌기 하나의 형상의 비유로 顯諸仁, 藏諸用의 함의를 설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한 과수나무에 비유하면, 한줄기 뿌리는 많은 나뭇가지와 잎, 꽃과 열매를 생겨나게 하는데 이것이 顯諸仁이다. 한편 결실의 때가 되면 하나의 씨앗은 어린나무로 성장하는데 이것이 藏諸用이다.”라고 하였다. 이 비유는 顯諸仁, 藏諸用두마디 말의 이해를 명백히 드러내는 의의가 있다.

는 동사로 鼓萬物󰡔󰡕64괘를 응용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부딪히는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에는 사상이나 의식이 없고, 사려와 작위가 없다. 성인은 󰡔󰡕과 같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은 사람들의 행동을 지도하는 성인과 같지 않다. 성인이 얼마나 총명예지하든지 관계없이 결국 그 역시 사려와 작위가 있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하를 근심할 수 있고, 천하를 위하여 걱정할 수 있으나 󰡔󰡕은 그와 같이 할 수 없다. 그러나 결코 세상에서 󰡔󰡕의 공적이 성인보다 작다고는 할 수 없다.

 

 

盛德大業至矣哉, 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 生生之謂易, 成象之謂乾, 效法之謂坤, 極數知來之謂占, 通變之謂事, 陰陽不測之謂神.

 

성대한 공덕과 위대한 업적이 지극하도다!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것을 큰 사업이라고 하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성대한 공덕이라고 한다. 낳고 낳음을 역이라 하고, 을 이루는 것을 이라 하고, 본받는 것을 이라 하고, 수를 모두 다 셈하여 돌아올 일을 아는 것을 이라 하고, 통하여 변하는 것을 일이라 하고, 음인지 양인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이라 한다.

 

󰡔󰡕은 세상에 공덕이 있는 것이 결코 성인에 비하여 작지 않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성대한 공덕과 위대한 업적이 지극하도다盛德大業至矣哉라고 하였다. 성대한 공덕과 위대한 업적은 윗 글의 顯諸仁, 藏諸用을 감탄하여 찬양한 것이다. 성대한 공덕은 顯諸仁을 말하고, 위대한 업적은 藏諸用을 말한다.

富有之謂大業이하로부터는 󰡔󰡕에서 항상 사용되는 여덟가지 개념에 대해 간명하고도 정확하게 해석한 것이다. “富有之謂大業大業은 무엇인가? 대업의 특징은 富有이다. ‘부유는 크고 밖이 없어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공간상에서 󰡔󰡕은 천지만물을 포용한다는 말이다.

日新之謂盛德盛德은 무엇인가? 성덕의 특징은 日新이다. ‘일신은 장구하면서 끝이 없고, 변하여 통하되 그침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곧 시간상에서 󰡔󰡕은 천지만물의 변화발전을 포괄한다는 말이다.

요컨데 󰡔󰡕은 광대하면서도 자세하게 갖춘 것이고, 우주는 모두 그것이 드리우고 있는 속에 있다. 그것은 다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장구하기 때문에 영원무궁하다. 󰡔󰡕은 사려와 작위가 없다. 성인과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덕과 대업이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성인과 같다.

生生之謂易은 진일보하여 󰡔󰡕의 성질까지 말한 것이다. 이 역은 먼저 객관세계에서 존재하는 어떤 바뀜을 말한 것이지 󰡔󰡕이라는 책을 말함은 아니다. 이 역은 무엇인가? ‘낳고 낳음生生을 역이라 일컫는다. 역은 음양을 말한다. 음양은 결코 신비스럽지 않으며 음양은 바로 사물 자신의 대립통일의 두가지 측면이며 통속적으로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된다.一分爲二라고 부른다. 역은 음양을 말한다. 그러나 음양이 결코 역은 아니다. 음양이 낳고 또 낳아야만 비로소 역이라 할 수 있다. 음양이 낳고 또 낳는다는 것은 곧 양은 음을 낳고, 음은 양을 낳으며, 양은 또 음을 낳고, 또 음은 양을 낳아, 낳고 또 낳음이 무궁하고 멈춤이 없다는 것이다. ‘자는 여기에서도 또한 전환의 뜻이다.

太極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가 바로 生生의 내용이다. 역의 괘는 바로 이러한 음양이 낳고 또 낳아 형성된 것이다. 먼저 한 개의 음과 양을 그리고, 또 각각 한 개의 양과 한 개의 음을 포개니 사상(四象)을 생성하고, 사상의 한가지 상은 또 한 개의 양과 한 개의 음을 포개니 바로 팔괘가 생성하고, 팔괘의 각 한 괘를 분별하여 팔괘와 포개니 결국에는 64괘를 생성한다. 역은 자연계의 모사본으로 음양 양의가 낳고 또 낳아 멈춤이 없는 과정이다. 자연계 또한 음양 두 기가 낳고 또 낳아 멈춤이 없는 과정이다. 공자는 󰡔󰡕生生之謂易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다시 명확하게 설명하는데, 역은 바로 변화라고 하였다. 공영달(孔潁達)이 말하길 역은 변화의 총 부호로, 변화하는 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라 한 것과 정이()가 말한 역은 변역이다. 때에 따라 변역하니 이로서 도를 따른다.”라 한 것은 모두 바꿀 수 없는 역의 정의이다.

成象之謂乾, 效法之謂坤은 건과 곤 두가지 개념을 해석한 것이다. 건과 곤 두 개념은 󰡔󰡕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계사전처음에서 말하기를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 “乾道成男, 坤道成女.”라고 하였고, 뒷 부분에서 또 말하기를 乾坤毁則无以見易”, “易不可見, 則乾坤或幾乎息矣.”이라 하였는데 건과 곤이 여기에서 가리키는 것은 이미 64괘의 대표가 되는 건곤 두괘 자신이고, 또한 그 나머지 62괘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성된다. 건곤은 즉 乾坤其易之文邪의 건곤이다. 이 뒤 또 하나의 건곤의 의미는 바로 음양 양의이다. 건은 하늘을 상징하며 양이고, 곤은 땅을 상징하며 음이다. ‘건은 하늘이고 곤은 땅이다은 옛날 사람들이 생각한 가장 큰 음양 두 짝이었다. 문제는 成象之謂乾成象效法之謂坤效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앞에서 주역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먼저, ‘成象效法는 두가지 종류의 같지않은 작용이고, 또한 두가지는 한 과정의 두가지 단계라 말할 수 있다. 두가지 단계에서는 또한 건이 먼저이고 곤은 나중이며, 하늘이 먼저이고 땅은 나중이며, 양은 먼저이고 음은 나중이며, ‘成象은 먼저이고 效法은 나중이다. 그 다음, 양에 속하는 모든 것은 단지 이 있을 뿐인데 애매모호하여 윤곽이 결코 분명하지 못하였다. 맨 나중은, 음이 반드시 있어야만 작용을 시작한다. 음의 작용은 본받음인데 본받음을 말한 옛날 사람들은 매우 많다. 실제로 계사전의 다른 한 구절인 在天成象, 在地成形에 근거하면 效法은 또한 成形이다. 성형 또한 바로 양에 의해서 이미 확립된 간략하고도 조잡한 윤곽인데 자세함을 더하여 볼 수 있는 형태를 갖추게 한다. 앞에서 항상 언급한 건()은 만물을 시작하게 하는 것으로 이른바 萬物資始이고, 즉 곤()은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것으로 이른바 萬物資生이다.

極數知來之謂占은 곧 이다. 계사전의 뒷 부분에서 기록한 점치는 방법筮法에 의하면, 천수(天數)5이고 합하면 25가 되며, 지수(地數)5이고 합하면 30이 된다. 천지의 수를 합하면 55가 된다. 55중에서 사용되는 숫자는 49인데, 세번 분이(分二)괘일()설사()귀기(歸奇)4단계를 반복 진행하여 혹은 7, 혹은 8, 혹은 9, 혹은 6을 얻어낸다. 79를 얻어 양효를 그리고, 68을 얻어 음효를 그린다. 이와 같이 6번 반복하여 한 괘가 이루어진다. 한 괘를 얻어내면 바로 미래에 어떻게 노력해야만 흉함을 피하고 길함을 쫓아 쟁취하고, 사업의 성공을 구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極數知來이고 또한 바로 점이다.

通變之謂事은 사람이 시초를 뽑아서 괘를 구하는 문제를 말한다. ‘󰡔󰡕의 점이고 는 사람의 일이다.

陰陽不測之謂神이 구절은 윗 글에서 언급한 一陰一陽之謂道生生之謂易의 두 구절과 대조하여 볼 수 있다. 세 구절은 세가지 개념에 대한 정의이다. 세가지 개념 즉 은 실제로는 한가지 사물을 바라보는 세가지 관점이다. 이 한가지 사물은 바로 음양으로, 만약 음양이 어떤 곳에 고정되어 있어서 움직이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라고 부른다. 기가 움직이고 변하기 시작하면, 명칭은 같지 않게 된다. 때에 따라 음이 되기도 하고 양이 되기도 하니, 음양이 교체하고 변동하는 어떠한 것을 말하여 라고 한다. 즉 음은 양을 낳고, 양은 음을 낳으며, 음양이 낳고 또 낳아 그치지 않는 것을 이라 한다. 음인지 양인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이라 한다. 무엇을 不測이라 하는가?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둘이 있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다이라 하였다. 시초를 뽑아 괘를 구하는 과정에서 7896 가운데 어떤 것을 얻을지는 예측할 수 없다. 왜 예측할 수 없는가? 점의 결과가 음일 수도, 양일 수도 있는 두가지 종류의 가능성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의 변화는 64384, 굳셈과 부드러움이 갈마들어 쓰며剛柔迭用, 위에 있을지 아래에 있을지 일정하지 않으며上下無常, 두루 상하 사방으로 흐르기周流六虛때문에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역의 수많은 변화는 오직 음양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6

夫易廣矣大矣, 以言乎遠則不禦, 以言乎邇則靜而正, 以言乎天地之間則備矣.

 

바뀜은 넓고 크다. 멀리로 말하면 역은 천지를 막라하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역을 막아낼 수 없고, 가까이로 말하면 어느 곳에서나 고요히 바르다. 우주 전체에서 말하면 역은 넉넉하게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여기부터 易簡之善配至德까지가 제6장이다. 이 장은 󰡔󰡕이란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넓고 크며, 천지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말한다.

夫易廣矣大矣󰡔󰡕의 도가 넓고 크다는 것을 찬양한 것이다. ‘은 곤을 가리키고, ‘는 건을 가리킨다.

以言乎遠則不禦는 먼 곳에서 말하면, 천지를 막라하고 형체가 있던 없던간에 󰡔󰡕은 모두 들어갈 수 있어서 어떠한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이다.

以言乎邇則靜而正은 가까운 곳에서 말하면, 󰡔󰡕의 도가 접촉하는 곳은 모두 보이는데 비록 작고,가깝고, 비루한 일이나 물에 이르기까지 배열하여 조치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모두 그것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以言乎天地之間則備矣는 모든 우주에서 말하면, 혹은 하늘, 혹은 땅, 혹은 , 혹은 일, 혹은 사람, 혹은 모두 󰡔󰡕의 법칙 가운데 포괄되어 있어, 󰡔󰡕은 포용함이 없지 않고, 갖추고 있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넓고 크며 갖춤, 이것은 앞에서 말한 富有之謂大業富有를 말한 다.

 

 

夫乾其靜也專, 其動也直, 是以大生焉. 夫坤其靜也翕, 其動也闢, 是以廣生焉.

 

건은 그 고요함이 한결같고, 그 움직임이 곧다. 이래서 큼이 생긴다. 곤은 그 고요함이 합쳐지고, 그 움직임이 펼쳐진다. 이래서 넓음이 생긴다.

 

건곤은 󰡔󰡕의 문이고 󰡔󰡕이 간직한 것이다. 따라서 󰡔󰡕의 특징은 건곤 두 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의 큼은 건으로부터 나오고, 󰡔󰡕의 넓음은 곤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의 큼은 건으로 표현되고 󰡔󰡕의 넓음은 곤으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건의 큼과 곤의 넓음은 건곤의 으로 다르게 표현된다. 건은 동을 주로 하지만 또한 정도 있다. 곤은 정을 주로 하지만 동도 있다. 건곤의 정태로부터 드러남이 같지 않음을 알 수 있고, 건곤의 동태로부터 상호의존적 관계를 알 수 있다. 건의 정은 한결같음이다. 왜냐하면 건은 알갱이이면서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결같다. 건의 동은 곧음이다. 왜냐하면 건은 저절로 그러하여 스스로 움직이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앞에 거칠 것이 없으니 아무런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이다. 건이 고요하면 한결같고, 움직이면 곧바르다는 말은 바로 그것이 나타내는 실제 모습에서 말한 것으로 고요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크다고 한다. 곤의 고요함은 합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곤은 텅 빈듯하지만 둘이어서 마치 한 물건의 반쪽을 나타내는 것 같고, 두 개의 반쪽이 합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다. 따라서 곤이 고요한 까닭은 합쳐지기때문이다. 곤의 움직임은 펼쳐짐이다. 왜냐하면 두 개의 반쪽이 합하기 시작하는 것은 이기 때문에 두 개의 반쪽이 열려 펼쳐지는 것은 바로 이다. 곤의 정과 동은 합하고 펴는 것으로 표현된다. 곤이 고요하면 합쳐지고, 움직이면 펼쳐진다는 것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에서 말하면, 그것은 비길데 없이 넓다고 한다.

요컨데 건과 곤의 넓고 큼은 바로 역의 넓고 큼이고, 역의 넓고 큼은 건곤의 넓고 큼으로부터 생긴다.

 

 

廣大配天地, 變通配四時, 陰陽之義配日月, 易簡之善配至德.

 

넓고 큼은 하늘과 땅에 짝하고, 변하여 통함은 네 계절에 짝하고, 음과 양이 변화하는 법칙은 해와 달에 짝하고, 쉽고 간단한 것의 좋음은 지극한 덕에 짝한다.

 

위의 몇 구절은 역의 넓고 큼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여기의 몇 구절은 역의 넓고 큼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는 서로 비슷하고 서로 대등하다는 말이다. 역의 넓고 큼은 천지와 서로 비슷하다. 역은 건과 곤 두 방면을 포괄하고 건은 실이면서 또한 동을 주재하여 역의 큼을 대표한다. 곤은 텅 빈듯하지만 또 정을 주재하고 도량이 광활하고 만물을 포용하여 역의 넓음을 대표한다. 역의 광대함과 천지는 서로 비슷하고 서로 대등하다. 역이 변화하고 통함은 마치 항상 양변해서 음이 되고, 항상 음이 변해서 양이 되듯이 가고 오는 변화는 네계절이 번갈아 교대하는 것과 비슷하다. 역의 음양변화와 해와 달은 서로 유추하고 서로 비슷하다. 󰡔󰡕의 도는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여 마치 해가 뜨면 낮이 되고, 달이 뜨면 밤이 되듯이 해와 달, 낮과 밤이 임없이 바뀌는 것과 같다. 이상 세 구절은 󰡔󰡕과 자연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

易簡之善配至德이 구절은 󰡔󰡕과 사람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 ‘易簡󰡔󰡕지극한 덕知德이고, 󰡔󰡕의 최고 추상인 동시에 최고 단계의 특징을 말한다. ‘易簡은 쉬우면서도 어렵지 않다는 말로 건에 속한다. ‘易簡은 간편하면서 번잡하지 않다는 말로 곤에 속한다. ‘이간을 근본적 측면에서 말하면 곧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저절로 그러함이다. 본래의 뜻은 이와 같아서 무조작의 의미이다. 역의 이간과 성인의 지극한 덕은 서로 비슷하고 서로 대등하다. 성인의 지극한 덕은 유가의 주장에 따르면 중용(中庸)이다. 중용의 본 모습은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으로, 어떤 일을 처리함에 때에 따라 행하여 가장 적합한 것을 찾는 것이다. 중용의 실천을 위해서는 매우 어려운 수양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역이 쉽고 간결하다는 점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성인의 지극한 덕을 살피면 된다.

 

7

子曰󰡔󰡕其至矣乎! 󰡔󰡕聖人所以崇德而廣業也. 知崇禮卑, 崇效天, 卑法地, 天地設位而󰡔󰡕行乎其中矣. 成性存存, 道義之門.

 

공자가 말하였다. 󰡔󰡕은 지극하도다! 󰡔󰡕은 성인이 덕을 높이고 사업을 넓히는 원리이다. 지는 높고 예법은 낮추어, 높임은 하늘을 본받고 낮춤은 땅을 본받는다. 하늘과 땅이 자리를 베풀어 󰡔󰡕이 그 가운데에서 행하니 본성을 이루어 간직함이 도의(道義)의 문이다.

 

이 단락은 제7장이다. 이 장은 성인이 어떻게 역을 배워야 실제에 응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말한다. ‘는 공자이다. 󰡔역대전󰡕은 공자가 쓴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의미는 󰡔역대전󰡕의 사상이 공자의 것이라는 말이지 공자가 󰡔역대전󰡕 전체를 썼다는 의미는 아니다. 옛날 사람들이 을 말할때 지금의 의미와는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어떤 책을 누가 지었다고 하면 이것은 반드시 그 책은 그 사람에 의해 직접 쓰여진 것을 말하지만, 옛날 사람들이 작을 말한 것은 종종 이와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역대전󰡕의 경우 더욱 복잡하여 어떤 것은 공자가 직접 쓴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어떤 것은 공자가 생존시에 말한 것을 제자들이 추기한 것을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아마도 공자가 그 이전 사람들의 학설을 취한 것일 수 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子曰은 당연히 두번째 경우에 해당된다.

󰡔󰡕其至矣乎는 공자가 󰡔󰡕에 대해 감탄한 것이며 문장방식은 󰡔중용󰡕에 씌여져 있는 공자의 다른 한 구절 中庸其至矣乎와 같다. 이 말은 지극한 곳에 도달하여 더 이상 부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는 의미이다.

󰡔󰡕, 聖人所以崇德以廣業也󰡔󰡕은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은 성인이 덕을 높이고 사업을 넓히는 원리이다. ‘崇德은 곧 그 덕을 받들어 높힌다는 의미로, 사람의 수양을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廣業즉 일을 크게 넓히는 것은 일의 공적을 성취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성인은 인품이 지극히 높은 현명한 군주를 지칭하는 것으로 공자의 이상속에 있는 최고 통지자을 말한다. 공자는 성인은 마땅히 덕과 사업의 두 방면으로 역을 배우고 응용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아마도 󰡔󰡕은 덕과 사업 두 방면에서 성인에게 지도를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고의 통치자로서 말하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실 도덕과 사업의 두 방면이다. 그런데 󰡔󰡕은 이 두 방면의 문제를 충분히 대답하고 있다.

知崇禮卑의 문제를 말한다. , 또는 와 서로 관계가 있다. “知崇禮卑는 지식의 문제를 말한 것으로 고명할수록 더욱 좋다. ‘는 행동의 문제를 말한 것으로 겸손하여 물러남이니 겸양할수록 더욱 좋다. ‘는 높을수록 좋다. 그러므로 성인이 지식을 얻는 것을 어떤 사람은 하늘의 지고지존한 모습을 본받으려는 것이 곧 성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崇效天이다. 예는 낮출수록 좋다. 그러므로 성인은 행위와 사업에서는 땅의 겸허하고 양보하는 모양을 본받으려 한다. 그러므로 卑法地이다. 󰡔󰡕에서 건은 하늘을 본받고 곤은 땅을 본받기 때문에 이른바 崇效天, 效法地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건괘와 곤괘를 본받는다는 의미이다. 건괘와 곤괘를 본받는다는 것은 󰡔󰡕을 본받아서 󰡔󰡕의 가르침을 배운다는 의미이다.

天地設位而易行乎其中矣이것은 天尊地卑’, ‘乾坤定矣를 말한 것으로 󰡔주역󰡕은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내며, 건곤의 위치가 일단 확립되면 연이어 그 나머지 62괘를 낳는다는 의미이다. “易行乎其中矣와 아래에서 말하고자하는 乾坤其󰡔󰡕之蘊邪, 乾坤成列而󰡔󰡕立乎其中矣의 의미는 서로 같다. 이 구절은 윗 글을 총결한 말이다. 성인은 을 숭상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를 숭상해야 하니, 를 숭상하려면 하늘을 본받아야 한다. 사업을 넓히려면 또한 예를 행함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예를 행함에 자신을 낮춘다는 말은 땅을 본받는다는 의미이다. 하늘과 땅을 본받는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을 배우고 󰡔󰡕을 응용함이다. 왜냐하면 󰡔󰡕천존지비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成性存存, 道義之門成性은 제5장의 成之者性也와 의미가 비슷하나 똑같지는 않다. “成之者性也는 그 앞 구절 繼之者善也에 연이어 나오며, 여기의 成性은 앞 구절 天地設位而易行乎其中矣에 연이어 나온다. ‘成性란 항상 󰡔󰡕으로서 덕을 숭상하고 사업을 넓힌다는 의미이며, 결국 그것으로 하여금 본성을 이루고자한다는 의미이다. ‘存存은 보존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일 成性存存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道義之門이니 즉 도의가 따라 나온다는 의미이다. 전체단락의 대의는 만약 사람이 하늘과 땅을 본받아 地崇禮卑할 수 있으면 成性存存하고 道義之門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8

聖人有以見天下之, 而擬諸其形容, 象其物宜, 是故謂之象. 聖人有以見天下之動, 而觀其會通, 以行其典禮, 繫辭焉以斷其吉凶, 是故謂之爻

 

성인은 세상의 만사만물 가운데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도리를 관찰하고, 그 모양새를 본뜨며 그 사물에 알맞게 그려낸다. 그런 까닭에 이라 한다. 성인이 세상의 움직임을 보고 모두 하나로 모여 통하는 것을 살펴 그 모범법칙을 실행하며 말을 붙여 그 길하고 흉함을 판단한다. 그런 까닭에 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道之招也까지가 제8장이다. 이 장은 󰡔󰡕을 지은 사람이 어떻게 괘효의 을 건립하였으며 어떻게 괘사를 연결했는가의 문제들에 대하여 말한다. 이 단락의 전반부는 어떻게 괘효의 상이 세워졌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후반부는 효사를 어떻게 연결했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의 상은 세 종류에 불과하다. 첫째, 괘의 획은 양의 기획(奇劃)과 음의 우획(偶劃)을 상징한다. 둘째, 여덟가지 중심괘의 상은 하늘〕․〕․바람〕․우뢰〕․〕․〕․〕․연못의 종류와 같다. 셋째, 각각의 64괘는 일과 이치에 의거하고 때에 따라서 스스로 취한 상이다. 예를 들면 牝馬之貞’, ‘白馬翰如’, ‘載鬼一車 등등과 같다. ‘은 그윽하고 깊음이다. ‘는 본뜸이다. 󰡔󰡕을 지은 사람은 세상의 만사만물 가운데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다양한 도리를 관찰하여 조목조목 나누어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기획과 우획으로 사물이 음양으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두 큰 측면을 표현하였으며, 택 등으로 사물의 서로 다른 여덟 종류의 성질을 표현하였다. 한편 그는 乾元亨利貞未濟亨, 고흘, 淪其尾 등으로 64종의 서로 다른 시대를 표현하였다. 潛龍勿用’, ‘白馬翰如’, 東隣殺牛不如西隣之등으로 64괘 내에서의 384효의 변화를 표현하였다. 상은 추상성과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한 상은 같은 종류내에서 있는 다양한 일과 이치를 대표하는데, 자신의 상황에 의거하여 이해한 것에 따라 󰡔󰡕을 쓴다. 만일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단지 일과 이치를 딱 잘라 말할 수 있다. 책은 󰡔󰡕󰡔󰡕이지 결코 󰡔󰡕은 아니다. 󰡔󰡕 또한 상징적이다. 󰡔󰡕의 비유는 흥취를 표현하니 이것이 곧 상징함이다. 그러나 󰡔󰡕의 상은 구체적이며 확정적이다. 󰡔󰡕의 한 상은 단지 한가지 일 또는 한가지 이치를 말할 따름이다. 그러나 󰡔󰡕의 상에서 한 상은 수 많은 일과 수 많은 의미를 반영할 수 있다. 󰡔󰡕을 지은 사람은 어떻게 괘의 상과 효의 상을 세웠는가? 바로 그 모습을 본뜬 것이며擬諸其形容이며 또한 각 종류의 사물의 다른 모습을 묘사하며, 아울러 그 사물을 올바르게 본뜬다象其物宜하니 괘의 상 또는 효의 상이 그 분수에 합당하도록 할 수 있다. 건괘를 예로 들자면, 󰡔󰡕을 지은 사람은 천의 상을 취하여 건을 형상화했으니 건은 씩씩함이고 천 또한 씩씩함이다. 천으로 건을 형상화함은 매우 적절하다. 건괘의 육효는 건의 씩씩함이 발전변화한다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에 이때에 여전히 하늘을 취하여 효의 상을 만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므로 건의 육효는 용의 상을 취하는데 이것은 용은 씩씩하면서도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건의 씩씩함은 이것의 변화하는 모습대로 반영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왜냐하면 괘는 사물이 드러내는 모습을 본뜬것이며 또한 사물의 올바른 모습을 상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이라 말한다.

聖人有以見天下之動및 그 이하의 여러 구절은 효사를 말한 것인데 그중에서 會通’, ‘典禮의 두마디가 가장 관건이다. 무엇이 효인가? 효와 괘를 비교하여볼 때 그 의미는 다르다. 괘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爻也者, 效天下之動者也즉 효는 천하 사물의 운동변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사물의 동태는 가장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추측하여 단정하기 쉽지 않다. 󰡔󰡕을 지은 사람은 먼저 천하사물의 운동변화를 관찰한 이후에 운동변화의 회통을 중점적으로 관찰하였다. 회통은 무엇인가? ‘는 모임이니 한 효는 하나의 변화하는 곳이다. 이 점은 아마도 수 많은 의미가 함께 모여있는 것 같아서 그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이것이 통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니 은 곧 통달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여러 상황중에서 가장 합당한 것을 가려내어 변화하는 점의 특징의 의미를 효사로 지어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준괘(屯卦) 初九爻는 적어도 세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괘의 하단에 있어서는 아직 나갈 수 없다. 이것이 준의 의미이다. 둘째, 건곤은 여기에서 처음 교차하여 험난함을 만나니 또한 준의 의미이다. 세째, 풀이 땅을 뚫고 나오는 듯하나 아직 뻗어 나가지 못하니 또한 준의 의미이다. 모든 의미는 여기에 모여진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인 것을 찾으려 하는 것이며 행하여 통하는 의미가 나온다. 이러한 한개의 의미를 찾아내면 바로 통한다. 磐桓利居貞, 利建候는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준괘 초구효의 세가지 의미를 반영하고 또한 사람의 행동방향을 가리켜준다.

以行其典禮에서 은 항상이란 의미가 있다. ‘는 여기에서 행위행동을 가르킨다. ‘典禮는 바로 행위의 준칙규범이다. 한 효의 효사를 추측하면 見天下之動而觀其會通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행동을 표현하며 행위규범과 부합하도록 한다. “繫辭焉以斷其吉凶은 위에서 말한 방법에 따라 설명을 부가한 것으로 길흉을 판단한다는 말이다.

是故謂之爻는 그러므로 효라고 부른다는 말이다.

 

 

言天下之至而不可惡也, 言天下之至動而不可亂也.

 

천하의 지극히 그윽하고 깊은 곳을 말하되 부정적인 태도로 해서는 안되고, 천하의 지극한 움직임을 말하되 어지럽지 아니한다.

 

앞의 구절은 괘를 말한다. 역에서 괘는 천하사물의 가장 오묘한 도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정적 태도로 이것을 보면 안된다. 뒷 구절은 효를 말한다. 역에서 역에서 추측한 효사는 천하사물의 가장 번잡한 운동형태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조잡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擬之而後言, 議之而後動, 擬議以成其變化.

 

을 헤아린 다음에 말하고, 의논한 다음에 움직이니 본받고 의논하여 그 변화를 이룬다.

 

이것은 역을 배우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역을 배우는 사람 또한 역을 지은 사람과 같이 상에서 이것을 추측한 이후에 말해야 한다. 또한 역을 지은 사람은 효에서 이것을 의논한 이후에 움직여야 한다. 추측함과 의논함으로, 사물의 변화를 파악하고 말과 행동을 삼가해야 한다. 때의 변화를 장악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두 쟁취하여 힘들여 얻는다면 아마도 좋은 결과에 이를 것이다.

Posted by 샤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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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六藉用白茅無咎 子曰 苟錯諸地而可矣 藉之用茅 何咎之有 愼之至也 夫茅之爲物薄而用可重也 愼斯術也以往 其無所失矣 勞謙君子有終吉 子曰 勞而不伐 有功而不德 厚之至也 語以其功下人者也 德言盛 禮言恭 謙也者 致恭以存其位者也 亢龍有悔 子曰 貴而無位 高而無民 賢人在下位而無輔 是以動而有悔也 不出乎庭 無咎 子曰 亂之所生也 則言語以爲階 君不密則失臣 臣不密則失身 幾事不密則害成 是以君子愼密而不出也 子曰 作易者其知盜乎 易曰 負且乘 致寇之 負也者 小人之事也 乘也者 君子之器也 小人而乘君子之器 盜思奪之矣 上漫下暴 盜思伐之矣 慢藏誨盜 冶容誨淫 易曰 負且乘 致寇至 盜之招也

 

初六藉用白茅無咎(초륙자용백모무구) 子曰(자왈) 苟錯諸地而可矣(구착제지이가의) 藉之用茅(자지용모) 何咎之有(하구지유) 愼之至也(신지지야) 夫茅之爲物薄而用可重也(부모지위물박이용가중야) 愼斯術也以往(신사술야이왕) 其無所失矣(기무소실의) 勞謙君子有終吉(노겸군자유종길) 子曰(자왈) 勞而不伐(노이부벌) 有功而不德(유공이부덕) 厚之至也(후지지야) 語以其功下人者也(어이기공하인자야) 德言盛(덕언성) 禮言恭(례언공) 謙也者(겸야자) 致恭以存其位者也(치공이존기위자야) 亢龍有悔(항롱유회) 子曰(자왈) 貴而無位(귀이무위) 高而無民(고이무민) 賢人在下位而無輔(현인재하위이무보) 是以動而有悔也(시이동이유회야) 不出乎庭(부출호정) 無咎(무구) 子曰(자왈) 亂之所生也(난지소생야) 則言語以爲階(칙언어이위계) 君不密則失臣(군부밀칙실신) 臣不密則失身(신부밀칙실신) 幾事不密則害成(기사부밀칙해성) 是以君子愼密而不出也(시이군자신밀이부출야) 子曰(자왈) 作易者其知盜乎(작역자기지도호) 易曰(역왈) 負且乘(부차승) 致寇之(치구지) 負也者(부야자) 小人之事也(소인지사야) 乘也者(승야자) 君子之器也(군자지기야) 小人而乘君子之器(소인이승군자지기) 盜思奪之矣(도사탈지의) 上漫下暴(상만하박) 盜思伐之矣(도사벌지의) 慢藏誨盜(만장회도) 冶容誨淫(야용회음) 易曰(역왈) 負且乘(부차승) 致寇至(치구지) 盜之招也(도지초야)

 

 

(대과괘의) 초육에서 제물의 밑에 깔기 위해 흰 띠풀을 사용한다. 허물은 없다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제물은 그냥 땅에 놓아도 좋다. 그런데 그 밑에 띠풀을 사용하는 데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삼가는 마음이 지극한 것이다. 띠풀은 하잘 것없는 것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가치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삼가하며 나아가면 실패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겸괘의) 구삼에서 힘쓰고도 겸손하다. 군자가 죽을 때까지 이를 지키면 길하리라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힘쓰고도 자랑하지 않고 업적이 있어도 덕이라 하지 않으니 도타움의 극치이다. 이것은 공덕이 있으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덕스런 말은 성대하고 예의 바른 말은 공손하다. 겸손은 공손을 다함으로써 그 지위를 보존한다라고 하였다.

(건괘의) 상구에서 끝까지 날아 오른 용은 후회가 있다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존귀하나 지위가 없고 지위가 높아도 백성이 없다. 현인이 자기보다 아래에 있으나 보필함이 없다. 이러하므로 행위하면 후회가 있다고 한다.

(절괘의) 초구에서 집 뜰을 나가지 않는다. 허물은 없다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어지러움이 생기는 것은 말이 씨가 되기 때문이다. 임금이 주도면밀하지 못하면 신하를 잃게 되고 신하가 주도면밀하지 못하면 제 몸을 잃게 된다. 나라의 기밀이 누설되면 나라에 해로움이 초래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주도면밀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는다고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주역󰡕을 지은이는 도둑의 생리를 살필 줄 아는가 보다라고 하였다. (해괘의) 육삼에서 짊어지고 또 탄다. 도둑을 오게 만드는구나라고 한다. 짐을 등에 지는 것은 신분이 천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수레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타는 기구이다. 그런데 신분이 천한 사람이면서 신분이 높은 사람이 타는 수레를 타면 도둑이 빼앗을 마음을 먹는다. 즉 웃사람은 게으르고 아랫사람이 난폭하면 도둑은 칠 마음을 먹는다. 간수에 태만하면 도둑질을 불러 일으키고, 얼굴을 현란하게 화장하면 음탕함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주역󰡕에서 짊어지고 또 탄다. 도둑을 오게 만드구나라고 한 것은 도둑은 스스로 불러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이상 다섯 단락의 서술은 위의 鳴鶴在陰同人先號而後笑라는 문장과 그 의미가 같다.

藉用白茅無咎는 대과(大過)괘 초육의 효사이다. 공자는 이 효를 읽고 일을 함에 지극히 신중하여 하나라도 잃음이 없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勞謙君子有終吉은 겸()괘 구삼의 효사이다. 공자는 이 효를 읽고 공손함을 다하여 그 지위를 지켜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亢龍有悔는 건()괘 상구의 효사이다. 공자는 이 효를 읽고 귀하면서도 지위가 없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백성이 없고 어진 사람이 아랫자리에 있으나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움직이면 후회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不出乎庭 無咎는 절()괘 초구의 효사이다. 공자는 이 효를 읽고 언어가 신중하고 면밀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負且乘 致寇之는 해()괘 구삼의 효사이다. 공자는 이 효를 읽고 마땅히 타지 않아야 할 것을 타면 도둑을 부른다고 생각하였다.

 

9

天一 地二 天三 地四 天五 地六 天七 地八 天九 地十 天數五 地數五 五位相得而各有合 天數二十有五 地數三十 凡天地之數五十有五 此所以成變化而行鬼神也

 

하늘은 1이고 땅은 2이다. 하늘은 3이고 땅은 4이다. 하늘은 5이고 땅은 6이다. 하늘은 7이고 땅은 8이다. 하늘은 9이고 땅은 10이다. 하늘수는 다섯이고 땅수도 다섯이다. 다섯 자리가 서로 사이좋게 각각 합치니, 하늘수의 합은 25이고 땅수의 합은 30이다. 하늘수와 땅수의 합은 55이다. 이것이 변화를 낳고 신비로운 일을 행하는 이유가 된다.

 

여기부터 其知神之所爲乎까지가 제9장이다. 이 장은 점치는 법을 설명한다. 점치는 법은 매우 중요하여 󰡔주역󰡕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며, 철학적 의미에서 말해도 결코 괘의 중요성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고대에는 한 종류의 점치는 법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주례(周禮)󰡕 「춘관서인(春官筮人)에서는 아홉 가지의 점치는 법을 제시한다. 애석하게도 뒤에 와서 대부분의 점치는 법이 전승되지 못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단지 계사전에 남아 있는 한 종류의 점치는 법만을 볼 수 있다. 이점은 우리가 공자에게 감사하여야 한다. 그가 만약 역전에 적어 놓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이 한 종류의 점치는 법조차 볼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天一地二…… 天九地十라는 글이 어떤 의미이고 천과 지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주석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많은 책들도 시원스레 설명하지 못한다. 주희가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하도(河圖), 낙서(洛書)로 해석한 것은 맞지 않다. 사실 천과 지는 결코 신비하지 않다. 천과 지는 곧 음과 양이다. ‘天一地二등은 자연수를 두 유형으로 나눈 것이다. 홀수는 하늘수라고 부르고 양의 수라 부른다. 짝수는 땅수라고 부르고 음의 수라고 부른다. 천과 지, 음과 양, 홀과 짝은 한통속이어서 천은 홀수를 대표하고 지는 짝수를 대표한다. 1,3,5,7,9는 홀수이고 하늘수라고 부른다. 2,4,6,8,10은 짝수이고 땅수라고 부른다. 하늘수와 땅수, 홀수와 짝수는 부르는 방식이 다르지만 실제로는 같아서 대립의 통일이란 의미이다. 여기에서 1부터 10까지 말하고 멈추는데 10은 매우 중요한 숫자이다. 인류학에 의하면 인류의 초기에 2만을 인식하고 그 다음 3을 인식하고 5를 인식하였으며, 그런 다음에야 10을 인식하였다고 한다. 하나의 수에서 다음의 수를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 진보였으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련의 학자인 柯斯文(?)의 저작인 󰡔원시문화사강原始文化史綱󰡕에서는 원시 부족의 언어 중 2라는 것은 단지 한 사물의 절반 두 개를 의미한다고 하니 10으로 발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들의 조상은 10을 가득찬 수로 보았다. 수가 10까지 발전하자 가득찬 듯하다고 생각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10,000도 가득찬 수로 보았다. 󰡔좌전󰡕 장공(莊公) 16년 조에는 “(정나라 왕이 말하기를) ‘공숙의 자손이 정나라에서 끊기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10월에 (공숙을) 정나라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또 좋은 달이다. (왜냐하면) 가득 찬 수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不可使共叔無後於鄭 使以十月入 曰 良月也 就盈數焉)”라고 하여 10을 좋은 수, 가득찬 수라고 본다. 두예(杜預)의 주에서는 수는 10에서 가득찬다(數滿於十)”고 하고, 공영달(孔穎達)의 소()에서는 계사전에서 天一地二天三地四天五地六天七地八天九地十이라고 말하면서 10에서 그만두었으니 수가 10에서 가득찬 것이다(繫辭傳云 天一地二天三地四天五地六天七地八天九地十 至十而止 是數滿於十也)”고 하였다. 󰡔좌전󰡕 민공(閔公) 원년에 필만의 자손은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만은 가득 찬 수이기 때문이다(畢萬之後必大 萬盈數也)”라고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수가 10에 이르면 이미 가득 차고 10,000에 이르면 가장 크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10을 작은 채움(小盈), 10,000을 큰 채움(大盈)이라고 불렀다. ‘만물자는 가장 많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좌전󰡕 희공(僖公) 4년 공영달의 소에서 “10은 수의 작은 완성이다(十是數之小成)”고 말한다. 옛날 사람은 특별히 10이라는 작은 채움[小盈], 작은 이룸[小成]의 수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계사전에서 말하는 점치는 법은 10과 관련이 있다.

天數五 地數五 五位相得而各有合에서 天數五1,3,5,7,9 다섯으로 하늘수이다. ‘地數五2,4,6,8,10 다섯으로 땅수이다. 10 이내의 다섯 홀수와 다섯 짝수이다. ‘五位相得이란 12가 서로 사이좋고 34가 서로 사이좋고 56이 서로 사이좋고 78이 서로 사이좋고 910이 서로 사이좋다는 것을 말한다. ‘各有合은 다섯 하늘수의 합이 25와 같고 다섯 땅수의 합이 30과 같다는 것이다. 2530을 더하면 55가 된다. 이것이 凡天地之數五十有五이다. 󰡔주역󰡕의 모든 변화가 신비하여 짐작할 수 없는 것은 다섯 하늘수와 다섯 땅수가 합하여 55가지의 변화를 낳기 때문이다. ‘五十有五의 변화는 7,8,9,6이라는 네 수를 낳는다. 7,8,9,6의 변화로부터 효가 생기고 효로부터 괘를 만든다. 이른바 成變化而行鬼神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大衍之數五十 其用四十有九 分而爲二以象兩 掛一以象三 揲之以四以象四時 歸奇於扐以象閏 五歲再閏 故再扐而後掛

 

대연의 수는 50(55)이지만 사용하는 것은 49이다. (49) 둘로 나누어서 하늘과 땅 양의(兩儀)를 상징한다. 한 손에서 1개를 떼내어 따로 가짐으로써 하늘, , 인간 3(三才)를 상징한다. 나머지 시초를 4개씩 덜어내니 이는 4계절을 상징한다. 4개씩 덜어낸 나머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다음 두 손의 나머지를 내려놓음으로써 윤달을 상징한다. 윤달이 대개 5년에 두 차례 있으므로 그 이치를 상징하여 나머지를 두 번 손가락 사이에 끼운다.

 

󰡔주역󰡕의 점치는 법은 하늘수와 땅수에서 시작한다. 이른바 대연의 수는 1에서 10까지의 열개의 하늘수와 땅수의 총합이다. 계사전大衍之數五十은 사실 五十有五이어야 한다. 옛날 책에서 有五두 글자를 빼먹은 것을 후세의 사람들이 살피지 않고 마침내 여러가지 해석을 지어냈다.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의 해석은 기기묘묘하고 모두 틀렸다. 주희의 해석도 틀렸다. 총괄하자면 역대의 인물들은 모두 오십으로 해석하였다. 실제로는 五十이 아니라 五十有五이다. 󰡔역위󰡕(易緯) 건착도(乾鑿圖)에서 이미 五十有五를 말하였다. ‘大衍之數 五十有五 其用四十有九인데 점치는 때 49개의 시초(蓍草)를 쓰면서 55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는 과거의 경방(京房), 마융(馬融), 순상(荀爽), 정현(鄭玄), 요신(姚信), 동우(董遇), 왕필(王弼) 모두가 이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다. 주희는 모두 이치의 필연적 추세에 의해 나온 것으로 인간의 지식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으나 이것도 옳지 않다. 점치는 법에서 49개의 시초를 사용하면서 55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본래 오묘한 것이 아니다. 대연의 수는 55이며 자연수이지만 점치는 법은 인위적이다. 49개의 시초를 사용하는 것은 49개로 4단계의 3반복(四營三易)을 거쳐야 7, 8, 9, 6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7, 8, 9, 6을 얻어야 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55개의 시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55개로 4단계의 3반복을 거쳐도 7, 8, 9, 6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없고, 7, 8, 9, 6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없으면 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시() 또는 책()이라는 것은 하나의 산가지(籌碼)에 불과하다. , (), (), 책은 같은 것으로 고대의 계산도구이다. 점칠 때 시초 대신 젓가락, 성냥개피, 막대기를 사용해도 된다.

分而爲二以象兩’. 점치는 법은 네 단계로 나뉜다. ‘分而爲二는 첫번째 단계이다. 49개의 시초를 손가는 대로 한번 나누어 두 부분이 되게 하면 양 손에 나누어진 것이 몇 개인지가 일정하지 않다. 맨 나중에 7, 8, 9, 6이라는 4개의 숫자 중 어떤 하나의 수가 손가는대로 나눈 것에서 얻어진다. 이것은 곧 얻어진 음효 또는 양효가 손가는대로 한번 나눈 때에 이미 결정되었음을 말한다. ‘以象兩49개의 시초가 나뉘기 전은 하나의 통일체이고 통일체의 일()이며 그것은 대일(大一), 대극(大極)을 상징한다. 옛날 사람들이 말한 50에서 49를 뺀 1이 대일, 대극을 상징한다는 말은 틀린다. 50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이미 틀린다. 왜냐하면 대연의 수는 55이지 50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는 50에서 49를 뺀 나머지 사용하지 않는 1은 대일, 대극을 상징한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왜냐하면 사용하는 것(49)만이 상이 있고 사용하지 않는 것(6이지 1이 아니다)은 상이 없다. 사용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연구할 필요가 없으며 49를 사용하여야만 49가 상이 있기 때문이다. 점치는 법 가운데 49가 나뉘지 않았을 때 그것은 하나의 통일체로 대일, 즉 대극을 상징한다. 󰡔주역󰡕은 상으로 사상을 표현전달한다. 괘에 상이 있고 서()에도 상이 있다는 것은 󰡔주역󰡕의 기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옛날 사람들은 점치는 법의 각 단계에 의미가 있다고 보았으며 특정한 이치를 대표한다고 보았다. 옛날 사람이 어째서 점치는 법의 어떤 매듭이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말해야만 했는가? 그것은 점치는 법의 신비성을 강조하여 영험한 것임을 믿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학적이 아님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점이 점치는 일을 막기 때문에 우리는 괘를 따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들이 연구하여야 할 것은 거기에서 언급하는 이 반영하는 사상이다. 옛날 사람은 分而爲二에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象兩이라고 생각하였다. ‘象兩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니 하늘과 땅은 대일, 대극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양의(兩儀)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分而爲二할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은 대일, 대극이 나뉘어 둘이 된 양의이다. 하늘과 땅은 가장 큰 分而爲二이며 양의이다. 양의는 사실 대립의 통일이다.

掛一以象三은 점치는 두번째 단계이다. 나뉘어 둘로 된 시초 안에서 한 개를 가져다가 한 구석에 놓으면 49개의 시초가 세 부분으로 된다. 앞서 갈라놓은 두 부분의 시초는 하늘과 땅의 양의를 상징하고 새로 뽑아낸 한 개는 하늘과 땅 사이에 탄생한 인간이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존재하면서 실천한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옛날 사람들이 이 때 벌써 인간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여 인간이 하늘이나 땅처럼 중요하다고 보았음을 설명한다. 옛날 사람의 개념으로는 이른바 하늘과 땅(天地)은 자연계를 가리키고, 인간()은 인류사회를 가리킨다.

之以四以象四時에서 설은 동사로 숫자를 센다는 의미이다. ‘之以四4개 씩 세는 것이다. 앞의 모두 49개인 시초는 分二而爲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掛一은 한 쪽에서 1개를 끄집어 낸 것이니 두 부분에는 아직 48개가 남는다. 이미 두 단계가 끝났고 지금 진행되는 것은 세번째 단계이다. 4개씩 센다는 것은 실제로는 양 쪽 손의 시초를 4개씩 덜어 낸다는 것이다. 모두 48개이므로 한 손의 시초를 4개씩 덜어낸 나머지가 1이라면 다른 손의 나머지는 3이다. 만약 나머지가 2라면 다른 손의 나머지는 2이다. 만약 한 쪽 손에 나머지가 없다면 다른 손에도 나머지가 없어야 한다. 나머지가 없을 때는 나머지를 4로 본다. 총괄하자면 각 손에서 4개씩 덜어낸 나머지 숫자는 1, 2, 3, 4를 벗어날 수 없으며, 두 손의 나머지의 합은 4가 아니면 8이다. ‘以象四時의 사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다. 점치는 법에서 4개씩 덜어가는 것은 본래 4계절과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옛날 사람들이 4계절과 연관지으려한 것은 점치는 법의 각 단계에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 사람들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말하는 之以四14계절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바로 이 점이 대단한 일이다. 옛날 사람들이 그 당시 이미 자연계 4계절 변화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게다가 앞 뒤의 글에서 언급한 윤달에 관한 생각은 󰡔주역󰡕을 지은이가 이미 역법(曆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역법과 점치는 법[筮法]은 관련이 있으며 역법이 없었더라면 점치는 법이 생길 수 없었다. 인간들이 하늘 즉 자연계의 법칙을 역법을 통해서 비로소 인식하였다. 󰡔서경(書經)󰡕 「요전(堯傳)에서 하늘을 공경하고 해, , 별을 역으로 하며 상으로 한다.(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고 하여 역법을 말한다. ‘은 수를 헤아린다는 것이고, ‘28(二十八宿)의 항성이며, ‘은 해와 달이 서로 만나는 것이다. 이 말은 요 임금 때 사람들이 이미 하늘을 관찰하고 역서(曆書)를 배포할 수준이었음을 증명한다. 요 임금 이전의 역법은 화력(火曆)이다. 화는 대화(大火)로 심수(心宿)의 두 번째 별이다. 뒤에 발전하여 태양력이 된다. 이전에는 하늘에 대한 관념이 없었고 요 임금 때에 이르러서야 있게 된다. 인간들은 , , 별을 역으로 하며 상으로 하여 공경스럽게 인간이 행동하기에 알맞은 때를 주어라(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는 것을 터득한 다음에 하늘과 자연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계사전의 점치는 법에서 4계절을 말하고 윤달을 말한 것은 당시 역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역󰡕이 자연계를 주관세계 밖에 독립한 객체로 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역󰡕의 세계관은 유물론적이다.

歸奇於以象閏 五歲再閏 故再而後掛는 점치는 법의 맨 끝 단계이다. ()는 매번 네개 씩을 덜어낸 나머지 수이다. 륵도 나머지라는 뜻이다. ‘歸奇於은 네개 씩 덜어내고 남은 수를 손가락에 끼운()’ 다음 한 구석으로 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매우 간단한 일이지만 옛날 사람들은 이런 조작법을 역법에서 윤달을 두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연결시켜 歸奇於을 윤달을 두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였다. 이어서 다른 한 손의 시초를 네개 씩 덜어낸 나머지를 손가락에 끼운 다음, 앞에서 네개 씩 덜어낸 나머지와 함께 내려놓는다. ‘은 두 덩어리의 나머지이다. 두 손의 시초는 각각 네개 씩을 덜어낸 다음 나머지를 갖는다. 두 덩어리의 나머지이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再閏이라고 부른다. ‘而後掛하고 나서 한번 바뀜(一易)이 완성되었음을 아뢰는 것이다. ‘再閏은 두 손의 나머지 시초를 한 군데 모으는 것으로 매우 간단한 일이지만, 옛날 사람들은 五歲再閏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5년에 윤달을 두번 넣는 것을 五歲再閏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고대 역법에 실제로 있었다. 이와같이 둘로 나누고(分二), 하나를 끄집어 내고(掛一), 네개 씩 덜어내고(), 두 손의 나머지를 내려놓는(歸奇) 네 단계를 거쳐야 한바퀴 돈 것으로 간주하고 1(一易)이라 부른다. 이어서 같은 방법으로 두 차례 더 돌려야 하니, 합쳐서 ‘3하여야 한 효를 얻을 수 있다.

점치는 직접적인 목적은 효()를 얻어내는 것이고, 효를 얻어내는 실질적 의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음효인지 양효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점쳐서 직접적으로 양효 혹은 음효의 음양부호를 얻어낼 수 없다. 점쳐서 우선 숫자를 얻어내야 하는데 숫자는 네가지의 가능성, 7, 8, 9, 6이 있다. 7, 8, 9, 6 4개의 수는 두개의 양수와 두개의 음수이고, 점을 칠 때 매번 3바퀴 돌리면 반드시 7, 8, 9, 6 4개의 수 가운데 하나의 수를 얻는다. 이 수는 7 또는 8 또는 9 또는 6으로 일정하지 않다. 7은 소양(少陽)이라 하고, 8은 소음(少陰)이라 하고, 9는 노양(老陽)이라 하고, 6은 노음(老陰)이라 한다. 7 또는 9를 얻으면 양효(陽爻)를 긋고, 8 또는 6을 얻으면 음효(陰爻)를 긋는다. 왜냐하면 7, 9는 홀수이고 홀수는 양수이며, 8, 6은 짝수이고 짝수는 음수이기 때문이다.

점칠 때 매번 3바퀴 돌린 다음 어떻게 7 또는 8, 9, 6이란 수 가운데 하나의 수를 얻어내는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얻어진다. 48개의 시초에서 3바퀴 돌고 남은 수의 합을 빼고 4로 나눈다. 그리하여 얻어지는 수는 7, 8, 9, 6 가운데 한 수이다. 48이란 수도 일정하고 4란 수도 일정하다. 확정되지 않은 수는 3바퀴 돌린 나머지 수의 합이다. 3바퀴 돌린 나머지 수의 합은 네가지 가능성, 24, 12, 16, 20이 있다. 48에서 24를 빼고 4로 나누면 6을 얻는데 이것은 음효이다. 48에서 12를 빼고 4로 나누면 9를 얻는데 이것은 양효이다. 48에서 16을 빼고 4로 나누면 8을 얻는데 이것은 음효이다. 48에서 20을 빼고 4로 나누면 7을 얻는데 이것은 양효이다. 그렇다면 24, 12, 16, 20이란 수가 어떻게 얻어지는가? 그것들은 3바퀴 돌리고 남은 수의 합이다. 한바퀴 돌릴 때 마다 49개의 시초는 손가는대로 두 부분으로 나뉘고 掛一1개를 뽑아내어 48개가 된다. 48개가 두 부분으로 나뉘고 각 부분이 之以四’, 4로 나눈 나머지가 얼마이겠는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각 부분의 나머지는 1, 2, 3, 4의 네 종류가 가능하다(딱 떨어지면 4로 간주한다). 만약 한 곳의 나머지가 4이면 다른 한 곳의 나머지도 4이고 4+48이다. 만약 한 곳의 나머지가 1이면 다른 한 곳의 나머지는 3이고 1+34이다. 만약 한 곳의 나머지가 2이면 다른 곳의 나머지는 2이고 2+24이다. 만약 한 곳의 나머지가 3이면 다른 곳의 나머지가 1이고 3+14이다. 이것은 한바퀴 돌린 나머지가 8이 아니면 4이지 다른 어떤 수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두바퀴째 돌린다. 두바퀴째와 첫번째가 다른 것은 첫번째에는 49개의 시초를 사용하였지만, 두번째에는 첫번째 이미 4개 혹은 8개의 시초를 덜어내 놓았기 때문에 40개이거나 44개의 시초가 남았다는 것이다. 두번째의 방식도 첫번째 방식과 마찬가지로 둘로 나누고, 하나를 덜고, 넷 씩 덜어내고, 남은 수를 뽑아내는 네 단계이다. 두번째 바퀴의 나머지는 오른 손이 1이면 왼손은 반드시 2이고, 왼손이 1이면 오른손이 반드시 2이고, 오른손이 3이면 왼손은 반드시 4이고 왼손이 4이면 오른손은 반드시 3이다. 빼놓았던 1개를 보태면(첫번째에는 掛一하였던 한 개를 보태지 않는다) 나머지가 4아니면 8이다. 이어서 세바퀴째를 돌린다. 세바퀴째와 두번째가 다른 것은 시작할 때의 시초가 40, 36 혹은 32개이지 44개일 수 없다는 것이다. 49개는 더욱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앞의 두번의 돌림에서 이미 나머지 8+8=16, 8+4=12개 혹은 4+4=8개를 덜어냈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두번째와 방식이 같고 나머지는 4아니면 8이다. 3바퀴 돌린 나머지의 합은 4가지만 가능하다. 3개의 8, 3개의 4, 2개의 81개의 4, 2개의 41개의 8로 각각 24, 12, 20, 16이다. 48에서 24를 빼면 24가 되고, 48에서 12를 빼면 36이 되고, 48에서 20을 빼면 28이 되고, 48에서 16을 빼면 32가 된다. 24, 36, 28, 32를 각각 4로 나누면 8, 6, 9, 7을 얻는다. 만약 8이나 6을 얻으면 음효를 긋고, 97을 얻으면 양효를 긋는다. 3바퀴를 돌려야 1효를 얻을 수 있고, 1괘는 6효이므로 18바퀴를 돌려 1괘를 완성한다.

 

乾之策二百一十有六 坤之策百四十有四 凡三百有六十 當期之日

 

건의 책수는 216이고 곤의 책수는 144이니 360은 한 해의 날 수에 해당된다.

 

산가지[]은 곧 시()이다. 산가지 하나는 시초[蓍草] 한 개이다. 󰡔주역󰡕의 양효는 모두 노양(老陽) 9이고, 음효는 노음(老陰) 6이다. 건괘는 6개의 양효로 각 노양의 가른 산가지 수(策數)36이다. 여섯 개의 노양은 모두 36×6=216개의 시초를 갖는다. 곤괘의 여섯 음효에서 각 노음의 가른 산가지 수는 24이다. 여섯 노음은 24×6=144개의 시초를 갖는다. 건과 곤 두 괘의 산가지 수를 더하면 360이다. 360은 바로 당시 역법으로 한 해의 날수[日數]이다. 기는 해[]과 같으므로 當期之日은 한 해의 날수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또 점치는 법과 역법이 관련을 맺는데, 이 의미는 위에서 이미 말하였다.

 

二篇之策萬有一千五百二十 當萬物之數也

 

󰡔주역󰡕 상하 2경의 산가지 수는 11,520으로 만물의 수에 해당한다.

 

二篇󰡔주역󰡕의 상경과 하경을 가리킨다. 󰡔주역󰡕의 전체인 64괘는 384효이고 양효와 음효가 각각 192개이다. 양은 노양이고 음은 노음이다. 따라서 19236을 곱하여 6,912 산가지를 얻고 19224를 곱하여 4,608산가지를 얻는다. 6,9124,608을 더하면 11,520산가지를 얻는데, 이는 대략 만물의 수에 해당한다. 이것은 萬物이 건괘와 곤괘가 변화하고 발전한 결과임을 나타내 준다. ‘萬物‘10,000[]’자는 개략적인 것이지 사실을 정확하게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10,000이 가득찬 수라는 의미에서 취한 것이다. 10과 상대하여 비교하면, 10은 작은 채움[小盈]이고 10,000은 큰 채움[大盈]이다.

 

是故四營而成易 十有八變而成卦 八卦而小成 引而伸之 觸類而長之 天下之能事畢矣

 

이런 까닭에 서죽(筮竹)4번 경영하여 1변을 이루고 18변하여 괘를 이룬다. 8괘는 소성괘이다. 8괘를 끌어와 중첩시키고 동류와 합쳐 키우면 세상의 가능한 일을 남기지 않는다.

 

영은 경영(經營)과 같다. ‘四營은 위에서 말한 分二’, ‘掛一’, ‘’, ‘歸奇등의 4단계이다. 4단계가 갖추어지면 1역이 된다. 1역은 곧 1변이다. 3변이 1효가 되고 18변이 1괘가 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점치는 법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다. 이하의 글들은 8괘가 어떻게 64괘로 변하는가를 말한다. ‘八卦而小成의 소성은 세계의 모든 사물을 포괄하지 못한다. 8괘는 여덟가지 성질을 대표하여 여덟 측면에서 세계를 반영할 수 있지만 더욱 복잡하고 넓은 차원에서 세계의 복잡성을 반영할 수는 없다. 더구나 세계의 운동과 변화를 반영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8괘는 64괘로 변한다. 8괘가 어떻게 변하여 64괘가 되는가에 대해 송나라 학자들은 한 배를 더하여 두 배가 되는 방식으로 변한다고 생각하였다. 8괘에 한 배를 더하여 16괘가 되고, 16괘에 한 배를 더하여 32괘가 되고, 32괘에 한 배를 더하여 64괘가 된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틀렸다. 여기에서 말한 引而伸之계사전 하引而重之는 같은 의미이니 8괘의 각 괘의 위에 8괘를 포개어 64괘를 이룬다. ‘觸類而長之와 위의 引而伸之는 당연히 같은 단계이며 의미가 같다. 그러나 引而伸之64괘의 형성을 말한 것이고 觸類而長之384효의 전개를 말한 것이다. 64384효가 있으면 세상의 모든 일을 완전히 포괄할 수 있다.

 

顯道神德行 是故可與酬可與祐神矣

 

세상의 법칙을 드러내고 덕행을 신비롭게 제시해준다. 그러므로 서로 호응하고 신을 찬미하고 도울 수 있다.

 

위의 글에서는 네 단계의 조작으로 한번 바뀜(一易)을 이룸으로써 천하의 능숙한 일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64괘의 생성과 󰡔주역󰡕의 완성으로 세상의 도가 여기에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다. 여기의 세 문장은 󰡔주역󰡕의 효용성을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한다. ()은 동사이고 신()도 동사이다. 현은 감추어진 것으로부터 드러남이니 은미한 것이 드러나서 쉽게 눈에 뜨이게 하는 것이다. ‘이란 글자는 󰡔주역󰡕에서 본래 음양을 헤아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음인지 양인지 미리 알 수 없어 하나로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작()은 고대의 주법에 쓰이던 말이다. 술마실 때 주인이 먼저 손에게 술을 권한 다음 손이 주인에게 술을 권하고[] 맨 나중에 주인이 술을 권한다[]. 그러므로 수작은 응대한다는 의미이다. ()는 찬미하고 돕는 것이다. 도는 󰡔주역󰡕에서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음양의 변화를 가리키며,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자연계와 인류사회의 객관법칙에 해당한다. ‘顯道에서 도는 모든 사태와 물건 가운데 숨겨져 법칙이 쉽게 드러나지 않아 볼 수 없지만 󰡔주역󰡕은 그 자체의 음양변화를 충분히 이용하여 객관법칙을 드러낼 수 있다. 덕행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 인간의 수양과 행위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방향을 결정할 수 없지만, 󰡔주역󰡕神德行할 수 있어서 점친 숫자의 불확정한 변화를 통해 인간들에게 무엇은 해야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행복을 얻고 어떻게 하면 재앙에 이르는가를 지시하여 준다. 󰡔주역󰡕에 이런 묘한 작용이 있기 때문에 인류가 안고 있는 어떤 문제에도 대답하며 심지어는 대자연의 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작용에도 도움을 준다.

 

子曰 知變化之道者 其知神之所爲乎

 

공자가 말하기를 음양변화의 법칙을 아는 자는 신의 조화를 알 것이다고 하였다.

 

子曰은 제자가 공자의 말을 적은 것임을 나타낸다. 앞에서 말한 적이 있지만 역대전의 사상은 공자에서 유래하여 역대전은 공자가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자가 모두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공자보다 앞선 시대의 설을 이어받고 어떤 것은 후대에 슬며시 끼어 넣은 것이고 어떤 것은 공자의 말을 제자가 기록한 것이다. ‘子曰이라고 밝히는 것은 분명히 뒤에 일어난 상황이다. 이 두 구절은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는 제9장에 집어넣고 󰡔사부총간본주역(四部總刊本周易)󰡕에서는 제10장에 넣었다. 내가 보기에는 주희가 9장에 집어넣은 것이 맞다. 이 두 귀절의 공자의 말은 우리들이 󰡔주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變化之道知神之所爲를 같은 일로 본 것이고 명확하게 신이 곧 변화의 도임을 말한 것이다. 일반인은 󰡔주역󰡕에서 말하는 신이 의지를 가진 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주역󰡕은 변화를 설명하는 책이며, 거기에서 사용된 3개의 중요한 개념인 역(), (), ()은 변화를 말한다. 예컨대 역의 경우 生生之謂易는 바로 역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도의 경우 一陰一陽之謂道는 바로 음과 양이 끊임없이 변화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도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변화의 법칙이다. 예컨대 신의 경우 陰陽不測之謂神의 신은 점칠 때의 변화의 방향이 양인지 음인지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신과 도의 관계는 만약 도가 변화의 법칙이고 법칙이 필연성이라면 신은 바로 필연성이 우연성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주역󰡕 중의 변화의 도는 모두 을 통해 표현된다. ‘神之所爲는 변화의 도를 표현한다.

 

 

10

易有聖人之道四焉 以言者尙其辭 以動者尙其變 以制器者尙其象 以卜筮者尙其占

 

󰡔주역󰡕에 성인이 취하는 방법이 네가지 있다. 말로써 하는 사람은 괘사와 효사를 숭상하고, 행위로써 하는 사람은 변화의 법칙을 중시하고, 문물제도로써 하는 사람은 상을 중시하고, 점치는 것으로써 하는 사람은 점을 중시한다.

 

여기에서 易有聖人之道四焉者 此之謂也까지가 제10장이다. 이 장에서도 역의 효용성을 말한다. 이 글과 아랫 글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으니 빠지거나 중복된 것[錯簡]이 있는 듯하다. ‘易有聖人之道四焉聖人之道는 사실상 󰡔주역󰡕의 도이다. 󰡔주역󰡕의 도 넷은 아랫 글에서 말하는 사(), (), (), ()이다. 󰡔주역󰡕의 이 네 측면의 내용은 서로 연결되어 나누기 어렵다. 그 가운데 사와 점, 변과 상은 한 부류에 속하지만 그것들은 종국적으로는 독자적인 특징을 갖는다. 사 곧 괘사와 효사는 언어로 표현된다. 상은 󰡔주역󰡕에서 사상을 표현하는 기본수단으로 상이 없다면 󰡔주역󰡕도 없다. 상은 괘획, , 위 등으로 표현되지만 사 안에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변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窮則變 變則通)”에서의 변이다. 변은 주로 효안에서 드러나고 괘 안에서도 드러난다. 변은 본래 형체가 없으므로 상에 의존하여 모습을 비춘다. 점 곧 길흉, 회린, 무구는 인간의 미래 행동방향을 지시해준다. 점이 어떤 때는 길흉, 회린, 무구를 직접적이고도 명확하게 말해 주지만, 어떤 때는 말해 주지 않고 괘사와 효사 안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주역󰡕을 사용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존하여야 한다. 󰡔주역󰡕을 배우고 󰡔주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요구와 취미가 다르기 때문에 󰡔주역󰡕의 네 측면의 내용도 편중되거나 필요에 의해 취사선택될 수 있다.

以言者尙其辭󰡔주역󰡕으로 언어를 풍부하게 한 사람이면 󰡔주역󰡕의 괘사나 효사를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예컨대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말했던 人而無恒의 문제는 바로 󰡔주역󰡕 ()괘 구삼의 자기의 덕을 항상되게 하지 못하니, 어쩜 부끄러움을 당할 지 모른다.(不恒其德 或承之羞)”라는 효사 한 귀절을 인용하여 그의 말의 타당성을 설명할 수 있다.

以動者尙其變󰡔주역󰡕으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주역󰡕의 변을 선택하고 󰡔주역󰡕의 변을 통해 자신의 변을 조절하여 바름을 얻고 틀리는 경우가 없어야 함을 말한다.

以制器者尙其象이라는 말과 계사전 하새끼를 꼬아서 새그물과 고기 그물을 만들어 사냥하고 고기를 잡는다. 이것은 리()괘에서 취하였다(作結繩以爲罔以佃以漁 蓋取諸離)” 등은 한 사람의 손을 거쳐 나왔음을 의심케 하니 훗날 끼어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분명한 이유는 󰡔주역󰡕의 상은 실제의 사물에서 나온 것이지 실제의 사물이 󰡔주역󰡕의 상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우물[]이 있은 다음에 정()괘가 나온 것이지 정괘가 있어 우물이 생긴 것은 결코 아니다.

以卜筮者尙其占󰡔주역󰡕으로 점쳐서 결정하려는 사람이면 󰡔주역󰡕의 점을 중시하여 자신의 주관적 노력 방향을 알아야 함을 말한다. 󰡔주역󰡕은 서()만을 사용하지 복()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서라는 글자 앞에 복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한 음절을 보태어 보다 완전한 단어를 만들려 하였기 때문이다. 단어의 음절이 완전하지 않을 때 글자를 보태어 보충하는 것은 예전 사람들의 글쓰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예컨대 비로 적신다(潤之以風雨)”風雨에서 비가 적셔주는 것이지 바람이 적셔줄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지만 앞에 자를 보탠 것은 음절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덧붙여진 자는 여기에서 실질적 의미가 없다. 고대 한문의 이러한 특징은 고서를 읽을 때 한 글자, 단어가 모두 실질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케 해준다.

 

是以君子將有爲也 將有行也 問焉而以言 其受命也如嚮 無有遠近幽深 遂知來物 非天下之至精 其孰能與於此

 

그러므로 군자는 장차 무슨 일을 하고 무슨 행위를 하려 할 때에는 점으로 물으면서 말의 형식을 갖추면 점이 제시하는 것이 메아리가 소리에 응답하는 것 같아서 먼 것이나 가까운 것, 그윽한 것이나 심원한 것을 가리지 않고 마침내 미래의 일을 알게 해준다. 천하의 지극히 정묘함이 아니면 어느 것이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是以라고 말한 것은 분명 위의 글과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지만 내용은 위의 글과 이어지지 않으므로 위에서 몇 구절이 빠졌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君子將有爲는 인위적인 행위가 있음을 말하고 流行은 실천이 있음을 말한다. ‘問焉은 점으로 물어서(問筮) 결정하는 것이다. 문서할 때의 말은 관직은 ㅇㅇ이고, 이름은 아무개인 ㅇㅇㅇ가 지금 무슨 일로 점을 치며 길흉, 득실, 회린, 우우를 모르니, 분명히 고해주십시오하는 따위이다. 이 문서 글에서 문서하는 본인이 말하면 이고 점[]이 화답한 말은 이다. ‘其受命也如嚮은 점쳐서 받은 명령이 마치 소리와 메아리처럼 저기에서 입이 떨어지자 마자 여기에서 메아리 치는 것과 같아서, 점으로 묻는 사람에 대한 반응이 매우 신속함을 형용한 것이다. ‘無有遠近幽深 遂知來物은 점친 사람이 제기한 문제가 시간과 공간상으로 먼가 가까운가, 은미한 것인가, 깊이있는 것인가를 따지지 않고 遂知來物’, 즉 회답을 주고 미래의 길흉, 득실을 미리 알게 해준다는 것을 말한다. ‘非天下之至精 其孰能與於此는 역의 도가 자세하다는 것을 힘주어 칭찬한 것이다.

 

參伍以變 錯綜其數 通其變 遂成天地之文 極其數 遂定天下之象 非天下之至變 其孰能與於此

 

이리저리 엇섞어 견줌으로써 변화를 이루고 법칙을 이리저리 뒤섞어 정리한다. 그 변화에 통달하여 세계의 괘와 효를 이루고, 그 법칙을 끝까지 탐구하여 괘와 효의 상을 정한다. 세상의 지극한 변화가 아니면 어느 것이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은 점을 찬미한 것이다. ‘參伍以變 錯綜其數두 귀절의 參伍’, ‘錯綜두 단어는 이해가 쉽지 않으므로 남송의 주희는 이미 삼오와 착종은 모두 옛날 말이다. 삼오가 더 알기 어렵다(參伍錯綜皆古語 以參伍尤難曉)”고 하였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이 參伍를 사용하던 상황을 살펴보면 그것의 함의를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순자󰡕에서는 적을 정탐하고 비밀을 살필 때에는엇섞어서 견주어 보아야 한다(窺敵制變欲伍以參;議兵)”고 하고, 󰡔한비자󰡕에서는 말의 이치, 차이를 살펴서 붕당의 갈래를 알아낸다. 이리저리 견주어보는 시험을 통해 내뱉은 말의 진실성 여부를 가린다(省同異之名[] 以知朋黨之分 偶參伍之險 以責陳言之實;備內)”고 하고, 󰡔사기󰡕에서는 반드시 견주어 본다(必參以伍之)”, “견주어 보는 것을 잃지 않는다(參伍不失)”이라 하였다. 󰡔한서󰡕에서 그 상품을 견주는 데는 유사한 것으로 기준을 정한다(參伍其賈 以類相準)”이라 하였다. 옛날 사람들의 參伍에 대한 이런 용례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參伍란 여러 요소를 연관시키고 서로 참고하여 실제와 부합하는 결론을 얻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參伍以變은 시초를 헤아려서 괘를 구하는 문제라 할만 하다. 시초를 헤아린다는 것은 49개의 시초를 손으로 나누어 7, 8, 9, 6을 구하는 것이다. ‘分二’, ‘掛一’, ‘’, ‘歸奇라는 네 단계로 49개의 시초를 나누는 과정이 參伍以變이다. ‘錯綜其數도 시초를 헤아려 괘를 구하는 문제를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錯綜이란 단어를 두 단어로 이해하고 은 뒤섞임, ‘은 정리함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하나의 단어로 위아래로 왔다갔다 하고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자리바꾸는 매우 복잡한 것을 의미한다. ‘錯綜其數49개의 수가 위 아래, 왼쪽 오른쪽을 바꾸어 시초를 나누고 끝으로 7,8,9,6을 얻는 것을 말한다. 총괄하자면 參伍以變 錯綜其數라는 두 귀절은 시초를 헤아려 괘를 구하는 동일한 일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參伍]는 점에서의 변화를 중시하고 다른 하나[錯綜]는 점에서의 수를 중시하는 것으로 이 둘은 호응하는 문장이다. ‘通其變極其數도 동일한 일로 이미 시초를 헤아려 괘를 구하는 과정을 완료하였음을 말한다. ‘通其變은 괘가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極其數는 시초를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成天地之文은 시초를 헤아려 모든 괘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定天下之象은 시초를 헤아려 모든 상을 확정지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은 괘와 효를 가리키고 은 괘와 효가 얻은 상을 말한다. ‘非天下之至變 其孰能與於此는 앞뒤 문맥으로 보아 至變을 칭찬한 것인데, 사실은 점치는 법을 칭찬하고 역을 칭찬한 것이다.

 

易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

 

󰡔주역󰡕은 사려하는 일이 없고 작위하는 일이 없다. 고요하여서 움직이지 아니하지만 감응하여 드디어 세상이 그렇게 된 일에 통달한다. 천하의 지극한 신묘함이 아니면 어느 것이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위의 글에서 至精이라고 찬미한 것은 점치는 묘용을 말한 것이고, ‘至變이라고 찬미한 것은 점으로부터 괘와 효를 생성하는 과정을 말한 것이다. 총괄하자면 점의 역동성을 말한 것이다. 지금은 정태적인 경우에서 말하여 점이 사용되지 않는 때에는 그곳에 그대로 놓여져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여 사려도 없고 행위도 없는 상태이지만, 일단 점으로 물어서 이용하고 감응시키면 역이 通天下之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역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게 된다. 그러므로 공자가 그것을 至神이라 찬미하였다. 󰡔주역󰡕의 이런 특징은 오늘날 컴퓨터와 매우 유사하다. 컴퓨터도 스위치를 껐을 때에는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고 생각도 없고 작용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일단 인간이 사용하면 通天下之故하여 그것이 저장한 정보를 수시로 당신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컴퓨터를 至神하다고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누구도 컴퓨터가 진실로 그렇게 신령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공자가 당시 󰡔주역󰡕至神이라고 칭찬한 것도 의미가 이와 같다.

 

夫易聖人之所以極深而硏幾也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惟神也 故不疾而速 不行而至

 

그러므로 󰡔주역󰡕은 성인이 심오한 이치를 극진히 탐구하고 조짐을 연구한 것이다. 심오한 것을 탐구하였기 때문에 세상의 이치에 통할 수 있다. 조짐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 작용이 신묘하므로 서두르지 않아도 빠르고 가려하지 않아도 이를 수 있다.

 

위의 글에서는 󰡔주역󰡕至精’, ‘至變’, ‘至神을 말했고 여기에서는 성인이 어떻게 󰡔주역󰡕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가를 말한다. ‘성인󰡔주역󰡕을 어떻게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가? ‘성인󰡔주역󰡕至精을 이용하여 심오한 것을 탐구하고, 󰡔주역󰡕至變을 이용하여 조짐을 연구한다. ()은 사물의 이치가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말하고 기()는 사물의 이치가 미미하여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인󰡔주역󰡕至精을 이용하여서 이치 가운데 헤아리기 어려운 을 끝까지 탐구하고, 󰡔주역󰡕至變을 이용하여 이치 가운데 쉽게 드러나지 않는 기미를 연구한다.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는 윗 글에서 말한 至精을 이은 것으로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여야만 천하의 법칙에 통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는 윗 글에서 말한 至變을 이은 것으로 기미를 연구하여야만 세상의 모든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惟神也 故不疾而速 不行而至도 윗 글을 이은 것이다. 󰡔주역󰡕寂然不動 感而遂通 天下之故에서 말미암았기 때문에 不疾而速 不行而至일 수 있다. 어째서 이런가? 왜냐하면 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의 중간에 서두름()’억지로 가려함()’을 용납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子曰 易有聖人之道四焉者 此之謂也

 

공자가 말한 󰡔주역󰡕에 성인의 도가 네가지 있다함은 이것을 말한다.

 

이 글은 윗 글과 연결되지 않으므로 군더더기 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Posted by 샤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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