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서평] 박경리의 김약국의딸들
결국 읽고 말았다. 이런 류의 소설은 보통 피한다. 슬프니까. 민족의 슬픈 역사속에 스치듯 지나가 보이지 않았을 민초들의 비극적인 삶이다.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치열한 독립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이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시대를 다룬 소설들은 다 슬프다.
고등학교 국사시간에도 독립운동사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 일제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무리 칭송받는 우리시대의 작가라지만 읽으면 슬프다는 개인적인 소회는 자유 아닐까.
물론, 독립운동을 했던 선조들의 희생과 민족의 역량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은 당연하지만, 그 시대가 슬프고 또 답답하다. 외면하고 싶은 과거다. 차라리 만주 위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던 고구려 고대사가 더 끌리곤 했다.
마침 tvN의 알쓸신잡에 김영하 소설가가 박경리 묘소를 찾는 장면이 방영되어서 인지 <김약국의딸들>은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다시 자리잡고 있다. 솔찍히 알쓸신잡에서 유시민이 "박경리의 토지를 여러번 씩이나 읽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하는 말을 들은 것이 박경리의 책을 읽어보는 치명적인 동기가 되었다.
<김약국의 딸들>은 1962년에 을유문화사를 통해 최초 발간된 책인데 최신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기획되어 재발간 되었다 보다. 도서관에서도 바로 눈에 띈다. 세련된 분홍색으로된 단색 양장본이다. 바로 빌리고 말았다.
조선의 나폴리라고 불리우던 통영에 대해 시대적 배경과 소소한 어촌 풍경을 잔잔하게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으로 소개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초반에 김약국의 부모에 대한 비극적인 스토리가 이어진다.
김약국의 아버지인 봉룡은 아내 숙정을 못잊어 찾아온 사내와 맞닥뜨린다. 숙정과 사주팔자가 맞지 않아 맺어지지 못했던 가매골의 도련님, '욱'이다. 봉룡은 욱하고 칼을 잡고 나가 산에서 죽인다. 숙정은 비상을 먹고 자살한다. 무협지의 한 활극 부분 같다. 책읽기가 탄력을 받는다.
봉룡과 숙정의 아들인 성수가 주인공인 '김약국'이다. 김약국은 어장사업에 손을 대어 처음에는 번성하는 듯 싶더니 결국 몰락하고 만다.
"비상 묵은 자손은 지르지 않는다 카던데..." (비상 먹고 자살한 사람의 자손은 번창하지 않는다)
라는 복선을 깔고 시작한다. 연달아 벌어질 비극적인 스토리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으라는 작가의 암시 같다. 김약국의 딸들의 사건사고로 줄거리를 정리해 본다.
큰딸 용숙은 과부가 되면서 자식들이 호강하며 잘살기를 바라던 김약국의 처 한실댁의 바람은 부서진다. 용숙은 나중에 의사와 바람을 핀다. 심지어 둘 사이에 사생아로 의심되는 영아를 살해한 것으로 의심받으나 증거는 나오지 않는다.
셋째딸 용란은 성불구에 아편쟁이 연학에게 시집간다. 김약국의 딸들중 가장 외모가 출중했던 용란은 노비의 자식인 한돌과 눈이 맞아 딴집을 차리게 되고 연학이 이를 알게된다. 눈이 뒤집힌 연학은 한돌과 마침 들른 장모를 도끼로 내려쳐서 죽인다. 용란은 실성한다.
넷째 용옥은 별거나 마찮가지인 결혼생활을 한다. 남편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시아버지에게 겁간을 당할 뻔한다. 악마같은 시부를 피하여 부산에서 일하는 남편을 찾아 갔으나 못만나고 돌아오는 중에 연락선이 침몰하여 죽는다.
슬픈 소설을 읽게 될 우려와 같은 나의 기대는 그대로 적중한 셈이다. 두번의 칼부림과 시아버지의 며느리 겁탈 미수 사건, 여객선 침몰 등의 사건들은 슬프지만 무협지만큼 소설의 전개가 박진감이 넘치게 했다. 일제시대 한 집안의 비극적인 몰락과 여성들의 슬픈 운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우리 시대는 그때처럼 암울하지는 않은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까? 소설속의 '실성한 용란'은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고향마을에 돌아다니던 실성한 여자를 떠올리게 했다. 용숙의 영아 살인 의혹은 어제 뉴스에 나온 영아 냉동실 유기 사건이 생각난다. 통영에서 부산까지 섬마다 들러서 가는 연락선 산상호의 침몰은 언급하기도 가슴 아픈 세월호의 축소판이 아닌가.
김약국이 암으로 죽으며, 초상을 치르고 다섯 딸 중 학교선생님인 용빈과 막내 용혜는 서울로 떠난다. 실낯같은 희망의 끈을 독자에게 남겨 두는 것 같다. 유시민은 '이 소설이 박경리가 토지라는 대작을 집필하는 발판이 되었다'고 했다.
책을 덮으니 여운이 남는다. 세련되 보이던 분홍색 표지는 핏빛 비극을 은은히 내뿜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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